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리를 찾기 위한 예술인의 ‘예술=노동’ 선언
권리를 찾기 위한 예술인의 ‘예술=노동’ 선언
  • 백승윤 기자
  • 승인 2021.03.12 00:05
  • 수정 2021.03.12 13: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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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과 예술은 술(術)의 형제”
“예술과 노동, 다르다는 얘기 멈추고 필요한 걸 논할 때”

커버스토리 ① 예술, 노동의 관점에서 바라보기

예술 = 노동

많은 예술인이 ‘투잡’을 뛰며 예술 활동을 이어간다. 생활고에 시달리다 창작을 포기하는 예술인도 적지 않다. 단지 개인의 재능이 부족해서일까? 예술계에선 부당계약이 만연하다. 교육이란 명목으로 공공연히 착취가 일어난다. 여기 예술은 노동이라 외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창작을 위한 노동의 가치가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을 지적한다. 그리고 예술인이 창작에 몰두할 수 있는 삶을 요구한다.

대안예술공간이포
대안예술공간이포 ⓒ 참여와혁신 백승윤 기자 sybaik@laborplus.co.kr

서울시 영등포구 문래동 3가. 낡은 건물에 자리한 대안예술공간이포에서 <예술밥-전환시대 ‘예술노동, 밥’에 관한 새로운 상상>[▶온라인 전시관]이란 이름으로 전시가 열렸다. 전시가 시작된 작년 12월 17일, 이날 코로나19 확진자는 1,036명이었다. 방문자가 여느 때보다 뜸했던지라 전시는 두 차례 연장 끝에 올해 2월 13일 종료됐다. 그 사이 확진자 방문으로 2주간 문을 닫기도 했다.

쇳소리, 기계 소리 가득한 문래동은 예술창작촌으로 불린다. 철공소가 줄지어 선 골목 사이사이엔 예술인들이 창작 활동을 영위하는 작업실이 있다. 전시관과 소극장도 숨은 듯 자리해 있다. 한 지역에서 예술인과 기술인이 각자의 일을 한다. 예술(art)과 기술(art)이 본래 같은 의미를 지닌 용어라는 걸 알리는 곳이 ‘문래예술창작촌’이다. 마을은 2000년대 초 ‘공장총량제’로 공실이 된 공장에 예술인들이 저렴한 임대료로 입주하면서 형성되기 시작했다(《술술》, 영등포문화재단, 2020).

“예술인들은 왜 가난한가. 사회적 가치를 생산하는 예술인들은 끝없이 먹고살아야만 하는 ‘밥’의 문제를 이야기한다.” 미디어 작가로 활동 중인 박지원 대표가 밝힌 <예술밥> 기획의 출발점이다. 10여 년을 문래동에서 살아온 박지원 대표는 “기술과 예술은 술(術)의 형제”라며 예술과 노동이 대별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기술도, 예술도 결과물을 만들어내려면 ‘노동’을 수반한다는 이유에서다.

박지원 대표는 작업을 이어가는 원리에서도 예술과 노동은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돈이 오면 밥을 사서 먹고 또 작업하고. 예술의 재생산 과정은 노동의 그것과 똑같은 거다. 밥을 먹어야 자꾸 뭔가를 할 수 있는데 예술 활동은 밥이 안 되고 있다”고 말하는 박지원 대표는 전시를 통해서 예술인의 존재적 가치에 질문을 던지고자 했다.

“예술인은 늘 좀 더 나은 생활, 생각들, 세상을 만들어나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존재다. 공적 가치에 기여하는 바가 큰데, 국공립 미술관 전시에 초대를 받아도 예술노동은 합당한 대우를 못 받는다. 그것이 너무나 당연해져서 예술노동이 정당한 대가를 못 받는, 이런 상태에 문제를 제기하는 게 이번 전시의 목적이었다.”

<증명된 시간>, 추유선 Choo Yoosun
“나의 모든 예술노동 시간은 행정기관이 정한 시간만이 증명된 시간이었다. 그 외의 시간은 소외된 시간이었다.” 밤을 새워 작업해도 행정기관이 인정하는 노동시간은 하루 네 시간. <예술밥> 전시에 참여한 추유선 작가는 작품을 통해서 자본주의적 관점으론 증명할 수 없는 예술인의 노동시간에 대해 얘기했다. 노동 시간을 증명하기 위한 서류뭉치 위에 책상을 올렸다. 책상에는 증명할 수 없는 노동 시간을 증명하기 위한 도구들이 널브러져 있다. ⓒ 대안예술공간이포

60년대 공장에서나 부정할 말, “예술은 노동이다”
사회안전망 밖으로 밀려난 예술인들의 권리 선언

‘예술은 노동’이란 주장은 예술계 전반에서 나오고 있다. ‘예술인들은 왜 가난한가’란 질문이 이른바 ‘돈 안 되는 예술’에만 통용되는 건 아니다. 영화, 방송, 출판계 등에서도 ‘예술=가난’이란 통념에 대한 의문은 늘 존재해왔다. 통념에 대한 사회적 반발은 연이은 예술인들의 죽음으로 터져 나왔다. 바로 2010년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이진원)과 2011년 최고은 작가 사망 사건이다.

