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공장 설립 강행에 노동자는 없었다
자동차 공장 설립 강행에 노동자는 없었다
  • 박석모 기자
  • 승인 2020.06.22 09:52
  • 수정 2020.06.22 09: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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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 문제의식 담은 4대 의제는 실종상태
협정 파기 선언한 뒤에야 사측 만날 수 있었다

커버스토리 ➋ 광주형 일자리의 문제의식은 무엇이었나?

2017년 10월 19일 광주형 일자리 성공기원 정책협의회 © 광주광역시
2017년 10월 19일 광주형 일자리 성공기원 정책협의회 © 광주광역시

앞에서 본 것처럼 광주형 일자리를 추진하는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정확하게는 광주형 일자리 모델이 적용된 모델 기업을 설립하는 과정은 수차례 무산 직전까지 이르렀다. 광주광역시가 광주글로벌모터스(GGM)를 출범시켰지만 광주형 일자리 논의를 함께 진행해왔던 광주지역 노동계가 협정 파기를 선언했다가 복귀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이 과정에서 광주형 일자리가 애초에 가졌던 문제의식은 희미해졌다. 당초 광주형 일자리를 제기했던 문제의식은 어떤 것이었을까?

새로운 일자리는 혁신적 일자리여야 한다

광주형 일자리를 처음 제기했던 2014년 당시 광주의 일자리 상황은 악화일로에 있었다. 광주지역에는 청년들이 선호하는 일자리가 턱없이 부족했다. 대기업으로는 기아자동차 광주공장, 금호타이어, 광주은행 등이 있었고, 범위를 전남지역으로 넓혀도 한국전력, 보해양조 등이 있을 뿐이었다. 더구나 금호타이어는 수년간 지속된 금호그룹의 위기와 워크아웃을 거치며 예전의 위상을 상실했고, 경제위기가 지속되면서 신규인력을 채용하지 않는 기업들이 많았다. 이 때문에 광주지역의 청년들은 광주가 아닌 타 지역에서 일자리를 구해 광주를 떠났다.

윤종해 한국노총 광주지역본부 의장은 “광주가 민주화의 성지라고 이야기되지만 기업들이 투자하지 않아 일자리가 부족했고 젊은 세대는 지역을 떠나 다른 데로 갈 수밖에 없었다”면서 “그런 악순환이 계속되면서 투자는 없고 기업은 하기 힘들고 취직할 데도 없고 서울이나 다른 지역으로 가 봐야 얻는 일자리는 중하위 정도 일자리에 불과했다”고 이야기한다.

윤종해 의장은 이어 “어느 정도 조건을 맞춰주면 젊은이들이 지역을 떠나지 않고 생활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면서 “크게 만족할 수는 없겠지만 적정한 임금을 받으면서 교육이나 의료, 주거 등 복지가 보장되면 광주에서도 생활할 수 있는 수준은 되겠다는 문제의식에서 광주형 일자리가 처음 제기됐다”고 설명했다.

결국 광주에 새로운 일자리를 만드는 것이 결론이었다. 그런데 기왕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려면 기존의 일자리와는 다른 혁신적인 일자리를 만드는 게 필요했다. 기존의 일자리는 소통 부재, 참여 배제, 갈등과 대립의 노사관계, 극심한 양극화, 비정규직으로 채워진 일자리 등으로 비판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새롭게 만들어지는 일자리는 이 같은 비판으로부터 한 걸음 진전된 일자리여야 했다. 노사 간의 소통이 필요했고, 배제가 아닌 참여가 필요했다. 불안정한 비정규직 일자리가 아닌 정규직 일자리여야 했고, 원·하청 간의 극심한 격차를 해소할 수 있는 일자리여야 했으며, 기업의 투자를 유치할 수 있는 일자리여야 했다.

노동자 양보를 통한 일자리 창출

광주에서 이 같은 일자리 아이디어를 구체화하기 위해 벤치마킹한 모델은 ‘아우토 5000’으로 불리는 독일 폭스바겐사의 실험이었다. 1990년대 후반 폭스바겐사는 경영상의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 동유럽 지역으로 공장 이전을 추진했다. 독일보다 인건비가 낮았기 때문이다. 다만 폭스바겐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폭스바겐은 국민차라는 의미다) 때문에 쉽사리 공장을 이전하기는 쉽지 않았다.

폭스바겐 경영진은 1999년 말 고민 끝에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 회사가 독립법인을 만들어 5,000명의 실업자를 월 5,000마르크의 임금으로 채용한다면 노동조합에서 이를 수용할 수 있느냐는 질문이었다. 월급 5,000마르크는 당시 폭스바겐 노동자의 임금보다 20% 정도 낮은 수준이었다. 기존 노동자의 임금 양보를 통해 일자리를 창출하자고 제안한 것인데, 결국 노사 합의를 통해 2001년 8월 폭스바겐의 자회사 형태로 아우토 5000 공장이 설립됐다.

