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밭 묘지’, 사회적 한풀이와 다짐
‘포도밭 묘지’, 사회적 한풀이와 다짐
  • 박완순 기자
  • 승인 2022.11.03 14:18
  • 수정 2022.11.03 14: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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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우리가 가능하리라 여겼던 인생은 다 어디로 갔을까. 애초에 그런 것이 있기는 했을까.”
문학동네 홈페이지에서 갈무리

운 좋게도 취재 때문에 특성화고 재학생과 졸업생을 만난 적이 있다. 간접적으로만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는데, 직접 그들의 입을 통해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던 귀중한 시간이었다. 특성화고 졸업생 무리를 지난해 초에 만났고, 재학생인 어느 공업고등학교 토목건축과 무리를 만난 건 지난해 10월쯤이었다.

그들은 대학교에 가는 대신 취직을 해 경제 활동을 빨리 시작하고픈 꿈을 안고 있었다. 졸업생들은 취업해야 할 시기에 코로나19 시대를 맞았다. 일자리는 줄었고 취업이 어려웠다. 대학을 가자니 지금까지 취업 관련 공부를 해왔다. 무엇보다 취업을 위해 독한 마음으로 많게는 10개 넘게 취득한 자격증이 아까웠다. 자격증을 따기 위해 들인 시간, 비용, 열정은 무엇이었나 자책하기도 했다.

어느 공업고등학교 토목건축과 학생들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날 만난 학생들은 20여 명쯤 되는데, 그들은 대부분 건축공무원을 꿈꿨다. 건설 현장에서 기술을 가지고 건물을 짓는 건설노동자가 되겠다는 이들은 드물었다. 위험하고, 사회적인 인식이 그리 좋지 않다는 이유에서 망설였다. 그들도 건축공무원 자리는 상당히 한정돼 있음을 알고 있다.

젊음보다는 싱그러움의 표상이었던 사람들이었다. 10대와 20대 초반 사람들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기운이라고 해야 할까. 그래서인지 그들이 처한 상황과 깊어져가는 고민이 더 아파 보였다.

지난 기억들을 다시 꺼내게 한 것은 편혜영 작가의 단편 소설 <포도밭 묘지> 때문이다. 2022년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올해 9월 말 발행)을 통해 만났다. <포도밭 묘지>의 주연은 네 여성인 한오, 윤주, 수영, 나(화자)다. 이들은 상업고등학교 학생들로 이른 나이에 취업 전선에 뛰어든 이들이다. 이들이 취업에 성공하면서 혹은 취업에 성공하지 못하면서, 이들이 만났다 헤어지면서 겪는 일들을 담았다. 스포일러 방지를 위해 조금 모호하게 줄거리를 말하자면 이 단편은 한풀이와 다짐이 섞여 있는 이야기다. 개인적 한풀이와 다짐일 수 있겠고, 사회적 한풀이와 다짐일 수 있겠다.

“선생들은 겨울방학이 다 되도록 취업 못한 아이들을 ‘미자’라고 불렀다. 미취업자를 줄인 말인데, … 미자라는 말을 안 듣고 졸업하는 학생은 거의 없었다. 선생들이 학기초부터 그 말을 아무 데나 가져다 썼기 때문이다. 제때 자격증을 따지 못한 미취득자들도 미자라고 불렀다. … 더 굴욕적인 미자도 있었다. 용모 단정이라는 지원 자격을 구실로, 선생들은 자체적인 신장과 몸무게 조건을 정해두고…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미용모자들도 미자가 됐다.”(2022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 <포도밭 묘지>, p.16)

“은행은 일과 학업을 병행한 한오의 노력을 알아주기는커녕 매해 인사 평정에서 야박한 평가를 내렸다. 한오보다 입사가 늦은 대졸 사원들이 모두 진급한 후에도 한오는 행원 신세를 면치 못했다.”(2022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 <포도밭 묘지>, p.22)

“모든 일에는 다음이 있지만 사직서를 낸 고졸 행원에게는 그런 게 없기 때문이었다. 성실하지만 가난한 사람은 최악의 노동자가 되기 십상이라는 걸 미처 몰랐다.”(2022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 <포도밭 묘지>, p.17)

이것들은 <포도밭 묘지>의 주연들이 겪었던 일들이다. 동시에 지난해 만났던 특성화고 학생들이 말해줬던 자신들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그중의 한 졸업생은 어떻게 취업을 하게 됐는데, 대졸 사원과 비슷한 위치로 가기 위해 야간대학을 다닐 것이라 했다. 자기 계발과 경력을 관리하기 위해 열정을 다하는 모습이기도 하지만 그가 했던 말이 생생하다. “제가 더 일찍 들어오기도 했고, 업무 능력은 차이 없거든요.”

<포도밭 묘지>의 마지막 부분으로 다다를 때 소설 속 주연들도 나이를 먹어 서른을 향했을 시점으로 추측된다. 그래서 <포도밭 묘지>는 어떤 특정 계층의 이야기라기보다는 누구나를 대입할 수 있는 사연으로 보였다. 사회적 한풀이와 다짐이라고 했던 것도 이 맥락에서다.

<포도밭 묘지>는 시인 기형도의 시 제목에서 따왔다. 기형도의 시 <포도밭 묘지1>을 읽다가 문득 한 구절을 오래 봤다. “나는 그때 왜 그것을 몰랐을까. 희망도 아니었고 죽음도 아니었어야 할 그 어둡고 가벼웠던 종교들을 나는 왜 그토록 무서워했을까.”

이번에는 편혜영의 <포도밭 묘지>의 마지막 부근의 문장을 오래 봤다. “그때 우리가 가능하리라 여겼던 인생은 다 어디로 갔을까. 애초에 그런 것이 있기는 했을까.”

그리고 <포도밭 묘지>의 뒤에 바로 함께 실린 작가 노트인 ‘검은 포도의 맛’에 편혜영 작가가 쓴 마지막 문장도 오래 봤다. “효율성과 경제성이라는 이름으로 버려지고 갈아엎어지는 것들 앞에서는 늘 말수가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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