인디음악계에서 유명세를 타고 있던 달빛요정은 SNS 음원 판매에 대한 적절한 보상을 받지 못했다. 최고은 작가는 유서에 ‘밀린 돈을 받지 못했다’고 썼다. 두 사람은 오직 창작활동에 충실했던 예술인이었다. 그리고 생전 생활고에 시달렸다. 특히 최고은 작가는 어떠한 사회적인 보호도 받지 못했다. 예술인 고용보험이 적용되기 이전 당시 예술인은 어떤 사회보험도 적용 받을 수 없는 존재였다. 가난이 직접적인 사인은 아니었으나, 고인이 생활고에 시달렸던 사실이 알려지며 예술인 복지 필요성에 대한 전국민적인 공감대가 형성됐다. 두 사람의 안타까운 죽음은 예술인 복지법이 만들어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2003년 발매된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이진원)의 데뷔앨범 ‘Infield Fly’
2003년 발매된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이진원)의 데뷔앨범 ‘Infield Fly’

예술인 당사자도 자신들의 열악한 처우를 돌아보게 됐다. 예술 활동에 매진해도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삶. 힘든 상황에도 사회적 보호를 받지 못하는 존재. 문화·예술인들은 2011년 12월 ‘밥 먹고 예술합시다’란 주제로 집담회를 열어 공감대를 형성했다. 예술인이 창작활동을 지속하는 한 최소한의 생활이 가능한 환경이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같은 해 ‘예술은 노동’이라 주창하는 예술인소셜유니온이 출범했고, 이어 2017년에는 예술인 노동조합의 연대체 문화예술노동연대가 출범했다.

예술인들이 자신들에게 낯선 노동을 전면에 내세운 이유는 사회안전망 밖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2017년 ‘문화예술인 노동자선언’을 발표한 문화예술노동연대의 안명희 대표는 “예술을 노동이라고 얘기하는 건 문화예술인들이 모든 법·제도 밖에 존재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하기 위한 선언적 의미도 담겨 있다”고 말했다.

공연, 무용, 음악, 출판, 방송, 디지털콘텐츠, 영화 등의 분야에는 ‘근로자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노동자들이 상당수 존재한다. 예술인은 프로젝트별로 일을 한다. 프리랜서가 많고 서면계약서를 작성하는 경우도 드물다. 2018년 예술인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른 프리랜서 비율은 76%에 달하며, 서면계약서 체결률은 37.3%에 불과하다. 이는 일자리를 잃을 위험과 저임금에 시달릴 확률이 높다는 것을 뜻한다.

예술인은 실업의 위험이 높은 직업군에 속하는 만큼 고용보험 가입을 통한 실업급여(구직급여) 수급이 가장 필요한 노동자다. 하지만 한국의 사회안전망이 ‘법적 근로자성’을 인정받는 노동자를 중심으로 설계된 탓에 부분적이고 차별적인 보호를 받아왔다. 정철 한국예술인복지재단 운영본부장은 “예술인들에게 예술은 엄연한 생업이고 노동”이라며 “(단지) 예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기본적인 사회안전망에서 벗어나 있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예술은 노동’이란 선언은 향유자를 향한 것이기도 하다. 김상철 예술인소셜유니온 운영위원은 “많은 경우 예술에 대해 ‘보고 괜찮으면 돈 낼게’라는 식으로 접근한다”며 “창작 활동이 우수하든, 우수하지 않든 기본적으로 사람의 노동이 들어갔으면 적절한 보상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국가가 인정하지 않는 예술인 노동자성,
‘예술인권리보장법’도 온전한 노동권은 보장 안 해

지난해 12월 10일부터 예술인 고용보험법이 시행됐지만 예술인은 특례로, 다시 말해 특별한 경우로 법을 적용받을 뿐 여전히 제도의 밖에 존재한다. 여전히 ‘법적 근로자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이를 보완하고자 발의된 것이 ‘예술인의 지위 및 권리보장에 관한 법률안(예술인권리보장법, 김영주 더불어민주당 의원 대표 발의)’이다. 예술인권리보장법은 ‘예술표현의 자유’와 ‘예술인의 직업적 권리 보호’를 법률로 정해 예술인에 대한 권리침해를 방지할 목적으로 발의됐다. 법률안에는 “예술인은 노동과 복지에 있어 다른 종류의 직업과 동등한 지위를 보장받는다”고 명시돼 있다.

예술인들은 법안이 통과되면 노동자의 권리를 폭넓게 보장받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20대 국회가 종료되면서 자동폐기 된 후 21대 국회에서 다시 발의된 예술인권리보장법은 많은 부분이 수정돼 현재는 당사자들의 비판을 받고 있다. 당초 예술계의 요구사항이 상당 부분 빠진 것이다. 특히 예술인 노동조합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드러냈는데, 예술인이 노동조합을 결성해 집단적인 목소리를 내고 권리를 행사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근로기준법상 근로자 지위에 저촉된다는 이유에서였지만, 예술인을 노동자로 인정하라는 예술계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은 또 하나의 사례가 됐다.

예술인권리보장법에 대한 평가는 같은 문화예술노동계 안에서도 엇갈린다. 김상철 운영위원은 “여러 쟁점이 많지만, 예술인의 지위를 보장하는 의미는 있을 것”이라며 “예술이 하나의 독립적인 직업으로서 사회적으로 인정된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반면, 안명희 대표는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인 법안은 단체를 결성하고 교섭까지만 인정한다는 문제가 있다”며 “예술인권리보장법이 통과돼도 노동권이 크게 보장되리라 기대하긴 어렵다”고 주장했다. 이어서 안명희 대표는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는 노동을 60~70년대 공장으로만 한정 짓고 있다”며 “이제는 ‘예술이 노동이다, 아니다’란 논란보다는 예술인들이 예술 활동을 할 때 권리를 보장받으려면 무엇이 필요한지를 질문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