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에 매진하는 삶 바라는 예술인
창작에 매진하는 삶 바라는 예술인
  • 백승윤 기자
  • 승인 2021.03.12 00:10
  • 수정 2021.03.12 13: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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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로계약서 쓰지 않는 관행에 빈곤해진 예술인
현장 변화 위한 과제는 예술인 조직화

커버스토리 ② ‘예술은 고귀하다’는 인식에 힘겨워진 예술

예술 = 노동

많은 예술인이 ‘투잡’을 뛰며 예술 활동을 이어간다. 생활고에 시달리다 창작을 포기하는 예술인도 적지 않다. 단지 개인의 재능이 부족해서일까? 예술계에선 부당계약이 만연하다. 교육이란 명목으로 공공연히 착취가 일어난다. 여기 예술은 노동이라 외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창작을 위한 노동의 가치가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을 지적한다. 그리고 예술인이 창작에 몰두할 수 있는 삶을 요구한다.

김윤규 안무가, '비극-댄스시어터틱2019' ⓒ 김정엽
김윤규 안무가, '비극-댄스시어터틱2019' ⓒ 김정엽

 

사회에서 직업 예술가로 활동하면서부터는 너무 적은 수입에 더 큰 분노가 생겼다. 이 일을 하면서 자주 들었던 말은 “네가 좋아서 하는 일에 왜 자꾸 돈 얘기를 하느냐”였다. 내가 지금까지 해 왔고 앞으로도 할 일들은 돈을 벌어 먹고살게 하는 내 ‘직업’이라는 것을 사람들은 잘 모른다.

- 이랑, 《좋아서 하는 일에도 돈은 필요합니다》, 창비

 

‘예술은 고귀하다’는 인식에
값싸진 예술노동

예술을 노동으로 보지 않는 인식이 단지 예술계 밖에서 이식된 건 아니다. 예술을 ‘노동과 구별되는 그 이상의 어떤 고귀한 것’으로 보는 인식이 예술계에 팽배하다. 예술인소셜유니온과 문화예술노동연대의 ‘예술은 노동’이라는 선언은 예술계 내부에선 ‘급진적’인 발언으로 여겨졌다. 예술계에서의 거부감이 만만치 않았다.

안명희 문화예술노동연대 대표는 “과연 예술이 노동인지 묻는다면 노동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고 이야기한다. 저마다 예술은 단지 놀이이거나, 자기만족으로만 기능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안명희 대표는 ‘예술은 노동이 아니다’라는 말이 지금 현실에는 부합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다양한 고용형태 속에서 노동관계법을 적용받고 있는 예술인이 있다. 이미 예술이 노동으로 존재하는데 ‘예술은 노동이 아니다’라는 말은 예술인이 사회안전망 안으로 들어가는 것뿐 아니라 예술이 하나의 직업으로 정착하는 것을 가로막는다.”

예술을 노동으로 보아야 적절한 보상도 가능하다는 목소리도 있다. ‘예술가 정신’을 창작의 전부처럼 여기는 풍토 탓에 적절한 보상의 기준에 대한 논의가 금기시된다는 것이다. 박성혜 무용인희망연대 오롯 공동위원은 “많은 예술인이 고상하고 값을 매길 수 없는 창작 작업을 가격으로 산정하는 건 불가능하고, 하면 안 되는 거라고 얘기한다”며 “가난의 당사자마저 이에 동조하는 건 일종의 이데올로기이며 절대다수를 대표하는 입장일 수 없다”고 비판했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경험’이니
계약서는 “묻지 마”

예술계 안팎에선 ‘올바른 계약서’ 작성이 적절한 보상의 해법으로 제시되고 있다. 제멋대로 보상에 관한 기준을 세울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예술 활동 관련 계약 체결은 42.1%에 불과하다. 그마저도 서면계약은 37.3%에 그치고 4.8%는 구두계약이다.(2018년 예술인 실태조사) 예술계 종사자 10명 중 약 6명이 계약서 없이 일하는 셈이다. 계약서가 없으니 불합리한 수익 배분, 노동 시간 등에 대해 다투기 어렵고 작업 중 발생하는 사고에 대한 사용자의 책임을 묻기도 힘들다. 서면계약서 작성이 필요한 이유다. 실제 영화 현장에선 표준근로계약서가 안착한 이후에 영화 스태프의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시간 문제가 상당 부분 해소됐다. 이러한 배경에는 근로기준법 적용을 목표로 세워 제작 현장마다 표준근로계약서 작성을 요구한 전국영화산업노동조합이 있었다.

정부는 계약서 정착을 위해서 ‘예술인 복지법’ 개정으로 2020년 6월 이후 서면계약을 체결하지 않거나 필수 기재사항이 빠진 서면계약을 신고하도록 했다. 그러나 게임 개발자, 방송작가, 음악인, 웹툰작가, 공연인 등 예술인은 여전히 계약서 작성의 어려움을 호소한다.

가령 인맥에 기대 ‘일감’을 얻게 되는 분야라면 부조리한 계약 관행을 고발하기 힘들다. 공연계나 저예산 영화·드라마 제작에서 빈번하게 발생하는 일이다. 특히 공연계에선 계약상 갑과 을이 선배와 후배, 혹은 선생과 제자로 엮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러한 관계로 인해서 공연을 위한 노동시간이 배움을 위한 교육 활동으로 둔갑하기도 한다. 공공기금을 받지 않는 행사라면 불공정한 계약서를 작성하거나 구두계약이 이뤄진다. 박성혜 공동위원은 “무대에 올라가는 것만도 감사하게 여겨야 한다는 관행으로 합당한 임금을 받지 못하는 건 물론이고, 무대 위에 올라가기 위해 필요한 의상을 경우에 따라 자비로 구입한다. 또 무용수가 직접 티켓을 팔아서 공연을 기획한 안무가에게 수익금을 주는 경우도 있다”고 지적했다.

