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존중사회'가 뭔가요?
'노동존중사회'가 뭔가요?
  • 백승윤 기자
  • 승인 2020.12.11 00:16
  • 수정 2020.12.11 02: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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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 없는 노동존중사회 실현 정책
노동존중사회, 법·제도 변화보다 '연대'가 핵심

커버스토리  '노동존중'은 무엇인가

당신은 내 노동을 존중하지 않는다

최저임금 인상, 모든 노동자의 노조할 권리, 중대기업재해처벌법 등 노동계는 국가를 향해 법과 제도를 요구한다. 노동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노동자, 제도의 사각지대에 놓인 노동 취약계층의 권리를 위해서다.

그러나 제도가 갖춰진다고 해서, 노동권이 보장된다고 해서, 노동자가 존중받는 것은 아니다. 수많은 업종과 사업장에 따라 노동자는 저마다의 이유로 천대받는다. 2018년 시행된 감정노동자 보호법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적잖은 감정노동자들이 인격적으로 무시당하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권리투쟁, 제도 변화를 중심에 두고서 진정한 노동존중을 실현할 수 있을지 의문이 남는다. 노동이 존중받으려면, 노동자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건강하게 일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다양한 직군에서 일하는 노동자 10인을 만나 물어보았다. "일터에서 당신을 힘들게 하는 건 무엇인가요?"

한국 노동운동의 역사는 권력에 맞선 투쟁이다. 한국전쟁 이후 독재정권과 기업은 노동을 무시해왔다. 정치·경영에서 배제하고 일터에선 노동자를 착취했다. 권리와 자리를 찾기 위해 노동자들은 권리투쟁을 시작했다. 민주노조를 설립한 1987년 노동자대투쟁, 외환위기 등을 거치며 빼앗긴 권리를 되찾기 위한 투쟁이 이어졌다. 촛불 혁명으로 탄생한 문재인 정부는 노동이 무시당하는 현실을 바꾸겠다며 ‘노동존중사회 실현’을 국민에게 약속했다.

ⓒ 참여와혁신
ⓒ 참여와혁신

일단 던진 노동존중사회

졸속. 문재인 정부의 ‘노동존중사회 실현’ 정책에 따라붙는 대표 수식어다. 어설프거나 서두른다는 얘기다. 문재인 대통령은 당선 직후 인천국제공항을 방문해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 시대"를 선언했다. 그러나 곧 사회적 공감대 없이 정부만 '가속 페달'을 밟고 있다는 우려가 퍼졌다. 결국, 공정성에 대한 문제가 불거졌고, 피해는 노동자들이 떠안았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 갈등이 심화했고, 비정규직들은 절차를 무시한 '무임승차자'나 임금 인상에 따른 비용 부담을 일으키는 '적자의 주범'이란 뭇매를 맞고 있다.

현 정부의 노동정책은 이른바 '노동 없는 민주주의'를 떠올리게 한다. 정치계는 87년 민주화의 주역들로 채워졌지만, 실질적으로 노동자를 대변하는 목소리는 극소수다. 노동계 인사들이 청와대·여당에 자리했으나, 실력의 문제인지 의지의 문제인지 노동정책은 선언적이었다. 최저임금 1만 원 공약은 속도에 집착하다 후퇴했고, ILO 기본협약 비준을 위한 노조법 개정안은 '노동권 보장'이란 ILO 기본정신에 부합한다고 보기엔 허술하다. 여느 정권과 마찬가지로 노동을 시혜의 대상으로만 본다는 비판이 적지 않다. 노동계에선 현 정부가 처음부터 ‘노동존중’을 쓰지 말았어야 한다며, 어설프게 내세웠다가 용어를 오염시켰다는 견해도 있다. 정부는 노동존중사회를 의제로 던졌으나, 그 의미와 목적이 불분명하다.

"노동존중사회=복지국가로 가는 가교"
법·제도 변화보다 ‘연대’가 핵심

현 정부보다 먼저 노동존중사회를 말한 건 노동계다. 노동존중을 처음으로 사회적 화두로 던진 건 김영훈 전 민주노총 위원장으로 추정된다. 2010년 민주노총 6기 위원장에 당선되고 '노동이 존중받는 사회', '노동이 존중받는 나라' 등을 언급했다.

