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한 ‘공돌이·공순이’의 비애
여전한 ‘공돌이·공순이’의 비애
  • 함지윤 기자
  • 승인 2007.10.09 00:00
  • 수정 0000.00.00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Special Report 대한민국, 노동을 ‘왕따’ 시키다
⑤ 노동의 어제

공장노동자에서 이공계 출신으로 확대

노동이 무시당하는 사회의 장벽 여전


“전쟁 같은 밤일을 마치고 난 / 새벽 쓰린 가슴 위로 / 차거운 소주를 붓는다 / 아 / 이러다간 오래 못 가지 / 이러다간 끝내 못 가지 // 설은 세 그릇 짬밥으로 / 기름투성이 체력전을 / 전력을 다 짜내어 바둥치는 / 이 전쟁 같은 노동일을 / 오래 못 가도 / 끝내 못 가도 / 어쩔 수 없지 // 탈출할 수만 있다면, / 진이 빠져, 허깨비 같은 / 스물아홉의 내 운명을 날아 빠질 수만 있다면 / 아 그러나 어쩔 수 없지 어쩔 수 없지 / 죽음이 아니라면 어쩔 수 없지 / 이 질긴 목숨을, / 가난의 멍에를, / 이 운명을 어쩔 수 없지 // 늘어쳐진 육신에 / 또다시 다가올 내일의 노동을 위하여 / 새벽 쓰린 가슴 위로 / 차거운 소주를 붓는다 / 소주보다 독한 깡다구를 오기를 / 분노와 슬픔을 붓는다”  (박노해, 노동의 새벽 中)

 

그랬다. ‘어쩔 수 없’었다. ‘이러다간 끝내 못’ 갈 걸 알면서도 ‘질긴 목숨을’ ‘가난의 멍에를’ ‘이 운명’을 어쩔 수 없기에 ‘기름투성이 체력전을’ ‘차거운 소주’ 한 잔으로 그렇게 버텨냈다. 대한민국에서 ‘노동’은 질곡이었다.


낮은 천장, 어두컴컴한 조명, 뿌연 먼지, 장시간 노동으로 피를 쏟는 것은 예삿일이었다. 버스비 한 푼이 아까워 지친 몸을 이끌고 낯선 도시의 밤거리를 터벅터벅 걸었고, 붕어빵 한 개 앞에서도 그저 군침만 삼키고 온 몸에서 펄펄 열이 나도 약도 사먹지 못한 채 아픈 몸을 이끌고 또다시 먼지구덩이 속으로 향해야 했다.


그러면서도 월급날이면 그 상처투성이 월급 몇 푼을 거의 모두 고향의 가족들에게 보냈다. 식구들이 걱정할까봐 힘들다는 말 한마디 내비치지 않고 ‘괜찮다’ ‘잘 먹고 잘 지내니 걱정말라’는 거짓말만 반복했다. ‘학비는 내가 댈 테니 열심히 공부하라’는 말도 그 시대엔 참으로 익숙한 말이었다.

30년 전, 우리에게 노동은 곧 ‘생존’의 문제였다. 먹고 살기 위해, 배고픔을 피하기 위해, 내 가족을 위해 노동해야 했고, 기름밥, 먼지밥 먹는 그들에겐 ‘공돌이’ ‘공순이’ ‘시다’ 같은 이름이 붙었다.


가족을 먹여 살리고 나라를 일으키다

오랜 일제강점기와 해방, 곧바로 이어진 한국전쟁. 왕권과 봉건사회가 무너지고 근대에서 현대로 접어들고 있었지만 이 땅은 폐허가 되어 있었다. 피난에 피난을 거듭하느라 국토는 황폐화 되고 사람들은 삶의 터전을 잃어버렸다. 빌어먹을 땅조차 변변히 없어 소작농으로 전락했던 사람들은 ‘공장’이 생겨나자 공장으로 공장으로 모여들었다.