폭스바겐사가 아우토 5000 공장 설립을 제안했을 때 폭스바겐 본사가 위치한 볼프스부르크 지역사회와 정부는 환영의 뜻을 밝혔다. 1990년대를 거치면서 볼프스부르크에서는 자동차 생산량이 거의 40% 줄어들었고 실업률은 17%까지 치솟았다. 자동차 기업들이 생산시설을 해외로 이전하면서 산업공동화 우려도 고조돼 있었다. 독일 내에서 더 이상 좋은 일자리는 생기지 않을 것이라고 여기던 차에 폭스바겐사의 제안은 획기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독일 금속노조(IG Metall)는 이를 쉽사리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자회사라고는 하지만 아우토 5000 공장에 기존 임금보다 낮은 임금이 적용되면 임금이 하향평준화 될 가능성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물론 실업자를 새로운 공장에 정규직으로 채용한다는 조건에는 찬성했지만 임금의 하향평준화 우려까지 지우기는 어려웠다. 이 때문에 폭스바겐사와 독일 금속노조의 협상은 여러 차례 의견충돌을 거쳤고 결렬선언까지 나오기도 했다. 이를 중재한 건 당시 총리였던 슈뢰더였다. 우여곡절 끝에 협상은 합의에 이르렀고 마침내 아우토 5000 공장이 설립되기에 이르렀다.

공무직으로 전환된 노동자들에게 공무원증을 걸어주며 축하하는 윤장현 전 광주광역시장 © 참여와혁신 DB
공무직으로 전환된 노동자들에게 공무원증을 걸어주며 축하하는 윤장현 전 광주광역시장 © 참여와혁신 DB

노사책임경영과 원·하청 관계 개선이 핵심

이 같은 폭스바겐사의 아우토 5000 모델을 벤치마킹한 광주형 일자리는 ‘노사민정이 함께 만들어가는 일자리’로 정의된다. 기업이나 정부가 일자리를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노사민정의 협의를 통해 함께 일자리를 만들어간다는 것이다. 노사 대립이 아닌 참여와 소통의 노사관계, 양극화가 아닌 원·하청의 격차 해소를 통해 상생하는 일자리, 적정노동시간만큼 일하고 적정임금을 받는 일자리라는 문제의식은 4대 의제 속에 녹아 있다.

광주형 일자리의 4대 의제는 적정임금, 적정노동시간, 노사책임경영, 원·하청 관계 개선으로 요약된다. 아우토 5000 사례에서 보이듯이 적정임금은 노동자의 임금 양보를 통한 일자리 창출이라는 문제의식을 포함하고 있다. 완성차 기업 정규직의 임금은 평균 연봉으로 8,000만~9,000만 원에 이르는데, 이 같은 임금수준으로는 기업의 투자를 유치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그보다는 낮은 수준의 적정임금을 제시한 것이다. 하지만 적정임금의 구체적인 수치가 공개되면서 광주형 일자리는 의도하지 않은 ‘반값 일자리’ 논란을 겪었다.

적정임금에는 시급제의 기반 위에 기본급 비중이 낮고 각종 수당 비중이 높은 왜곡된 임금체계를 바로잡는 것이 포함된다. 실제로 광주형 일자리가 제기되던 당시 우리나라 완성차 기업의 임금 구성을 보면 기본급은 40% 수준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각종 수당과 상여금이 차지했다. 이런 임금체계는 장시간노동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임금체계를 바로잡는 것은 적정노동시간만큼만 일해도 충분히 생활이 가능한 적정임금을 받을 수 있을 때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적정임금과 적정노동시간보다 더 중요한 것은 노사책임경영이다. 노사책임경영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이해당사자인 노동자(노동조합)와 기업의 참여가 이루어져야 한다. 기업이 결정하면 노동자는 시키는 대로 일만 하는 일자리 모델로는 더 이상 창의적인 노동이 가능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기껏해야 인건비를 낮춰 비용경쟁을 할 수 있을 뿐이다. 이미 우리나라에서는 그 유효성을 상실한 모델이기도 하다. 노사 이해당사자가 공동으로 의사결정을 하고 창의적인 노동을 함으로써 새로운 경쟁력을 찾아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노사책임경영이라는 의제에 들어 있는 것이다.

