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학연대에서 노동언론까지, 故이태복 동지를 기억하다
노학연대에서 노동언론까지, 故이태복 동지를 기억하다
  • 강한님 기자, 박완순 기자
  • 승인 2021.12.05 11:31
  • 수정 2021.12.05 17: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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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이태복 전 주간노동자신문·노동일보 발행인 민주사회장
“노학연대 정신 다시 피어나도록 할 것”···빈소 지킨 사람들
故이태복 전 주간노동자신문·노동일보 발행인이자 전 보건복지부장관의 빈소 ⓒ 참여와혁신 정다솜 기자 dsjeong@laborplus.co.kr

故이태복 전 주간노동자신문·노동일보 발행인이자 전 보건복지부장관이 3일 영면했다. 고인은 1977년 출판사 광민사를 설립했고 1989년 주간노동자신문 창간, 1999년에는 노동일보를 창간하는 등 “현장에서 답을 찾는” 삶을 살았다.

장례는 민주사회장으로 치러진다. 노동조합, 시민사회단체, 입법·행정부 고위 공무원, 유족 측 인사 등이 장례위원으로 참여해 고인의 마지막을 배웅한다. 빈소는 서울 고려대학교구로병원 장례식장 201호실에 마련됐다. 발인은 7일로 오전 5시로, 영결식 후 광주 국립5.18민주묘지에 안치된다. 4일 빈소를 지킨 사람들이 기억하는 故이태복 전 주간노동자신문·노동일보 발행인의 모습을 기사에 담았다.

조정래 소설가(이태복 민주사회장 장례위원회 고문)
“1980년대를 살아오면서 운동권에서 몸을 바친 분들은 나하고 친하죠. 주간노동자신문을 만들 때부터 서로 의논하고 지원하는 사이였습니다. 제가 ‘천 년의 질문’을 쓸 때 뒷부분에 그 양반이 했던 5대 개혁을 취재해서 써보려 했는데, 도저히 쓰기가 힘들었어요. 그래서 직접 글을 쓰게 해서 기자가 인터뷰 하는 식으로 해서 이태복 씨의 실명을 등장시켰습니다. 이태복 전 장관이라고 해서. 사람들이 그걸 읽어보고 굉장히 감동했는데, 우리 시대 가장 필요한 인물, 가장 진실한 개혁적 인물이 너무나 빨리 돌아가셔서 사회적 국가적 손실이죠.”

“독재 투쟁할 때 많은 사람들이 고문을 당하면서 비겁해지는 대목들이 있는데, 이태복 씨하고 최열 환경재단 이사장하고 유명한 사람이잖아요. 고문에 굴하지 않는 강한 심성을 가진 이로, 가장 가슴 아픈 게 고문 후유증입니다. 우리 역사가 공동으로 책임져야 할 사회적 죄를 지고 있는 거죠. 고인에게 정말 고맙고 미안하고. 앞으로 20년쯤 더 살아야 할 분인데 정말 가슴 아픕니다.”

장영달 우석대 명예총장(이태복 민주사회장 장례위원회 공동장례위원장)
“이태복 전 장관은 제 대학교 2년 후배예요. 노동운동에 방점을 뒀던 민주운동가입니다. 대학교 동문이니까 알고 지낸 지는 오래인데, 함께 일해 본 건 적어요. 그 사람이 감옥 가면 제가 나와 있고, 제가 나와 있으면 그 사람이 가 있고 해서죠. 이태복 동지는 학림 사건으로 구속이 됐죠. 전두환의 전자만 말해도 구속되는 엄혹한 시절에 목숨 걸고 전두환 체제를 거부하고 나섰던 선봉 투사입니다. 구속이 돼서 수많은 고문을 받았다는 걸 전해들었어요. 저는 감옥에 있다가 81년도에 7년 만에 석방될 때였고, 이태복 동지는 그 때부터 시작해서 7년 반 정도를 감옥에서 살았죠. 국민대의 대표적인 민주화 운동 지도자였죠.”

“주간노동자신문, 노동일보를 창간했잖아요. 그때도 노동자들을 대변할 수 있는 신문이나 언론은 거의 없었어요. 그런데 감옥을 살면서 어떤 구상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렇게 노동자들을 대변하는 언론을 만들어서 노동자들에게 많은 힘을 불어넣는 역할을 선도적으로 한 친구죠.”

