오늘 잘 나간다고 내일도 잘 나갈까?
오늘 잘 나간다고 내일도 잘 나갈까?
  • 강은영 기자
  • 승인 2019.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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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품·규모에 따라
어려움 겪는 사업장도 존재

[커버스토리] ⑥ 울산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듣다_석유화학산업

제조업의 중심지 울산을 가다
우리나라 제조업이 위기에 처해 있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고 있다. 위기상황이 가시적으로 드러난 조선산업을 비롯해, 산업 패러다임의 급격한 변화와 함께 위기상황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는 자동차산업에서 특히 위기를 경고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단지 조선산업과 자동차산업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제조업 전반에 대한 점검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에 <참여와혁신>은 우리나라 제조업 전반을 진단하는 기획을 준비했다. <참여와혁신>은 이번 기획에서 우리나라 제조업의 중심지인 울산을 취재해 제조업의 현재를 진단하고,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하고자 했다.

지난 2015년, 현대중공업이 위기를 맞으면서 울산의 경기는 급격하게 악화됐다. 현대중공업의 구조조정으로 많은 사람들이 울산을 떠났고, 협력업체들도 대거 무너져 내렸다. 몇 년간 이어진 불황의 터널에서 벗어나 최근 회복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고 하지만 울산 시민들은 주머니를 열 생각이 없어 보인다.

울산을 받치고 있는 또 하나의 업종인 자동차산업도 어렵다고는 했지만 실제로 어려움을 겪는 것 같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지난 2018년 현대자동차 영업이익이 상장 44년 만에 처음으로 적자를 기록하면서 위기에 대한 불안감은 피부로 와 닿기 시작했다.

울산의 주력 업종이라고 하는 조선산업과 자동차산업이 위기에 봉착하면서 석유화학산업만이라도 건재해야 한다는 기대와 함께 똑같은 무게로 우려의 시선도 쏠리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가 발표한 ‘2018년 수출입동향’을 살펴보면 석유화학산업은 사상 최초로 연간 수출액 500억 달러를 돌파한 것으로 나타났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유가상승에 따른 수출단가 상승과 국내 신·증설 설비 가동이 수출 증가에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했다. 다만, 2019년에는 미·중 간 무역 갈등 장기화와 글로벌 공급 과잉 등으로 호황기가 끝나고 불황기에 접어드는 것 아니냐는 걱정도 있다. 국내 요인보다는 국제 유가와 글로벌 경기에 영향을 받는 석유화학업계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대비를 살펴본다.

KCC울산공장

잘 나가는 석유화학, 안심할 수 있을까?

울산 남구에 지역 경제의 50%를 담당하고 있는 SK, LG, 에쓰오일 등 국내 굴지의 석유화학회사들이 모인 단지가 조성돼 있다. SK 석유화학그룹만 해도 울산지역에서 차지하는 매출이 약 50조 원에 이를 정도로 석유화학산업은 지역을 지탱하고 있는 주요 기중 중 하나다. 석유화학산업은 위기를 겪고 있는 조선산업이나 자동차산업과는 달리 ‘잘 나가고 있다.’ 수출은 호황을 이어가고 있고, 주요 석유화학 기업들의 영업이익도 견실하다. 금융감독원이 발표한 ‘2018년 사업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직원들의 임금수준이 가장 높은 기업은 에쓰오일이다. 이처럼 석유화학산업의 주요 대기업들은 호황을 누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석유화학산업은 정말로 탄탄대로를 달리고 있을까?

석유화학 제품은 한국의 10대 수출 상품에 빠지지 않고 들어간다. 이런 석유화학산업의 실적을 좌우하는 것은 국내 요인보다 국제 경제상황이다. 수출 물량이 많은 만큼 국제 경제상황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게 석유화학산업이다. 강영훈 울산발전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2000년 초반에 과잉물량으로 어려움에 처할 있는 상황에 직면했으나, 중국이 주요 수출국으로 등장하면서 위험을 넘어서고 호황기를 10년 이상 유지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중국의 성장이라는 국제 경제상황이 국내 석유화학산업을 호황으로 이끈 것이다.