먹고 살기가 버거워 배울 수도 없고, 배우지 못했으니 살기가 버거운 악순환 속에서 공장노동자의 길은 한 가족의 희망이었다. 남녀노소 구분 없이 모두 공장으로 모여들었다. 열악한 환경과 고된 노동도 참을 수 있었다. 허리도 펼 수 없는 공간에서 먼지를 뒤집어쓰며 하루종일 일을 해도 참았다. 그렇게 번 돈으로 한 가족이 살고 동생들이 공부를 할 수 있었다.


그들이 허리조차도 쫙 펼 수 없는 좁고 힘든 공간에서 먼지와 기름을 뒤집어쓰며 일을 하는 사이, 변변한 보호 장비 없이 유해가스를 마시고, 오직 몸뚱이 하나로 기계를 돌리는 사이 한강의 기적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들이 공부시킨 그들의 동생과 오빠들은 우리 사회를 후진국에서 개발도상국으로 그리고 선진국 대열에 성큼 다가갈 수 있도록 만들었다. 30여년의 짧은 시간 안에 벌어진 이 변화의 밑바탕에는 바로 열악한 환경에서도 묵묵히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던 그들이 있었다. 그들의 희생과 노력이 지금의 우리 사회를 만든 것이다.


우리는 그들이 있었기에 나의 현재가 가능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었던 것일까. 그들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현실임을 알면서도 우리는 그들의 존재를 모른 척 하고 싶어 했다. 새로운 것에 대해 열렬히 신봉하며 기존의 것에 대해서는 철저히 외면했다.


그래서 나의 짐까지 짊어지고 공장에서 고생했던 내 누이와 형제들까지 ‘공돌이’와 ‘공순이’라 비하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과 차별을 두고 싶어 했다.

 


공돌이·공순이의 진화?

70~80년대 ‘공돌이·공순이’는 공장에서 일하는 생산직 노동자를 비하하는 말이었다. 그로부터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공돌이·공순이의 뜻이 조금 달라졌다. 요즘은 이공계 출신을 비하하는 말로 이른바 공과대학 남학생을 공돌이, 여학생을 공순이라고 부른다. 과거 대다수의 공돌이·공순이가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채 10대 후반, 20대 초반부터 산업현장으로 뛰어든 것을 감안할 때 신분상승이라도 했다고 해야 하는 것일까. 여기엔 공장의 생산직 노동자를 넘어 이공계의 전문가들까지, 즉 손발을 움직여야 하는 노동의 가치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담겨져 있다.


단어만 놓고 봤을 때 지난 20여년 동안 우리 사회에서 공돌이와 공순이는 사라지기는커녕 다른 형태로 확대 재생산되고 있는 것이다. 단지 말뿐이 아니다. 공장노동자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 또한 과거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현대자동차 등 생산직 노동자들의 파업을 바라보는 시각에서도 알 수 있다. 그들의 파업을 바라볼 때 이른바 ‘여론’은 가장 먼저, 그리고 마지막까지 그들의 임금을 문제 삼는다. ‘과도한 임금 인상’ ‘귀족 노조’라는 비판은 일면 타당해 보인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생산직 노동자 주제에 어떻게 나와 비슷한, 나보다 더 많은 돈을 받을 수 있느냐’는 잠재의식이 깔려있다.


대학입시에 목맨 사회 속 사라져가는 전문계고

노동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70~80년대와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오히려 땀의 의미는 점점 무시되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자라나는 아이들이 받고 있다. 상고 출신의 대통령이 나왔어도 공고나 상고 등 전문계고(과거엔 ‘실업계고’라 불렸지만 부정적인 이미지를 개선하고자 2007년 4월 12일 법개정을 통해 명칭을 바꿨다)에 대한 인식은 달라지지 못했다. 이런 왜곡된 이미지에서 벗어나고자 이름도 ‘정보화고’ 등으로 바꾸고, 영상미디어 제작학과 등 트랜드를 적극 반영한 특성화고등학교로 바꾸는 등 학교는 부단한 노력들을 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의 벽은 너무나 높다. 산업발전의 원동력이 될 기술전문인을 양성하고자 설립된 전문계고들은 일반고와 마찬가지로 대학을 가기 위한 하나의 과정으로 전락해 버렸다. 불과 10여 년 전인 95년엔 전문계고를 졸업하고 바로 산업현장으로 들어가는 인력이 전체 졸업생의 81.6%에 달했다. 진학자는 13.2%였다. 하지만 2006년도엔 30.9%만이 졸업 후 산업현장으로 취직을 하고 65.1%가 진학을 했다. <그래프 참조>