“저 대신 자기가 할 일이 많은데 , 선배한테 일을 떠넘겨놓고 떠난 것에 대해서 몹시 가슴 아프고 안타까워요. 아주 정열적으로 활동하고 있던 중에 예기치 못하게 세상을 떠났잖아요. 함께했던 많은 동지들, 이태복에게 직간접적으로 의지하면서 살아왔던 많은 노동자들, 그리고 노동운동 출신들에게 큰 위로와 격려의 말씀을 대신 드리고 싶어요.”

양길승 원진직업병관리재단 이사장(이태복 민주사회장 장례위원회 공동장례위원장)
“이태복과 인연은 굉장히 길어요. 이태복이 노동운동을 한다고 오랫동안 일을 했어요. 광민사에서 책을 내고, 고민하고, 노동자신문을 하면서 일할 때의 태복이를 기억해요. 본인은 변하지 않고 세상만 바꾸려고 하는 사람들 참 많은데, 태복이가 하는 일은 태복이를 변화시켰어요. 이태복은 참 탄탄하구나 생각했죠.”

최열 환경재단 이사장(이태복 민주사회장 장례위원회 공동장례위원장)
“이태복 씨와 인연은 깁니다. 그런데 많이 엇갈렸죠. 제가 감옥에 가면 나와 있고, 이태복 씨가 감옥에 가면 제가 나와 있고. 이태복 씨를 알게 된 건 논산훈련소 가서입니다. 박정희 때 대학에서 군사 교육을 하는데 현역 장교들이 와서 교육했고, 학원 자유를 상당히 위협한다고 해서 격렬하게 반대했습니다. 그러니까 71년 10월 15일 위수령을 발동해 학교로 장갑차를 투입하고 군인을 진주시켰죠. 몇 천 명의 대학생을 잡아가고, 180명이 제적되고, 그 중 100명을 강제 입영시켰는데 논산 훈련소로 보낼 때 용산역에서 만나게 되고 같이 논산 훈련소에 가게 돼 알게 된 겁니다.”

“이태복 씨가 학림사건으로 구속돼서 굉장히 고문을 많이 받고 7년 정도 감옥에 살다가 나왔잖아요. 나오고 난 다음에 몇 번 만났습니다. 그러면서 노상 하는 이야기는 우리는 혁명하고 결혼한 사람들이다. 하루 빨리 정권을 바꿔야 한다. 그러다가 이태복 씨가 결혼을 한대요. 함을 질 사람이 있어야지 않겠습니까. 그 때 함진애비가 5명이었는데, 그 중 한 명이 접니다. 연을 이어가다가 최근에는 코로나19 때문에 만나기 쉽지 않았어요. 아까 71년 10월 15일 위수령 발동돼서 71동지회가 만들어졌고, 올해가 50주년이라 기념 심포지엄을 했어요. 71동지회의 동지들이 50년 간 어떻게 살아왔는지 써서 그걸 가지고 심포지엄을 여는 거죠. 근데 이태복씨가 글을 쓰긴 했는데, 못 왔어요. 그래서 못 보다가. 그렇죠.”

“다른 사람들이 할 수 없는 일을 많이 했다고 생각해요. 이태복 씨는 노동현장에서 노동자의 삶이 얼마나 힘든가를 알고 노동운동을 했고, 언론을 통해서 노동문제를 밝히는 것을 꾸준히 했죠. 김대중 정부 때도 수석을 하고 장관도 하고, 개혁적인 많은 걸 할 수 있었을 텐데 기간이 좀 짧았죠. 그래도 운동을 한 다른 사람들보다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이선근 학림동지회 회장(이태복 민주사회장 장례위원회 집행위원장)
“대학생 때 흥사단 활동을 하면서 만나게 됐습니다. 그러다 광민사에 들어가 편집부 일을 하면서, 그리고 거리에서 함께하면서 인연이 돈독해졌죠. 저는 박정희 피살 후에 이태복 씨에게 공장을 소개받아 현장 활동을 했습니다. 그 와중에 80년 서울역 회군으로 광주에서 홀로 큰 피해를 보게 되죠. 그래서 학생운동 주류를 바꾸지 않으면 학생운동도, 민주화 운동도 불가능하겠다고 생각해 학생 운동 조직화에 들어갔습니다. 전국민주학생연맹을 설립하게 됩니다. 태복이 형한테 학생 조직을 할 테니 어떤 식으로 했으면 좋겠냐 이야기를 했죠. 그 때 노학연대 원칙을 세우게 된 겁니다.”