출판계에도 근로계약서와 외주계약서를 작성하지 않는 관행이 뿌리 깊게 자리한다. 안명희 대표는 “종사자 대부분이 40세를 넘어서면 회사를 떠나게 되는데 자신이 일하던 회사의 외주를 맡고 있다”며 “정직원과도 부실한 계약을 맺은 출판사에게 외주 노동자와 제대로 된 계약서를 쓰기를 기대하긴 어렵다”고 지적했다.

 

송주원 안무가, '풍정.각(風情.刻) 푸른 고개가 있는 동네' ⓒ 이운식
송주원 안무가, '풍정.각(風情.刻) 푸른 고개가 있는 동네' ⓒ 이운식

‘순수예술’은 국가 지원 강화할 필요도

‘예술은 노동이 아니다’라는 인식은 이른바 ‘순수예술’ 분야에서 더 깊게 자리한다. 유·무형의 창작물은 돈이 아닌 자아실현, 세태풍자, 체제비판 등을 목적으로 만들어진다. 영리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 순수예술 분야의 특성상, 단순 취미나 유흥으로 보는 사회적 시선은 물론이고 예술인 당사자도 권리보장이나 처우개선을 요구하는 경우가 드물다. 이에 따라 정부 지원도 구제 위주의 시혜적이고 단기적이라는 평가가 많다.

이에 대해 예술을 노동으로 보는 측에선 순수예술 활동의 사회적 가치를 고려해 지원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한다. 박성혜 공동위원은 “오히려 순수하고 기본적인 분야이기 때문에 더욱 재정 지원이 필요하다”며 “교육처럼 사회적 토양을 만든다는 측면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본적으로 이윤이 발생하지 않는 순수예술을 자본의 논리로 본다면 지원의 명분이 약화된다. 공공기금의 인풋과 아웃풋이 분명해야하는데, 순수예술은 선명하고도 분명한 결과가 빨리 도출될 수 있는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장기간의 기다림이 요구되는 공공재와 같은 영역이다.”

김상철 예술인소셜유니온 운영위원은 예술인들이 자본 축적을 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는 게 지원의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지금 공공예산이 들어가는 공모사업 특징은 최소한을 보장하는 방식이라 20년 경력에도 공모 지원 사업에만 매달리는 이상한 산업구조가 형성됐다”면서 “공공시장 규모를 늘려 예술인이 민간시장으로 진입하도록 도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예술=노동’이 만든 변화

여러 비판과 난제가 있었지만, ‘예술은 노동’이란 인식 아래 예술인을 위한 방안들이 마련됐다. 예술인 고용보험법 제정에 초석을 마련했고, 일부 산업에선 표준근로계약서가 정착됐다. 한국예술인복지재단에 따르면 예술인 계약체결률은 2015년 30%에서 2018년 42%로 상승했다. 철학적, 미학적 이견은 차치하더라도 예술인의 삶 자체는 점차 개선되는 중이라고 볼 수 있다.

이에 대해 안명희 대표는 “예술을 노동이라고 얘기하는 순간 인식이 바뀌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달리 말하면 예술을 노동으로 여기는 인식이 확대돼야 지속적인 변화를 기대할 수 있다. 문화예술노동연대가 사회안전망 등 법·제도의 큰 틀에서 변화를 요구하고 있지만, 노동시간 인정 범위, 적정임금 등에 정부가 개입하는 건 한계가 있다. 직군별로 현장에 맞는 기준을 정하려면 노동자와 사용자가 논의를 이어가야 한다. 분야별, 단위 사업장별 과제를 풀어가려면 현장에서 연대를 통해서 힘을 키워야 하지만 쉬운 일은 아니다. 예술인 대부분이 프리랜서, 계약직이기 때문에 법·제도적 한계에 직면한다. 노동자들이 프로젝트별로 단기간만 모이는 점도 걸림돌이다. 작년 1월에 열린 ‘문화예술인들은 왜 노조를 결성했나?’ 포럼에 참가한 예술인 노동조합의 공통적인 고민도 조직화였다.

교섭 상대인 사용자를 대외적으로 명확히 정하는 일도 과제다. 프리랜서, 비정규직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사용자가 교섭대상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여지가 크다. 이러한 이유로 문화예술노동연대의 8개 노동조합 중 교섭을 하는 단체는 전국영화산업노동조합, 전국예술강사노동조합, 한국방송연기자노동조합 등 3곳에 불과하다.

또 예술인은 사용자가 다양하다는 특성도 지닌다. 공모 사업이 활발한 국내에선 문화예술인의 사용자가 지자체, 지역문화재단, 국가기관 등 공공기관인 경우가 많다. 김상철 운영위원은 정부나 공공기관이 사용자라는 걸 받아들이지 못해 힘들었다며 ‘예술인 복지법’ 시행 초기를 회상했다. 이에 문화예술노동연대는 사용자성을 부정하지 않도록 지속해서 사용자를 지목하는 활동의 중요성을 강조한 바 있다.

많은 난제에도 안명희 대표는 한 발 내디딜 자리는 있다고 진단했다. “현재 21대 국회에 계류 중인 ‘예술인권리보장법’에 구멍이 많지만 예술인의 조합 결성을 보장하는 건 큰 의미다. 예술인들이 조합을 조직해서 자기 권리를 드러내는 경험을 쌓을 계기로 삼을 수 있다. 

 

2017년 9월 19일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문화예술인 노동자선언’ 기자회견 ⓒ 문화예술노동연대
2017년 9월 19일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문화예술인 노동자선언’ 기자회견 ⓒ 문화예술노동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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