하지만, 석유화학산업의 호황을 부른 바로 그 이유가 반대로 석유화학산업의 위험요인이 되고 있기도 하다. 그동안 주요 수출 대상이었던 중국은 성장과 함께 자체 기술 개발에 매진하고 있다. 강영훈 선임연구위원은 “중국이 범용제품 분야에서 급격하게 추격해 오면서 범용제품에 대한 경쟁력을 많이 잃은 상태”라며 “국내 기업들은 자발적 M&A를 통해 돌파구를 확보하려 노력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노동계도 석유화학산업의 성장이 지속되기는 쉽지 않다는 것에 동의했다. 이준희 한국노총 울산본부 의장은 “석유화학산업은 중국발 쇼크에 가장 민감하다”며 “최근 중국에서 대규모 공장을 짓고 있어 수출길이 막히고 있는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진화하는 산업, 멈춰버린 고용

주요 대기업들은 장기적인 안정성을 장담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지금은 안정적인 수익을 확보하며 호황기를 유지하고 있다. 그렇다면 모든 석유화학 기업들이 마찬가지일까? 중소 규모의 사업장을 취재한 결과는 그다지 밝지 못하다.

한국노총 소속 전국화학노동조합연맹(이하 화학노련)과 민주노총 소속 전국화학섬유식품산업노동조합(이하 화섬식품노조) 사업장을 찾아 그들이 말하는 울산 석유화학산업의 현재 상태를 들어봤다.

한국유에스지보랄노조 위원장이면서 화학노련 울산본부 사무국장을 맡고 있는 정원식 위원장은 “화학노련 사업장들 중에는 SK이노베이션과 같은 대형 사업장뿐만 아니라 원료를 통해 합성수지·합섬원료·합성고무 등의 유도품을 생산하거나 화학섬유 및 유기·무기화합물을 생산하는 사업장 50여 곳이 울산에 있다”고 소개하면서 “국제 유가 상승으로 기초 원료를 생산하는 사업장들은 실적이 좋은 편이지만 조선·자동차산업의 불황으로 인해 원료 등을 납품하는 사업장들은 상황이 좋지 않다”고 밝혔다.

화섬식품노조 사업장 중에도 상황이 좋지 않은 사업장들이 있다. 그 중 한 곳인 KCC는 현대중공업을 마주보고 있는 울산 동구에 위치해 있다. KCC의 생산품은 페인트로, 주요 거래처는 현대자동차와 현대중공업이다. ‘잘 나갔던’ 대기업들과 거래하면서 함께 성장하던 KCC는 현대중공업이 위기를 겪고 현대자동차의 생산이 줄면서 덩달아 생산량을 줄였다.

회사의 어려운 상황을 노조도 체감하고 있다. 화섬식품노조 KCC울산지회(이하 KCC지회)는 KCC가 1999년 이후 20년 동안 신규 채용을 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240여 명의 생산직 조합원들의 평균 연령은 50세를 넘어섰고, 매년 정년퇴직으로 10여 명씩 퇴사하고 있다. 이렇게 일하는 사람은 줄어들고 있는데, 빈자리를 채우기 위한 채용이 없으니 지회의 고민은 깊어지고 있다.

지회 관계자는 “계속해서 근무하는 사람들은 빠져나가는데 인원이 충원되지 않으니 노조의 조직력이 약화되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다”며 “최대 거래처인 현대중공업 상황이 반등하고 있으니 인력을 늘려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사측은 그 필요성을 못 느끼고 있는 것 같다”고 토로했다.

전기석 KCC지회장은 “몇 개월 동안 특근도 없고 일거리가 없으니 임금에 대한 조합원들의 불만이 많다”며 “자식 결혼이나 학자금을 지원해야 할 조합원들이 많으니 사측은 무턱대고 임금을 줄이기보다는 임금을 보전하는 방법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유에스지보랄 울산공장
한국유에스지보랄 울산공장

한국유에스지보랄노조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정원식 위원장은 “자동화 기계들이 점차 들어서면서 필드에서 직접 뛰기보다는 조종실에서 컴퓨터로 조종하는 컨트롤러 방식으로 많이 바뀌고 있다”며 “디지털로 조종하기 때문에 현장에 내려가는 경우가 줄었다”고 설명했다.

