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③] 여성·성소수자 있는 단협 체결은 노동조합의 숙명
[커버스토리③] 여성·성소수자 있는 단협 체결은 노동조합의 숙명
  • 강한님 기자
  • 승인 2022.09.12 00:03
  • 수정 2022.09.14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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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던 차별 없애기’부터 성평등 세상으로 한 발 내딛기까지
평등 넣은 모범 단협안 만들지만···“아직도 어려워”

‘이런’ 단체협약

‘노동조합의 A-Z’라고 불리는 단체협약. 단체협약에 담을 수 있는 주제는 무궁무진하다. 대체로 조합원과 사업장을 위한 내용이 담기지만, 몇몇 조항은 사업장을 넘어 우리 사회 전반에 영향을 끼친다. <참여와혁신>은 건강, 녹색, 젠더, 연대에 관한 단체협약을 체결하거나 준비 중인 노동조합을 만났다.

커버스토리③ 삭제된 다양성, 단협으로 호명한 노동조합들

일터는 사회의 축소판이다. 가부장제, 고정된 성역할,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 혐오가 여러 사업장에 만연하다. 이 속에서 어떤 노동자들은 지워지고, 덜한 처우를 가지고, 피해를 입었다. 평등하지 않은 일터에서 일해야만 하는 여성·성소수자들도 그렇다.

노동조합은 삭제된 권리를 되찾을 수단으로 가장 강력한 약속인 단체협약을 활용했다. 물론 여성·성소수자가 담긴 단체협약 체결은 어려운 일이었다. 회사와 임금과 노동조건을 줄다리기하고, 노조 할 권리를 요구하다보면 평등은 ‘나중에’가 됐다.

그러나 세상이 좋게 변하기를 하염없이 기다릴 수만은 없다. 한 쪽으로 기울어진 일터는 사회의 축소판이고, 일터도 세상을 바꿀 수 있다. 이 마음을 품고 사업장을 바꿔온 노동조합들 중 일부를 조명했다.

7월 민주노총이 ‘포기할 수 없는 미래, 다시 만난 여성활동가’라는 제목으로 여성활동가대회를 진행했다. ⓒ 노동과세계

‘여행원’의 결혼퇴직각서

“그 때는 경영 측만이 아니라 노조 내에서도 남녀 차별 의식이 심했어요. 74년에 재무부에 예산을 올리는데 결혼축의금에 남자가 5만 원 그 자녀가 2만 원인데, 여자는 1만 원이데요. 그래서 어떻게 자녀보다 여직원이 더 적을 수 있냐고 따졌더니 ‘여자는 결혼하면 그만두지 않느냐’ 그래요. 노조 내에서조차 그런 반응이 나타나자 소외감이 컸어요. 중앙노사협의회 자료를 보니 노조가 만들어진 이후에 여성의 권익이 신장된 게 거의 없고, 여성 간부도 비상임이고······.” (이한순 전 금융노련 여성부장, 《전국금융산업노동조합 60년사》)

1970년대 은행은 노동자를 행원과 여행원 등으로 구분했다. 행원은 남성 노동자, 여행원은 여성 노동자를 뜻했다. 그 중 여행원은 평균 재직기간이 3년에서 5년에 불과했다. 여행원만 제출해야 하는 서약서가 주요 원인이었는데, 바로 ‘결혼퇴직각서’다. 재직 중 결혼하면 자진 사직함을 서약하는 문서다. 이한순 전 금융노련 여성부장의 말처럼 ‘여성은 결혼하면 그만둬야 하는’ 상황을 만들어놓았던 것이다. 때문에 여성은 은행에서 임시직으로 취급받았다. 한국은행의 경우엔 여성이 결혼하지 않아도 30세면 퇴직하도록 되어 있었다.

UN이 1975년을 ‘세계여성의 해’라 칭하자 이를 기념해 금융노조 여성조합원들이 모였고, 자연스레 결혼퇴직각서를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 이후 조흥은행의 한여성노동자가 결혼하며 휴가원을 냈고, 산업은행의 한 여성노동자는 계속 직장을 다니는 등 반발이 이어졌다. 결국 노동부는 1976년 10월 은행들에 결혼퇴직각서를 징구하지 말라는 지침을 내렸다.