나아가 우리나라 일자리의 가장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양극화를 해소하기 위한 원·하청 관계 개선 역시 중요한 의제다. 다른 산업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자동차산업에서는 완성차 기업을 정점으로 하는 수직계열화가 자리 잡고 있고, 이 때문에 원청인 완성차 기업과 하청인 부품기업은 수익률에서부터 심한 격차를 보이고 있다. 완성차 기업이 해마다 최고수익률을 갱신하며 승승장구하는 동안 부품기업은 겨우 연명이 가능한 수익률에 머물러 있었다. 원·하청 관계 개선을 통해 일방적으로 종속되지 않는 협력관계를 구축하는 것은 동반성장의 전제이기도 하다.

지역혁신 문제의식은 어디 갔나?

‘노사민정이 함께 만들어가는 일자리’로서의 광주형 일자리는 이 같은 4대 의제가 구현되면서 동시에 노사뿐만 아니라 지자체와 지역사회까지 함께 참여하는 지역혁신모델로 제기됐다. 우리 사회는 사회안전망이 촘촘하지 못하고, 주거와 의료, 교육 등을 대부분 개인이 책임지는 구조로 형성돼 있다. 일부 대기업은 이를 기업복지로 해결하고 있기도 하다. 이 때문에 고임금을 받는 대기업 노동자라 하더라도 일터에서 밀려나는 순간 나락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 노동자들이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발버둥을 치는 이유다.

이런 조건에서 개별기업의 임금을 높이는 대신 지역사회가 주거와 의료, 교육을 함께 해결하는 사회로 나아간다면 굳이 더 많은 임금에 목을 매지 않아도 된다. 광주형 일자리에는 이 같은 구상이 포함돼 있다. 즉 기존의 완성차 기업 노동자들에 비해 임금을 낮추는 대신 부족한 부분을 지역사회 차원에서 일종의 ‘사회적 임금’으로 보완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광주형 일자리는 단순한 일자리 모델을 넘어서는 지역혁신모델이기도 하다.

광주시노사민정협의회가 의결한 협정에도 이 같은 내용이 포함돼 있다. 빛그린산단 안에 노동자들이 저렴하게 생활할 수 있는 주거단지를 마련한다는 내용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 같은 약속은 지켜지지 않고 있다.

윤종해 한국노총 광주지역본부 의장은 “빚그린산단에 주거를 안정시켜 놓으면 교육과 의료도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면서 “그러나 광주시는 약속한 지 2년이 다 되도록 주거안정을 위해서는 한 푼도 만들지 않고 있다”고 비판했다.

노동계가 이를 비판하자 그제야 광주시는 행복주택을 노동자들의 주거용도로 전용하겠다는 계획을 내놨다. 원래 행복주택은 취약계층의 주거안정을 위한 용도로 조성된 것으로 이를 노동자 주거용으로 전용한다는 것은 또 다른 반발을 불러올 수 있는 부분이다.

더 큰 문제는 광주형 일자리의 문제의식을 담고 있는 4대 의제가 자동차 공장 설립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실종됐다는 점이다. 광주형 일자리의 임금을 비롯한 각종 근무조건 등을 논의하고 결정할 기구로 협정서에 명시된 상생노사발전협의회는 구성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광주광역시와 현대자동차 간의 협상을 통해 주 44시간 기준 연봉 3,500만 원이라는 초임이 결정됐다. 임금수준이 적정한지, 노동시간이 적정한지는 차치하더라도 광주광역시와 현대자동차가 임금을 임의로 결정하면서 참여를 전제로 한 노사책임경영의 정신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광주글로벌모터스(GGM)을 설립하는 데에만 치중한 나머지 원·하청 관계 개선을 어떻게 실현할지는 고민조차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그 과정에서 처음 약속을 지키라고 요구하는 노동계의 목소리는 들은 체 만 체 했다. 그러다가 노동계가 협정 파기를 선언한 후에야 이를 무마하기 위한 카드를 마련했다. 어떻게든 노동계를 달래고 불만을 무마하면서 일자리만 만들어‘주면’ 그만이라는 태도로 사업을 밀어붙인 결과다.

광주형 일자리의 정신이 실종되었다는 점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불통이다. GGM이 설립되고 공장을 착공해 공정이 거의 20% 가까이 진행된 상황에서도 노동계를 대표해 참여하고 있는 윤종해 의장은 사측 인사와 같은 테이블에 앉을 기회조차 없었던 것이다. 이용섭 시장의 제안에 따라 GGM 내에 상생위원회가 설치된 이후에야 비로소 논의 테이블을 마주하고 앉을 수 있었다.

이처럼 광주형 일자리는 처음 제기됐을 때의 문제의식이 실종된 채 지금도 언제 꺼질지 모르는 살얼음판 위를 걷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