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터에서 노동을 존중하지 않는 건 '사람'
일터에서 노동을 존중하지 않는 건 '사람'
  • 백승윤 기자
  • 승인 2020.12.11 00:19
  • 수정 2020.12.14 10: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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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 문제 지적하면 동료에게 예민한 사람 취급받아"
"일에서 만족감 느끼는 사람이 자기 노동 존중할 수 있어"

커버스토리  '노동존중'은 일이 즐거운 삶

당신은 내 노동을 존중하지 않는다

최저임금 인상, 모든 노동자의 노조할 권리, 중대기업재해처벌법 등 노동계는 국가를 향해 법과 제도를 요구한다. 노동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노동자, 제도의 사각지대에 놓인 노동 취약계층의 권리를 위해서다.

그러나 제도가 갖춰진다고 해서, 노동권이 보장된다고 해서, 노동자가 존중받는 것은 아니다. 수많은 업종과 사업장에 따라 노동자는 저마다의 이유로 천대받는다. 2018년 시행된 감정노동자 보호법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적잖은 감정노동자들이 인격적으로 무시당하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권리투쟁, 제도 변화를 중심에 두고서 진정한 노동존중을 실현할 수 있을지 의문이 남는다. 노동이 존중받으려면, 노동자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건강하게 일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다양한 직군에서 일하는 노동자 10인을 만나 물어보았다. "일터에서 당신을 힘들게 하는 건 무엇인가요?"

"직업은 곧 내가 꿈꿔오던 미래의 산물이 된다. 그래서 생각지도 않던 직업이라든지, 원하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이 선택된 직업을 홀대할 때가 있다. 스스로 꿈을 이루지 못한 ‘실패자’라고 만들 때도 있는 것 같다. 원하는 직업을 가지는 것도 멋진 일이지만, 생계를 담당한다든지 안정을 담당하고 있는 직업이라도 가치 있는 노동인 건 변함이 없다." - 김예지 《저 청소일 하는데요?》 (21세기북스) 中

노동은 삶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노동자는 하루 평균 8시간 이상을 일터에서 보내고 2시간 이상을 출퇴근에 쓴다. '워라밸'과 '저녁 있는 삶'을 말하는 시대지만, 노동자 대부분은 일터를 떠난 이후에도 일에 닿아있다. 거래처와 만남, 밀린 업무를 끝내기 위한 잔업, 전문성을 기르기 위한 자기 계발 등으로 시간을 보낸다. 물리적으로, 혹은 정신적으로 노동자는 일과 분리된 삶을 살기 어렵다. 일이 고통스러우면 일상도 고통이다. 일이 즐겁다면, 최소한 고통이 없다면 더 나은 일상을 보낼 수 있다.

우리 사회에는 일터에서 최소한의 권리를 보장하지 못하는 노동자들이 넘친다. 노동자는 노동존중사회를 위해서 산재 사망사고, 부당노동행위, 임금 체불, 저임금, 근로기준법 미적용 등을 개선하고 노조 할 권리를 보장하라고 요구한다. 더 나은 일터, 더 나은 삶을 위해서다. 노동하는 사람들은 노동을 통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건강한 삶을 유지하는 것이다.

노동존중사회를 위해서는 인식의 변화가 법·제도를 마련하는 것만큼 중요하다. 앞선 기사에서 <참여와혁신>이 소개한 노동자들도 모두 노동을 존중하지 않는 인식의 문제를 지적했다. 그중 직업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가장 많이 언급됐다. '더럽고, 힘들고, 위험한 일'을 하면 인격적으로도 낮은 대우를 당한다고 말했다. 다른 구성원에게 존중받지 못하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성희롱·폭언·욕설'을 일삼는 상사와 동료, 감정노동자는 고객의 '갑질'에 가장 힘들어했다.

일터에서 노동자가 존중받지 못한다고 느낄 때는 법·제도와 사람, 문화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직업 자체를 천대하는 사회적 시선, 고객의 갑질, 폭언과 욕설 등. 국가의 역할만큼 구성원 개개인도 책임을 지녀야 한다. 노동존중을 요구하는 주체가 노동을 무시하기도 한다.

