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⑤] 건강경영을 요구하며 노동자들이 말할 수 있는 것들
[커버스토리⑤] 건강경영을 요구하며 노동자들이 말할 수 있는 것들
  • 손광모 기자
  • 승인 2021.08.06 00:25
  • 수정 2021.08.05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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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시간 단축·노동환경 개선·노동자경영참여, 건강경영으로 ‘물꼬’
‘안전하고 건강한 일터’ 건강경영이 교두보 될 수 있어

건강경영, 화두가 된다

“이번 코로나 사태는 직원의 건강이 무엇보다 중요한 전략적 자산이라는 점을 일깨워준다. 국민과 노동자를 질병으로부터 보호하고 건강을 최우선으로 하는 ‘건강경영’이 경쟁력의 핵심이라는 것을 시사해준다.”
작년 10월 한국노총에서 주최한 ‘자동차산업의 구조변화와 정책과제’ 토론회에서 이문호 워크인조직혁신연구소 소장은 “아이러니하게도 코로나 위기가 노동자 보호를 위한 건강경영이 발전될 수 있는 기회를 높여주고 있다”면서, “노조는 이 기회를 살리기 위해 사회적 대화를 소집, 주도해 나가야 한다”고 지적했다. 아직까지 우리에게 건강경영은 낯선 개념이다. 그러나 건강경영의 중요성을 고려해볼 때 앞으로 화두로 만들어나가야 할 의제일지도 모른다.

 커버스토리⑤ 건강경영의 확장

기업은 노동자의 노동력을 기업의 이익 실현에 사용한다. 노동자는 노동력을 기업에 제공하고 그에 해당하는 임금으로 생활을 영위한다. 군더더기 없는 계약관계처럼 보인다.

하지만 여기서 노동자의 건강이라는 변수를 고려하면 관계는 사뭇 달라진다. 얼마나 일하고, 어떻게 일하며, 얼마나 받는지에 따라 노동자의 건강은 달라진다. 박봉을 받으면서 장시간 고강도 노동을 하다보면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이러한 사태는 기업의 이익 실현에도 방해요소로 작용한다. ‘최소한의 안전장치’인 노동법이 만들어진 배경이다.

다만 노동법은 노동자의 건강을 적극적인 방식으로 보장하지 않는다. 노동법을 준수하라는 말은 기업에게 ‘최소한 이 정도’로는 노동자의 건강을 챙기라고 말하는 격이다. 사용자에게 금지해야 할 것(노동시간 등)과 의무적으로 챙겨야 할 것(안전수칙 등)을 정하여 노동자의 건강을 확보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기업은 이를 ‘규제’로 받아들여 최소한의 노동법조차 최대한 회피하려고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쩌면 ‘법을 준수하라’는 주장보다 ‘노동자의 건강을 보장하라’는 주장에 더 많은 요구를 담을 수 있다. 건강경영이라는 의제를 노동계에서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일하는 시간과 건강경영

노동시간 단축은 노동자의 건강을 위한 확실한 조치다. 윤영호 서울대 의과대학 교수는 “근로시간이 길수록 육체적인 건강 문제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건강 문제도 발생한다”고 말한다. 장시간 노동은 노동자의 건강에 악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일하는 시간을 줄이는 것은 노동자 건강 증진을 위한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노사 모두 노동시간 단축을 강하게 주장하기 어렵다. 노동자의 입장에서 노동시간 단축에 따른 ‘임금 손실이 없어야 한다’는 단서조항이 붙는다. 기업 입장에서는 ‘생산성 보전’이 전제돼야 한다. 노동자가 단위시간당 생산할 수 있는 양이 정해져 있는 조건에서는 노동시간을 줄이면 생산량이 줄어든다. 이 때문에 노동시간 단축 논의에서 임금 보전과 생산성 만회가 쟁점으로 부각된다.

생산성 만회 없이 노동시간을 단축하려면 고용의 크기가 늘어나야 한다. 이 경우 임금 삭감 요구가 더욱 거세진다. 반대로 생산성 만회에 성공하면 임금 손실이 발생하지 않지만 노동 강도가 높아질 수 있다. 자동차업계에 야간노동을 철폐하기 위해 주간연속2교대제를 도입했을 때도 줄어드는 노동시간(잔업·특근)에 따른 생산 감소를 만회하기 위해 노동 강도를 일정정도 올렸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또다시 발생한다. 노동자의 건강을 위해서 노동시간을 단축했는데, 노동 강도가 올라간다면 되레 노동자 건강을 더 저해하는 결과가 아닐까. 노동시간 단축의 과정에서 건강경영은 주요한 보완책으로 사용될 수 있다.

