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자리가 따뜻한 자리이기를”
“당신의 자리가 따뜻한 자리이기를”
  • 이동희 기자
  • 승인 2021.03.12 00:20
  • 수정 2021.03.12 13:2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작업실을 찾아 헤매는 청년 예술지망생의 이사 여정 《자리》
[인터뷰] 《자리》 저자 김소희 작가

커버스토리 ④ 《자리》 저자 김소희 작가 인터뷰

예술 = 노동

많은 예술인이 ‘투잡’을 뛰며 예술 활동을 이어간다. 생활고에 시달리다 창작을 포기하는 예술인도 적지 않다. 단지 개인의 재능이 부족해서일까? 예술계에선 부당계약이 만연하다. 교육이란 명목으로 공공연히 착취가 일어난다. 여기 예술은 노동이라 외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창작을 위한 노동의 가치가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을 지적한다. 그리고 예술인이 창작에 몰두할 수 있는 삶을 요구한다.

만화 《자리》는 저자 김소희 작가와 그의 오랜 친구이자 동료인 고정순 작가의 20여 년 전 청춘을 그대로 담았다. 만화에서 김소희 작가는 송이, 고정순 작가는 순이로 그려진다. 자전적 이야기인 만큼 만화에 등장하는 상황, 사건은 모두 작가가 실제 겪은 일들이다.

‘작가 지망생’이라는 이름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다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매서운 일이었다. 두 사람은 보증금 300만 원을 손에 쥐고 창작활동을 할 수 있는 작업실을 찾아 헤맨다. 지금 돌아보면 “진짜 자기 ‘자리’를 찾기 위해 치열하게 머물 ‘자리’를 찾아 헤맸던” 시간이다.

지난달 22일, 서울 성산동에 위치한 그의 옥탑 작업실을 찾았다. 그곳에서 만난 김소희 작가(47)는 자신을 “만화 그리고 일러스트 작업하는 예술노동자”라고 소개했다. 평소에도 예술노동자로 자신을 소개하느냐 묻자 “우리도 노동을 통해서 소득을 얻고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이잖아요. 이에 대한 연대와 권리에 관심을 가져야 제가 《자리》 시절 겪은 어려움들이 해결될 거라고 믿어요”라고 답했다.

 

《자리》 저자 김소희 작가 ⓒ 강민석 기자 mskang@laborplus.co.kr
《자리》 저자 김소희 작가 ⓒ 강민석 기자 mskang@laborplus.co.kr

- 만화 《자리》는 청년 예술지망생이 처한 현실을 ‘작업실을 찾아 헤매는 이사 여정’으로 보여줬습니다.

인간 생활 3대 요소 의식주 중에 제일 갖추기 어려운 게 주(住)라고 생각해요. 25살의 저는 검증받지 못한 작가 지망생이었고, 작업하고 자기계발 할 수 있는 공간을 온전히 제 힘으로 갖기 어려웠죠. 그런 현실 속에서 꿈을 키워나가는 것도 버거웠던 것 같아요. 지금은 나이도 들고 여러 작업을 하면서 조금 여유가 생겼지만, 주변 청년들을 보면 20년 전이랑 현실이 많이 바뀌지 않은 것 같아요.

ⓒ 만만학책방
책 《자리》 표지 ⓒ 만만학책방

- 만화에는 ‘어떻게 이런 집이 이 가격에?’라는 생각이 절로 드는 별별 집이 다 나왔습니다. 모두 실화를 바탕으로 한 집들이죠?

모두 실제로 겪었고 지나왔던 집들이에요. 사실 더 많은 집을 전전했는데 책을 한 권으로 묶으려다 보니 만화에는 일부만 나왔어요. 어이없는 집들이 실제로는 더 있었던 거죠.(웃음) 많은 집들 중에 이 만화를 그리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표지에 있는 그 ‘집’이에요.

“빛 한 점, 공기 하나 느껴지지 않는 지하 2층 주차장…. 사람이 산다고 생각해 본 적 없는 곳…. 그곳이… 내가 지금 있는 자리. 나 혼자서는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에 있어야 하는 거였구나….” ― 《자리》에서

그 컨테이너가 아직 그 자리에 있을까? 청춘들이 거기에 살고 있을까? 살면서 문득문득 생각나더라고요. 거기서 마주친 여학생의 파리한 안색이 지금도 뇌리에 박혀 있어요. 당시 저보다 어린 대학생이었는데 마음 같아서는 당장 여기서 나와야 한다고 말리고 싶었죠. 믿기 힘든 이 장면을 언젠가 꼭 만화로 그리자고 생각했었는데 그때와 지금의 현실이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느끼면서 이 작품을 기획하게 됐어요.

- 작중 송이와 순이가 겪은 고통은 집과 돈이 없는 배고픔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안타깝지만 예술지망생, 무명예술가에게 세심함을 갖추고 대하는 어른이 우리 사회에 많지 않아요. 작중 순이가 출판사 편집자의 무신경함에 상처받고 ‘나는 뭐 하는 사람일까’ 자문하는 장면이 있어요. 저는 제 만화에, 고정순 작가(순이)는 자기 에세이에 그때 일을 남길 만큼 충격이 컸어요. 우리가 정말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는 걸 온몸으로 느낀 사건이었죠. 그 전까지는 작업실 한 칸 구할 돈 없는 처지에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었는데 이러다가 우리가 정말 아무것도 못 이루고 시간만 보내는 거 아닌가, 이대로 자존감 없이 구겨진 채 살아야 하나 불안감이 컸어요.