인원도 더 이상 증가하지 않는다. 정원식 위원장은 “대형 사업장들을 제외하면 신규 채용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고, 정년퇴직으로 감소하는 인원만을 뽑을 뿐 인원을 확대해 뽑는 경우가 없다”며 “한국유에스지보랄에서는 1명의 인원을 뽑는데 지원자가 400명이나 됐을 만큼 울산에서 취직하기가 굉장히 힘들어졌다”고 말했다.

KCC지회도 “정년이 늘고 조합원들의 나이는 증가하는 반면, 새로운 사람이 들어오지 않으니 지금 있는 사람들로만 현장을 끌고 가는 형국”이라며 “사측은 그저 이익 추구를 위해 맨아워에만 집중하는데 그러다 보니 일하다 다쳐 사고가 나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양극화도 발생하고 있다. 특히 지자체와 협의하면서 문제를 헤쳐 나가는 대기업에서는 그나마 노조도 활동하기 수월하지만, 사정이 어려운 사업장이나 중소사업장에서는 스스로 문제를 풀어나갈 해결책이 뚜렷하지 않다. 화학노련 울산본부 차원에서 이런 사업장들을 지원할 방안을 고민하고 있지만, 그 속도는 더디다.

노조 입장에서는 고용과 양극화가 고민이라면, 회사 입장에서는 기업하기 어려운 상황이 고민이다. 기업이 투자하기 좋은 환경이 만들어져야 산업이 성장할 수 있는데, 환경규제 등 각종 규제들로 울산에서 기업하기가 쉽지 않다. 산업단지가 오래되면서 현재의 석유화학산업단지는 포화상태에 이른 점도 기업의 발목을 잡고 있다. 주차공간도 없어 인도에까지 차들이 늘어선 상태이지만 토지에 대한 제약으로 공장 증설은 쉽지 않은 상황이다.

현실로 다가오는 위기, 극복하기 위해서는

석유화학산업이 겉으로는 최대의 수출 실적을 올리고 있고 호황기를 구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이는 산업 사이클의 변화에 따른 것으로 지속성을 장담하기 힘들다.

또한 석유화학산업 전반이 골고루 호황을 누리는 것도 아니며, 조선·자동차산업 등 위기를 겪고 있는 산업에 납품하는 기업이나 중소기업들의 경우에는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다.

이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당사자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이를 토대로 당사자들이 함께 문제를 풀어나갈 대안을 마련하는 것이다. 그러나 앞서 다른 산업에서와 마찬가지로 석유화학산업에서도 당사자들 간의 대화가 잘 이루어지는 편은 아니다. 개별 사업장 노사만의 힘으로 산업단지의 문제, 지역의 문제를 풀어나가는 것은 가능하지 않은 만큼 지역 차원에서 노사민정의 사회적 대화가 필요하지만, 이 같은 대화는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사업장 내에서도 SK이노베이션 노사가 상견례 자리에서 임단협을 타결한다거나, 협력업체와의 상생을 위해 노력하는 등 노사 간의 원만한 대화가 이루어지는 사업장이 있는 반면, 회사가 일방적으로 정책을 강행하면서 노사 간에 마찰을 빚고 있는 사업장도 있다.

특히 지역의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주도적인 역할을 해야 할 지자체에 대해서도 다른 주체들의 불신이 크다.

전기석 지회장은 “지금의 지방 정부는 어려운 사람을 돌봐주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면서 “서민을 위한 정책이나 노동존중사회가 제대로 돼 있지 않아 노사민정 회의를 한다고 해도 제대로 실현될 것 같지 않다”고 불신을 보였다.

결국 현재 석유화학산업, 나아가 울산이 다가오는 위기 혹은 현재 겪고 있는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노사정 당사자들의 대화가 전제되어야 한다. 또, 각 주체들도 산업의 패러다임 변화에 발 맞춰 스스로 변화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런 주체들의 노력과 서로 간의 대화가 전제되면, 그 위에서 정밀화학 제품과 같은 고부가가치의 특화된 제품을 개발하거나 이를 위한 R&D 투자를 강화하고, 산업 간 융·복합을 통해 새로운 제품군을 개발하며 수익모델을 다각화하는 것도 가능해질 것이다. 나아가 기업의 경쟁력을 키우고 외국자본을 유치해 석유화학산업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는 것도 이런 당사자들 간의 대화와 협력, 변화하고자 하는 노력이 전제될 때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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