“한 번 논리적으로 이야기하면 막힘이 없어요. 머리에서 떠오르는 이야기가 아니라 운동이론을 사회이론과 합쳐서 근거가 있는 질서정연한 이야기였죠. 제가 탄복을 했습니다. 노학연대라는 개념을 우리나라에서 처음 만들었고, 외국에서도 이런 정도의 논리를 펼쳐낸 사람은 처음이라고 봅니다.”

“80년 서울역 회군 당시 서울대 지도부가 학생회장단 회의의 이름을 참칭해서 서울역 회군을 시킨 겁니다. 그게 증거가 잡혀 이제 조사단 활동을 하기 시작합니다. 저희가 하는 게 아니고 광주 영령의 이름을 빌어 조사를 조직하기 시작할 겁니다. 그렇게 조사를 하고 그들이 우리나라 운동의 어지러움과 어려움을 불러일으킨 점을 광주 영령들에게 사과하고, 이태복 씨의 노학연대 정신이 다시 피어나도록 할 것이니 편히 영면하시라는 걸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위 왼쪽부터) 조정래 소설가, 장영달 우석대 명예총장, 양길승 원진직업병관리재단 이사장
(가운데 왼쪽부터) 최열 환경재단 이사장, 이선근 학림동지회 회장, 김상집 사단법인 광주전남6월항쟁 이사장
(아래 왼쪽부터) 이덕희 한국분석과학기술원 부사장, 오세제 서강대학교 현대정치연구소 선임연구원, 문승욱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 참여와혁신 정다솜 기자 dsjeong@laborplus.co.kr

김상집 사단법인 광주전남6월항쟁 이사장(이태복 민주사회장 장례위원회 집행위원장)
“이태복 선배는 우리나라에서 노학연대라고 하는 새로운 투쟁방향을 제시하셨어요. 조직된 민중들의 공통된 이슈를 정해서 민중혁명을 지향해야 한다는 거였죠. 거기에 크게 공감을 했어요. 정치 현안에 대해서도 민생을 바탕에 두고 해야 한다고 말해왔어요. 저는 훌륭한 지도자를 잃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덕희 한국분석과학기술원 부사장(이태복 민주사회장 장례위원회 상임집행위원)
“결정적으로 같이 하게 된 건 80년 서울역 회군이 있고나서 저는 전민학련 중앙위원회에 참여하게 됐고, 이태복 장관님은 전민노련을 주도했습니다. 전민학련과 전민노련은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을 서로 연계해 연대활동으로 사회문제를 풀어가자는 것으로 만들어진 겁니다. 당시에는 사실 서로 잘 모르고 진행됐는데, 81년 6월 달에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30~40일 있으면서 고문도 받고 재판도 같이 받았죠. 그런 선배이자 동지라고 이태복 장관을 기억합니다.”

“우리 사회를 심층적으로 제대로 분석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답이 뭐냐를 항상 고민을 하셨죠. 나름대로 그 부분에 대해 명쾌한 논리를 가지고 있었던 분입니다. 저희 같은 후배를 만났을 때 명쾌하게 설명해주셨죠. 운동을 계속하는 게 쉽지 않은데, 처음에 가진 심지를 가지고 돌아가실 때까지 변함 없으셨던 게 마음에 깊이 남습니다.”

오세제 서강대학교 현대정치연구소 선임연구원(이태복 민주사회장 장례위원회 상임집행위원)
“주간노동자신문에 책 광고를 한 적이 있어요. 그때 이태복 선배를 처음 만났어요. 한 달 광고로 계약을 했는데 1년 동안 내 주셨어요. 광고 한 번 할 거 가지고 찾아간 사람을 예뻐해 주시는 선배님을 보면서 저도 굉장히 기뻤죠.”

“87년 노동자 대투쟁을 통해서 노동운동이 활성화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노조 조직률은 아주 미미한 상황이었어요. 그때 이태복 선배가 많은 노동자들, 그리고 노동운동이 더 성장하기를 바랐던 분들에게 많은 기여를 하셨다고 생각해요. 이제 그 많은 걱정들 근심들 다 내려놓으시고 학처럼 구름처럼 바람처럼 편히 쉬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문승욱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너무 갑작스러워 안타깝습니다. 고인이 고등학교 선배님이셨습니다. 생전 풍력발전에 관심을 많이 주셔서 연락하며 상의한 적이 많습니다. 고인이 못 다하신 것을 정부 차원에서 사업으로 진행할 수 있도록 도와야겠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