누군가는 제 생각을 무례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저는 사람에 대한 존중이 있다면 하다못해 그 사람이 나무젓가락, 빈 병으로 예술품을 만들어도 귀 기울여 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예술인 개개인이 만든 예술품은 그 사람의 삶이 녹아 있는 거잖아요. ‘그 사람 유명해? 그거 비싼 거야?’ 이렇게 쉽게 판단하지 않고 존중하는 마음으로 봤을 때 더 귀해지는 게 예술이었으면 좋겠어요.

 

ⓒ 만만한책방
ⓒ 만만한책방

- 창작활동에 집중하면 생계가 어렵고, 생계를 위한 다른 일을 하면 창작활동을 하지 못하는 악순환이 만화에 그려졌는데, 많은 예술인과 예술지망생이 이에 공감할 것 같습니다.

그렇죠. 그 악순환이 도대체 언제 끝나는 걸까 불안도 컸어요. 그나마 그림 그리는 일감이 있을 때는 괜찮은데 그것만으로는 부족하고, 다른 일을 하지 않으면 빈곤기가 찾아오니까요. 소비와 지출의 균형을 맞추기도 어렵고요.

그때 제가 찾은 답은 불안을 잠재울 수 있는 단 한 점의 그림을 그리는 거였어요. 아르바이트에 치여 오랫동안 그림을 못 그렸을 때도 내 마음에 드는 한 점의 그림이 나올 때까지 책상에 앉아있는 게 나를 위한 선물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 그림이 한두 점 쌓이니까 포트폴리오가 되더라고요. 그리고 정말 신기하게도 그렇게 그린 그림은 누군가 꼭 알아보더라고요. 그때 포트폴리오를 보낸 곳이 열 군데면 이 중 한 군데에서는 꼭 연락이 왔어요.

지금의 청년들에게 소통하고자 하는 끈을 어떻게든 잡고 있어야 한다고 말해주고 싶어요. 결국 창작자라는 건 그림을 통해서든, 사진을 통해서든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사람들이잖아요?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찾는 것도 중요해요. 그게 있으면 다른 어려운 일이 있어도 견디기가 훨씬 수월하더라고요. 그리고 저는 그 시기를 혼자 버텼지만, 지금의 청년들은 정부에서 무슨 제도를 시행 중인지 좀 더 적극적으로 알아보고 도움을 받았으면 좋겠어요. 이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살 궁리를 알아보는 공부도 필요하고요.

- 어려운 시간을 보낸 만큼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제 경우에는 첫 단행본을 여섯 권으로 계약했어요. 이미 여섯 권에 맞춰 스토리가 나와 있었는데 갑자기 출판사에서 두 권밖에 책을 낼 수 없다고 통보한 일이 있었어요. 그러면서 이 두 권을 완결로 낼지, 미완결로 낼지 선택하라고 하더라고요. 첫 단행본이니까 미완결은 싫어서 두 권으로 마무리했어요. 그때 정말 엄청 비참했죠. 그때 다시는 만화를 그리지 말자고 생각했어요. 되돌아보면 만화를 그만두고 싶었던 순간은 가난, 배고픔 때문이 아니라 이런 구조적인 문제에서 오는 환멸이었던 것 같아요.

 

《자리》 저자 김소희 작가 ⓒ 강민석 기자 mskang@laborplus.co.kr

-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을 어떻게 극복하셨나요?

만화를 그만 그리자고 마음먹고 나서는 교재 삽화 그리는 아르바이트를 주로 했어요. 근데 아르바이트로만 그림을 그리니까 숨이 막히더라고요. 그래서 틈틈이 드로잉을 하고, 드로잉 노트를 플리마켓에 들고 갔어요. 그렇게 매 주말 반년 정도를 플리마켓에서 지낸 것 같아요. ‘이거 낙서예요?’ ‘원래 뭐 하는 분이세요?’ ‘그림이 너무 좋아요’ ‘홈페이지 있으세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받은 피드백이 저한테 많은 힘이 됐던 것 같아요. 앞으로 내가 뭘 해야 하는지를 다시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었으니까요. 나는 뭐 하는 사람이지? 나는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야. 그럼 나는 뭘 하고 싶은 거지? 끊임없이 질문했죠. 그때 그 시간이 제가 다시 만화를 그릴 수 있는 힘이 된 것 같아요.

이번 만화를 그리면서 되돌아보니 제 과거가 저에게 또 다른 교훈처럼 느껴지더라고요. 그때의 내가 모여서 지금의 내가 됐다고 생각하면 뿌듯해요. 무엇보다 그 시절 순이가 잘 버텨준 게 너무 기특하고 고마워요. 힘들었지만 우리가 친구로서 동료로서 서로 의지하면서 작업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는 것에 감사해요.

- ‘자리’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을까요.

내가 지금 있는 위치, 집의 의미도 있지만 제가 숨긴 의미는 자존감이었어요. 언제 어디에서든지 나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 그게 어떤 자리든 간에요. 쉽지 않아요. 누군가의 한 마디에 쉽게 무너질 수 있어요.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내가 바로 일으킬 수 있는 온전한 내 것. 이게 자리에 담긴 의미입니다.

사실 작업실을 집과 분리해서 가지게 된 게 최근이에요. 마음이 편안한 상태에서 작업실을 얻은 게 처음이라 정말 기뻤어요. 남들이 보기엔 작고 낡은 옥탑이지만 저한테는 호화 크루즈 같은 곳이죠. 창밖에 있는 파랑 지붕에 소나기가 떨어지면 파도를 타고 있는 기분이 들 정도로.(웃음) 작년에 여기서 송이와 순이의 이야기를 그렸어요. 감개무량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