윤영호 교수는 “시간으로서 노동 강도도 중요하지만 노동밀도를 고려해야 한다. 근로시간이 줄어들면 업무강도가 올라간다”며 “근로시간 이후를 개인에게 맡기는 게 아니라 노동자들이 건강하게 보낼 수 있도록 기업에서 투자해줘야 한다”고 지적했다.

자동차업계에서 주간연속2교대제를 시행한 이후 노동 강도 상승에 대한 복지의 일환으로 임금의 성격을 띠는 복지포인트를 지급하고 있다. 하지만 복지포인트의 실제 사용률이 미미해 사용처 확대와 사용기한 연장을 요구하고 있는 실정이다. 건강경영에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임금 성격을 띠는 복리후생제도가 아닌 노동자가 건강을 돌볼 수 있는 시설 및 영양, 건강프로그램 확충을 고려해볼 수 있다.

일하는 공간과 건강경영

안전보호구 같이 일을 하면서 기본적으로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물품을 구비하는 것은 법으로 정해진 사용자의 의무조치다. 하지만 안전을 넘어서 건강하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은 법의 영역을 넘어선다.

금속노조 기아차지부의 요구로 시작된 기아의 웨어러블 로봇 도입 시범사업은 효과적으로 노동환경을 개선한 사례다. 보통 설비는 그 속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건강을 고려하지 않고 설계돼 있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자동차 조립라인을 설계할 때 노동자의 작업 자세를 고려하지 않아 노동자는 부자연스러운 자세로 작업하게 되고 근골격계 질환의 위험이 높아진다. 그런 설비를 노동자 친화적으로 개조하려면 상당한 비용이 들어간다.

기아는 노동자의 건강에 초점 맞춰 입는 로봇 형태로 작업 보조 수단을 도입하기로 했다. 웨어러블 로봇은 반복적으로 고개를 위로 올려야 하는 공정이나 팔과 다리에 부하가 많이 걸리는 ‘깊이 공정’에 일하는 노동자들의 근골격계 질환을 완화해준다. 노동자 건강에 초점을 맞춰 노사 모두 해결하기 부담스러운 문제의 해결책을 찾은 것이다. 다만 이 같은 조치가 법적 의무인 것은 아니다.

사무직 노동자의 경우 코로나19 이후 일하는 공간의 개념이 기존과 달라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재택근무의 전면화로 ‘일하는 시간 = 사업장에 머무르는 시간’이라는 등식이 허물어지는 것이다. SKT는 평상시 재택근무를 하다가 회의가 필요한 때면 거점별로 구축된 스마트오피스를 이용하는 식으로 근무환경을 개편했다. ‘메타버스’를 이용한 가상공간에서 일을 하는 경우도 심심찮게 눈에 띤다. 메타버스란 가상·초월을 의미하는 메타(Meta)와 공간, 세계를 뜻하는 유니버스(Universe)의 합성어로 가상세계, 가상공간으로 번역할 수 있다. 부동산 중개 플랫폼인 직방은 오프라인 사무실을 없애고 자사의 메타버스인 ‘메타폴리스’로 출근하여 업무를 수행한다.

이러한 변화는 기업에게 코로나19 확산을 예방하고 시설비용을 절약하는 이점으로 다가오지만, 노동자의 건강에는 적신호가 켜지고 있다. 한국건강증진개발원이 2020년 10월 발표한 조사를 보면, 성인 1,031명 중 40.7%가 ‘코로나블루’를 경험했다. 코로나19 이후 체중이 증가했다는 응답도 12.5%에 달했다. 또한 한국여성노동자회가 2020년 9월 발표한 ‘코로나19가 여성의 임금노동과 가족 내 돌봄노동에 미친 영향’ 조사에서는 응답자 318명 중 56.3%가 ‘코로나19로 돌봄노동이 증가했다’고 답했다.

코로나19로 일하는 장소라는 개념이 흔들리면서 노동조합이 노동자의 건강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 둔 수단도 무용지물이 되고 있다. 익명의 IT업계 노동조합 간부는 “코로나19 시대 재택근무가 활성화되면서 PC오프제도 같이 기존에 노동조합이 만들어 둔 노동자 보호 조치가 무력화되고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이렇듯 코로나19 상황에서 노동자의 건강은 신체적, 정신적으로 악화되고 있지만, 기존의 보호수단은 통용되지 않는다. 오로지 스스로 건강을 챙겨야 하는 상황에 놓이고 있다. 기업의 입장에서도 코로나19로 인한 노동자 건강 악화는 장기적으로 생산성에 악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높다. 노사가 ‘코로나19 시대 건강경영’에 대해 함께 논의할 여지가 생긴 것이다.