결혼퇴직각서를 ‘공식적으로’ 쓰지 않는다고 끝난 게 아니었다. 여행원의 임금체계는 행원과 동일한 시작점에서부터 격차(여행원 호봉 승급액 3,000원, 행원 7,000원)가 생겨 근속기간이 길어지면 그 격차가 벌어지는 구조였다. 또 남성은 시험을 치르지 않고도 일정 기간이 지나면(대학 졸업 4년) 중견행원으로 일할 수 있었지만, 여행원은 일정기간(5년)이 지나도 특별 전직시험을 봐야만 중견 행원이 될 수 있었다. 특히 관리자가 되는 시험은 굉장히 어려운 편이었는데, 이필영 전 상업은행노조 여성부장이 대리급 시험에 합격하자 사측은 ‘성전환수술 하라’고 비꼬기도 했다. 남성 노동자들도 이 시험을 ‘성전환고시’라 불렀다.

금융노조의 여성 간부들은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임단협에서 요구하기 시작했다. 본봉, 직책수당, 정기승호금액 등 성별에 따라 달라지는 보수가 없도록 보수규정 개정을 요구한 것이다. 우선 1980년도 교섭에서 여행원의 5급 승진연한을 2년 단축해 성별 승진연한을 맞췄다. 이 합의는 1980년 4월 제38차 중앙노사협의회에서 최종 타결돼 1980년부터 소급 실시됐다. 1986년 임단협에서는 수당 신설에 성별 구분을 하지 않고, 직급에 따라 업무수당을 편성하기로 했다. 임단협을 통해 산전산후 유급휴가 60일, 산전산후 휴직 6개월이 10개 은행에서 시행되기도 했다.

이 같은 노력은 1992년 여행원제의 폐지를 가져왔다. 사실 여행원제 폐지가 성평등한 은행의 완성은 아니었다. 여행원은 비정규직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고, 많은 여성들이 희망퇴직과 구조조정의 대상이 돼왔다. 그럼에도 ‘행원’들은 절망하지 않았다. 이필영 전 상업은행노조 여성부장은 《금융노조 60년사》를 통해 “시대와 상황에 따라 끊임없이 다른 과제들이 제기되는데,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 말고 늘 현재의 문제를 뚫고 나갈 수 있도록 노력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지하철과 병원의 ‘장남수당’

장남수당. 이 투명한 이름은 말 그대로 ‘장남’인 노동자가 받는 가족수당이다. 서울교통공사 노사는 2020년 10월 임단협을 통해 보수규정시행내규를 개정하고, 장남수당(비동거 직계존속 가족수당)의 지급대상을 바꿨다. 원래 직계존속과 동거하지 않는 장남이나 무남독녀가 수당을 받았는데, 성별과 출생순위에 차별을 두지 않도록 한 것이다.

김정섭 공공운수노조 서울교통공사노동조합 교선실장은 “장남수당은 가부장적 전통이었고, 젠더 평등에 어긋나는 것이라 생각했다”며 “노동조합은 이 문제를 해소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회사는 전체 직원에게 가족수당을 줘야 한다면 비용이 늘어나니까 아예 안 주는 것으로 하자고 했다. 그렇게 옥신각신하느라 시간이 좀 걸렸다”고 회상했다.

2018년 임단협에서 노동조합이 문제를 제기했지만, 당시에는 합의에 실패했다. 이후 둘째·셋째인 노동자들이 장남수당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2019년 서울교통공사의 한 노동자는 장남수당이 차남·차녀 등을 불리하게 대우하는 차별이라며 국가인권위원회 차별시정위원회에 진정을 제기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서울교통공사가 노동자들에게 비동거 직계존속에 대한 가족수당을 지급하는 대상을 장남과 무남독녀로 제한하는 것에 합리적인 이유가 있는지 살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서울교통공사가) 이 기준으로 가족수당을 지급하는 것은 직계존속의 부양은 장남이 책임져야 한다는 전통적인 성역할에 따른 고정관념을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며 “사회 변화에 따라 가족의 형태가 다양하게 변하고 있고, 장남이 부모 부양을 책임져야 한다는 인식 또한 크게 낮아졌으며 실제로 부모를 부양하는 실태도 변하였는바, 가족수당 지급 시 차남·차녀 등 직원을 달리 대우해야 할 합리적인 이유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의견을 밝혔다.