 


상황이 이렇다보니 “전문계고에서도 취업보다는 대학진학에 더 많은 신경을 쓰는 게 현실”이라고 교육일선의 한 교사는 말한다. 결국 전문계고에 진학한 학생들 중에는 자퇴를 선택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교육전문가들은 우리 사회에 팽배한 학벌주의와 대학 수가 많아져 누구나 대학에 쉽게 진학할 수 있다는 점 등을 그 원인으로 분석했다. 교육인적자원부의 한 관계자는 “노동시장에서 학력에 따른 임금 격차 등 차별이 존재하는 것이 공공연한 사실이지 않냐”면서 “한 가정에 한 자녀인 경우가 많은 오늘날엔 부모들이 상급학교 진학을 희망한다”고 지적한다. 이런 부모들의 희망으로 인해 전문계고 진학을 원하는 학생들은 부모들과 갈등을 빚기도 한다.


실력이 아닌 학력으로 먼저 평가받는 사회

전문계고를 나오거나 일반계고를 나오더라도 고등학교 졸업장만을 가지고 현실과 맞부딪치는 것은 쉽지가 않은 게 우리나라의 현실이다. ‘내가 하고자 하는 바가 명확하니 대학은 필요 없다’며 고등학교 졸업 후 사회로 뛰어든 많은 젊은이들이 얼마 후 다시 대학의 문을 두드리는 것은 비단 그 분야에 대한 더 깊은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해서만은 아니다.


현실 사회에서 공공연하게 존재하는 학력에 따른 임금이나 대우의 차이가 그들을 다시 대학 졸업장에 연연하게 한다. 최근 대한민국을 흔든 학력 위조 파문은 이를 보여주는 한 단편이다.


몇 차례 국내 이름 있는 대학에 합격하고도 집안 사정으로 인해 대학진학을 포기해야만 했던 C씨는 “일하면서 실력을 인정받는 것과 고졸이기 때문에 월급을 적게 받는 것은 별개의 것”이라고 사회에서 부딪힌 현실을 이야기한다.

한 중소기업에 다니는 H씨도 “직급이 올라가면서 협력업체 사람들과 만나야 할 기회가 많은데 실력보단 고졸이란 것 때문에 일하는 게 힘들었다”며 최근 바쁜 일과 속에서도 야간대학을 다니게 됐다고 토로했다.


공고 등 전문계고가 정보산업고 등으로 이름까지 바꿔가며 이미지 변신에 노력하고 있으며, 자기 목표가 분명한 청소년들이 전문계고를 통해 한 걸음 더 빨리 자신의 꿈을 향해 가고자 하고 있다. 하지만 현실은 여전히 전문계고 출신이라면 학습능력이 떨어지고 행실은 불량할 것이라는 선입견으로 그들의 활동범위를 제한시키고 있다.


결국 그러한 세상의 시선이 두렵고 깨부술 힘이 없는 부모들과 아이들은 모두 대학입시에 목을 맨다. 지방의 이름 없는 대학일지라도, 2~4년 뒤 정작 배운 것이 없다 할지라도 고등학교 졸업장보다는 대학 졸업장이 대접받는 현실에 주저앉고 만다.

 

개발시대에는 뿌연 연기를 내뿜는 공장이 한국 경제를 이끌었다. 그리고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공돌이, 공순이로 상징되는 노동자들의 희생이 있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그들을 외면하고자 했다. 그들이 일궈낸 경제성장은 ‘한강의 기적’이란 거창한 이름을 달고 자랑하면서 그것을 만들어낸 ‘그들’은 비하하고, 무시하고, 모른 척 했다.


2007년 대한민국의 ‘노동의 가치’는 아직 1960년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