노동자 경영참여와 건강경영

건강경영은 노동자 경영참여의 한 가지 수단으로 고려해볼 수 있다. 노동자 경영참여에 대한 기업의 반감은 높은 편이다. 하지만 노동자의 참여는 건강경영의 성패를 가를 수 있는 요소다. 앞서 지적했듯이 기업의 구조와 고용형태 등에 따라 노동자의 건강이 좌우된다. 기존에는 ‘경영권’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논의의 대상이 아니었던 의제들도 건강경영이라는 화두에서는 논의해볼 수 있는 여지가 있다.

현재 노동자 경영참여의 일환으로 서울시, 광주시, 경기도 등 지자체 공공기관을 중심으로 노동이사제, 노조추천이사제 등이 시행되고 있다. 여기서 노동이사의 구체적인 역할을 두고 고민이 깊다. 노동이사는 대부분 감시와 견제의 기능에 초점이 맞춰진 역할을 수행하고, 비상임이사로서 본래 업무와 노동이사의 업무를 병행하고 있다. 그런데 노동이사의 업무와 원래 맡고 있던 업무가 상충하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한다. 가령 사용자의 입장을 반영할 수밖에 없는 총무실에서 일하는 노동자가 노동이사가 된다면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을 것이다.

박귀천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2020년 3월 ‘노동이사제 조례의 쟁점과 개선방향’에서 “노동이사들은 지금처럼 비상임이사로 하면서 현업을 수행하도록 하면 현업이 이사로서의 업무와 충돌되는 측면이 많기 때문에 노동이사로서의 업무를 제대로 수행하기 어렵다는 점을 토로하면서 노동이사를 상임이사로 바꾸거나, 아니면 노동이사가 담당하기에 적합한 직무를 따로 개발해야 한다는 점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노동이사가 상임이사로서 이사의 업무만 수행한다면 사용자로 분류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따라서 노동이사의 적절한 직무 개발이 대안으로 꼽히고 있다. 서울시가 2020년 2월 발표한 ‘노동이사제 2.0’에서는 “인권·윤리경영, 직장 내 괴롭힘, 성평등과 같이 노동이사의 역할과 정합성이 있는 직무에 현직 노동자이사를 보임할 수 있도록 근거를 마련한다”고 했다.

인권·윤리경영, 직장 내 괴롭힘, 성평등 등은 모두 건강경영에서 포괄할 수 있는 의제다. 노동이사의 직무를 건강경영으로 확장하는 방안을 고려해볼 수 있다.

규제 중심의 안전문제,
인센티브 중심의 건강으로 보완돼야

2020년 1월 전부 개정된 산업안전보건법과 이듬해 통과된 중대재해처벌법은 안전의 사각지대에 놓인 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취지를 담고 있다. 개정 산안법은 특수형태근로종사자, 배달노동자 등 플랫폼 노동자까지 보호의 범위를 확대했고, 하청업체 노동자의 안전에 대한 책임을 원청업체까지 부여했다.

또한 중대재해에 대한 사용자의 처벌을 강화한 중대재해처벌법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입법 과정에서 5인 미만 사업장 제외, 50인 미만 사업장의 적용 3년 유예, 낮은 처벌 수준, 사용자의 면책 여지 부여 등으로 노동계에서는 ‘반쪽짜리 법안’이라는 평가가 대다수다. 반면, 경영계에서는 ‘과도한 처벌’을 이유로 비판하고 있다.

같은 사안을 두고 노사가 대립된 반응을 보이는 배경에 안전 문제는 규제 중심적으로 다룰 수밖에 없다는 사정이 놓여있다. 중대재해 한 번으로 노동자와 그 가족의 삶은 송두리째 흔들린다. 사람의 목숨과 직결된 문제이기 때문에 경영계가 선호하는 ‘인센티브 방식’으로 안전 문제에 접근하는 것은 노동계로서는 안전 문제를 중요하게 보지 않는다는 메시지나 다름없다. 노사가 안전 문제 해결을 바라보는 관점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충돌이 쉽게 일어난다.

반면, 노동자의 건강 문제는 인센티브 방식의 접근이 비교적 용이하다. 정부의 입장에서 노동자 건강 증진은 헌법적 가치를 실현하는 일일 뿐만 아니라 건강보험 지출 절감의 효과도 가져올 수 있다. 기업이 건강경영에 투자하는 비용만큼 세액공제를 하는 방식의 정책 마련에도 노사정의 이견이 치열하지 않다. 노사정 모두가 원하는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는 가능성이 큰 것이다.

안전하게 일할 수 있는 환경과 건강하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는 일은 노동조합이나 기업, 정부 어느 한 주체만 수행해야 하는 과제가 아니다. 안전과 건강은 분리될 수 없는 가치지만 그 목표를 향해 접근하는 방식은 다변화될 필요성이 있다. 건강경영을 주장하는 것은 안전하고 건강한 일터로 가는 마중물이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