그렇게 국가인권위원회의 권고와 노동자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서울교통공사는 직계존속과 비동거하는 장녀, 차남, 차녀라도 연말정산을 할 때 부양가족으로 등록돼있으면 가족수당을 지급하기로 노동조합에 약속했다.

ⓒ 참여와혁신 DB
‘2022년 세계여성의날 정신계승 전국노동자대회’에 참여한 노동자들 ⓒ 참여와혁신 DB

불법촬영과 의료연대본부의 사투

차별적으로 설계됐던 복리후생·노동조건의 균형을 맞추는 일도 있었지만, 피해자와 연대해 싸우고 재발방지 대책을 만드는 것도 노동조합에겐 주요했다. 병원에서의 불법촬영과 맞서며 임단협으로 예방책을 합의한 의료연대본부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2018년. 각계가 ‘미투(#MeToo)’로 소란했을 때였다. 한 간호사가 용기를 내 의료연대본부의 문을 두드렸다. 그는 불법촬영 피해자였고, 2015년 1월 피해 사실을 알게 됐다. 누군가 보라매병원 3개 병동의 간호부 탈의실을 촬영해 인터넷 커뮤니티에 유포했다. 사건을 알게 된 노동조합이 개입하려 했지만 피해자들은 거부했다. 병원이 ‘노동조합을 통해서 일을 진행하면 더 알려질 수 있지 않겠냐. 우리가 잘 처리해 주겠다’고 말했고, 이를 믿었다고 피해자는 노동조합에게 털어놨다.

피해자는 불법촬영 사건에 대한 제대로 된 조사를 원했다. 의료연대본부는 2018년 2월 병원 측에 사건 결과를 요청했지만, 병원은 알려주지 않았다. 그리고 그해 7월 다른 영상들이 추가로 유포된다. 결국 의료연대본부는 피해자들과 고소·고발을 진행했다. 국회에도 이 사안을 알려 환경노동위원회 증인으로 출석하고, 산재 신청도 했다. 2018년 말, 범인은 잡히지 않았지만 유포 사이트의 운영자가 검찰에 송치됐다.

실은 노조가 추측하는 범인이 있었다. 보라매병원은 서울대병원이 운영하기에 전공의들이 두 병원을 돌아가며 수련을 받기도 한다. 피해가 있었던 때 불법촬영건으로 형을 받았던 전공의가 보라매병원에서 파견 근무 중이었다. 영상에 찍혔던 병동 중 하나였다. 의료연대본부는 해당 전공의를 조사해야 한다고 경찰에 말했고, 경찰은 그 시기 해당 전공의가 파견 중이지 않았다고 했다. 의료연대본부는 병원이 잘못된 자료를 경찰에 제공했을 가능성을 의심하고 있다.

이런 일은 다시 없어야 했다. 2018년 교섭에서 의료연대본부 서울지역지부 서울대병원분회는 “보라매병원 갱의실(탈의실) 불법 촬영 건과 관련 영상이 유포되지 않도록 전문 업체를 통해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하여 삭제 조치하고, 탈의실·화장실 등 몰래카메라 점검 및 탈의실 시건장치 도입 등 적극적으로 재발방지를 위해 노력한다”는 문구를 단협에 담았다. 보라매병원 사건 이후 의료연대본부의 5개 분회가 불법촬영기기 전수조사, 성희롱 성폭력 예방교육 전문 강사 선정 시 노동조합과 협의 등을 합의했다.

“신체의 안전이 보장돼야 하는 병원에서 불법적으로 신체가 촬영됐다는 것은 병원이 사람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했던 거예요. 동료들은 피해자와 같이 싸워줘야 하고, 그 동료가 조직된 곳이 바로 노동조합이에요. 그래서 노동조합은 피해자가 용기를 낼 수 있도록 뒤에 든든히 선 백드라운드죠.”