방송스태프 서혜림(가명) 씨는 "현장에 만연한 성희롱·성추행에 문제를 제기하면 오히려 예민한 사람 취급을 받는다"며 "인맥으로 일하는 업계 특성상 법적 조치를 취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라고 하소연했다. 법으로는 막지 못하고, 사람의 태도가 변해야 존중받을 수 있는 게 일터의 현실이다.

타인의 노동을 존중하는 사회로 나가려면 노동인권교육을 강화해야 한다는 의견이 중론이다. 전문가들은 노동인권을 존중하는 태도와 감수성을 배양해야 '나의 노동'뿐만 아니라 '타인의 노동'도 존중하는 사회를 기대할 수 있다고 말한다.

정부·여당은 '노동인권교육을 교과과정에 연계하여 의무화'를 공약으로 정했지만, 중앙정부 차원에서의 노동인권교육 법제화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 지자체, 교육청별로 노동인권교육을 시행하고 있지만, 노동인권 감수성과 태도에 대한 교육은 미흡하다는 지적이 많다. 노동인권교육이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교육이 되려면 법제화가 필요하다.

노동자, 노동의 가치를 지키는 존재

노동존중사회를 위한 요구와 논의는 주로 권리에 초점이 맞춰져있다. 그러나 노동존중을 요구하는 당사자가 스스로의 노동을 존중하지 않으면 시혜의 대상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목소리도 존재한다. 노동존중사회를 위해서는 외부의 존중뿐 아니라 노동자도 주체적으로 노동의 가치를 지키는 책임감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신인아 워크인조직혁신연구소 부소장은 "일을 통해 만족감을 느끼는 사람이 자신의 노동을 존중할 가능성이 크다"며 "일에 대한 몰입"을 강조했다. <참여와혁신>이 앞에서 만난 노동자들은 자신의 노동을 존중하고 있었다. 자신의 일이 가치 있다고 여기고, 일에 몰입하며 역량을 기르고 있다.

학교야간당직노동자 오기환 씨는 "사회적으로 하찮게 볼지 몰라도 내 일이 일종의 교육이란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며 "학교 업무를 이해하기 위해 자료를 찾아보고, 존중받기 위해서 책을 읽고, 다른 당직기사들에게 좋지 못한 모습은 보이지 말자고 얘기한다"고 말했다.

배전노동자인 송석채 씨도 "밖에서 일하면 옷도 지저분하니까 주민들이 무시하는 얘기를 종종 한다"면서도 "그래도 기술자, 남들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한다는 생각으로 배워야 게 있다면 후배에게도 배움을 구하며 기술을 기르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자기 일을 하찮게 여기는 노동자는 타인의 몰입마저 방해하게 된다. 노동자로서, 조직의 주체로서 자신의 노동을 존중하거나 역할을 다하지 않으면 자신뿐 아니라 동료 노동자의 노동마저 폄하할 수 있다.

물리치료사 박승주 씨는 "일터에선 일과 본연의 업무에 충실해야 하는데, 일은 않고 윗사람에게 잘 보이려고만 하는 사람을 보면 허탈감을 느낀다"고 했다. 서혜림 씨도 "현장에서 전문성을 기르려는 노력은 하지 않고 단순히 돈벌이로만 보고 자기 몫을 하지 않는 친구들이 적지 않다"며 "함께 일하면 만족감이 떨어지는 것 같다"고 밝혔다.

반면에 자신의 노동을 존중하고 가치 있게 여기는 노동자는 자신과 타인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건설노동자 김산 씨는 "함께 일하는 팀원들이 모두 일에 자부심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무거운 걸 들면 도와주고 모르는 건 서로 가르쳐주면서 끈끈함도 느끼고 기분도 좋아진다"며 동료들과 서로 도우며 일할 때를 가장 즐거운 순간으로 꼽았다. 신인아 부소장은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은 누군가와 함께 일할 때를 가장 즐거워한다"며 "도움을 주면 자존감이 높아지고 더 신명 나게 일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물론 인식만 전환하면 모든 게 달라질 거라는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니다. 제도적인 변화와 인식의 전환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 지금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 보자. "나는 내 일을 존중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