김영훈 전 위원장은 "노동존중사회는 사회적 연대체인 복지국가로 가는 가교"라며 "시혜적 정책을 넘어 모든 일하는 사람의 가치를 우선시하는 기풍과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단지 양대 노총 조합원만을 위한 개념이 아니다. 단순한 법·제도의 변화를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노동자도 타인의 노동을 무시한다. 직업의 귀천을 따진다. 민주노총 조합원도 마트에서 갑질을 할 수 있다. 타인의 노동을 존중해서 연대의식을 축적하고, 나의 노동을 존중받아서 보편복지 사회로 가기 위한 철학을 담고 있는 슬로건이다."

지금처럼은 아니지만, 당시에도 '노동존중'은 이른바 범 진보진영에서 종종 쓰이던 구호였다. 한국노총과 민주통합당은 19대 총선에서 '노동이 존중되는 평등복지국가 건설'을 노동정책 공약으로 채택했다. 이인영 통일부 장관도 2012년 민주통합당 당대표 선거 당시 '노동이 존중받는 복지국가 건설'을 슬로건으로 내세웠다.

노동존중사회가 인식의 전환이자 복지국가와 맞닿아있는 개념이라고 할 때, 문재인 정부의 노동존중사회는 이 같은 철학이 결여된 정책으로 볼 수 있다. 집권 5년 차에 접어드는 시점이지만 연대를 위한 정책은 안 보인다. 단지 과도기적 양상으로 보기엔 법·제도에 구멍이 많다. 일례로 학교에서 발생한 돌봄전담사와 교사 간 갈등은 돌봄법의 부재로 심화하고 있다.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화'로 상당수 계약직은 정년이 오히려 단축됐다. 최근 파업에 돌입한 코레일네트웍스가 대표적이다. 기간제직이었을 때는 70세까지 일할 수 있던 노동자들이 60세 정년을 적용받으며 고용불안을 호소하고 있다.

노동존중사회 자체만 두고 보자면, 김영훈 전 위원장은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인식 변화가 필수적이라고 주장한다. "단지 노조법을 바꾸는 것을 넘어서 예비노동자인 학생을 위해 노동을 정규 과목으로 지정하는 등 문화, 인식 등 사회적 가치, 패러다임의 변화를 이뤄야 한다"는 얘기다. 문재인 대통령은 후보 시절 노동인권교육 의무화를 공약으로 내걸었으나, 노동인권교육을 받은 학생은 절반에 훨씬 못 미친다. 김영훈 전 위원장은 "노동존중사회를 내걸었다면 근본적인 패러다임의 변화를 위한 철학이 필요한데, 단지 계층의 문제로 협소화하지는 않았는지 생각해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노동존중사회, 노동자에게 물어보자

'인국공 사태'와 최저임금 1만 원 공약 후퇴는 인식의 변화 없이 강행되는 법·제도 도입이 갈등을 야기한다는 걸 보여준다. 연대를 위한 성장통일 수도 있지만, 반대로 사회적 분열이나 '노동 정책의 후퇴'를 초래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법과 제도를 바꾸라는 요구만으론 타인의 노동을 존중하는 인식의 전환을 기대하긴 어렵다. 2018년 10월 감정노동자 보호법이 시행됐어도 여전히 일터에는 갑질에 시달리는 노동자가 존재한다. 신인아 워크인조직혁신연구소 부소장은 "한국 사회가 워낙 기울어진 운동장이라 권리를 요구하는 투쟁이 필요하지만 답일 수는 없다"고 지적했다.

노동을 존중하는, 노동이 존중받는 사회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다. 정부의 정책 철학은 모호하다. 정부가 말하는 노동존중사회 실현 정책이 이행되면 노동자들이 존중을 느끼는 사회가 올지도 의문이다. 일터의 노동자는 언제 존중받지 못한다고 느끼고 어떻게 하면 존중받는다고 느낄까. 다양한 직종에 종사하는 10인의 노동자를 찾아가 질문을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