박경득 의료연대본부 서울지역지부 지부장은 “2015년도에 노동조합이 아무것도 못할 때 좌절감을 느끼기도 했다. 피해자들은 잘못한 게 없다. 알려지면 피해가 커질까 위축되는 모습이 아팠고, 화도 났다”면서도, “함께 문제를 제기하고 나서는 조금의 역할을 했다는 생각에 안도감이 들었다. 간호사들도 단협을 체결한 후에는 ‘다 막을 수는 없겠지만 약간은 안심한다’는 반응이었다”고 말했다.

성평등 꿈꾸는 노조의 단협안들

모범단협안은 노동조합이 상상하는 일터를 보여준다. 전교조 성평등위원회는 지난해부터 성평등 단협안을 만들고 있다. 성평등특별위원회가 만드는 단협안에는 ‘모성이라는 관점이 없다. 여성은 출산과 양육을 위해 존재하지 않기에 모성보호 조항을 ‘성과 재생산 건강 권리 보장’이라는 조항으로 바꾸려 하는 것이다. 유·사산과 관련된 조항에 임신중지를 포함시키고, 비혼·성소수자 교사의 권리를 보장할 방안도 논의 중이다.

손지은 전교조 부위원장은 “이 단협안의 필요성을 전교조 조합원이 인식하는 것 자체가 교육계에 어마어마한 변화를 일으킬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성평등 단협안 체결이 노동조합의 힘이자 숙명이라고 말했다.

“교사라는 집단이 단일집단이 아니거든요. 여성도, 장애인도, 성소수자 교사도 있어요. 그 색깔이 그동안 드러나지 않았다는 것 자체가 차별이라고 생각해요. 노조라는 것은 사용자에게 과하게 기울어진 힘을 다시 평등하게 만들기 위해 시작한 것이잖아요. 그래서 다양성을 포함하지 않으면 노동조합은 힘을 가질 수 없어요. 우리 내부에서부터 평등을 지향해야 본질을 실현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런 것까지 안 생각하더라도 노동자는 남성만의 얼굴을 하지 않잖아요. 노동조합이 일터에서 평등을 신경쓰지 않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인 거죠.”

올해 제23회 서울퀴어문화축제에 민주노총이 부스를 차렸다. ⓒ참여와혁신 강한님 기자 hnkang@laborplus.co.kr

금속노조는 지난해 12월 7년 만에 모범단협안을 개정하고 배우자와 가족의 개념을 새로 정했다. 금속노조는 모범단협안에서 ‘배우자’를 법률상 혼인 여부와 관계없이 사실혼 관계의 배우자 및 동거인을 포함하도록하고, ‘가족’은 법률상 혼인으로 성립된 가족 외에도 성적 지향과 성별 정체성 등을 고려한 다양한 가족 형태를 포함하도록 권고했다.

재정의된 배우자와 가족은 특별휴가(경조휴가), 경조사비, 의료비, 수당, 돌봄휴가의 조항의 영향을 받는다. 성소수자 가족도 복리후생 등에서 배제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조치다. 남성의 육아활동 참여도 사업주가 보장하도록 했다.

포괄적 차별금지 조항도 들어갔다. “회사는 평등권 침해의 차별행위를 해서는 안 되며 그러한 조직문화를 용인해서 안 된다”, “성별, 비정규직 등 고용형태를 이유로 한 차별은 물론이고 성적 지향, 성별 정체성을 이유로 한 차별도 안 된다”는 등의 문구다. 개정 모범단협안은 새롭게 설립되는 금속노조 사업장 단체협약 요구안의 기준이 된다.

이 모범단협안 문구를 단협에 넣은 사업장은 아직까지 없다. 체결을 요구한 사업장은 여럿 있었으나, 회사가 비협조적인 곳이 다수였다. 가뜩이나 노동조합과 기본적인 단협을 체결하는 일도 부정적인데, 모범단협안에 명시한 조항들을 넣는 것은 더 거부하는 사용자가 많다고 권수정 금속노조 부위원장은 설명했다.

권수정 부위원장은 “사용자는 그냥 단협을 맺기 싫다고들 한다. 신규 노동조합들이 그들과 힘겨루기하고 싸우다보면 노동조합 활동 시간, 사무실 정도를 보장 받는 것도 어렵다”면서도, “그럼에도 이 모범단협안은 기준이기 때문에, 시간이 조금 필요하겠지만 어디선가 열기 시작하면 물꼬를 틀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