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광주, 그곳에 ‘노동자’가 있었다
5월 광주, 그곳에 ‘노동자’가 있었다
  • 송준혁 기자
  • 승인 2019.04.02 07:50
  • 수정 2019.04.01 18: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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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광주민주화운동에서 지워진 ‘노동자’의 표상

[커버스토리] ① 5월 광주, 노동이 지워지다

"오늘 우리는 패배할 것이다. 그러나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 것이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아픔이자 부채였다. 우리가 몰랐던 진실에 분노했고, 그 힘은 87년 6월 항쟁으로 이어졌다. 80년 5월이 87년 6월로 이어져 직선제 쟁취라는 민주화를 이뤄냈다는 점에서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승리의 역사가 되었다. 그리고 그 마지막 발언을 했던 청년 노동운동가 윤상원은 승리자가 되었다.

당시 도청을 사수하며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끝까지 이끌고 간 것은 ‘노동자’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5.18 광주민주화운동에서 ‘노동자’를 떠올리지 못한다. ‘조직화 된’ ‘노동자’의 이름은 지워지고, 단지 ‘시민’의 ‘자발적’인 투쟁으로만 남은 5.18은 그래서 여전히 복원해야 할 진실이 남은 절반의 승리에 머물고 있다. ‘노동운동가’이자 ‘대변인’이었던 윤상원의 마지막 말처럼 ‘내일의 역사’ 즉 ‘오늘’을 사는 이들이 윤상원을, 그리고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온전한 승리자로 만들 수 있을까.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부마항쟁은 … 답보상태에 처해 있던 ’70년대 학생 및 재야 중심 민주화운동의 한계를 뛰어넘어 ’80년대 광주항쟁과 6월 항쟁이라는 대규모 반독재 민주항쟁의 도래를 예고하고 향도하였던 것이다.

- 부산민주화운동사 편찬위원회 편, 『부산민주운동사』,
부산시사편찬위원회, 1998

1979년 10월 16일 시작된 부마항쟁은 엘리트 중심의 저항 모델에서 벗어나 대중들의 자발적 참여를 통해 증폭되는 형태로 진행됐다. 부마항쟁의 시작은 부산대생들의 시위에서 비롯됐지만 검거 및 연행된 총 1,563명 중 학생은 30%에 그쳤고 나머지는 일반 시민이었다. 공수부대의 투입으로 빠르게 진압됐지만 부마항쟁은 박정희의 죽음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며 유신체제의 붕괴로 이어졌다.

박정희의 죽음과 12.12사태, 서울의 봄으로 이어지는 1979년부터 1980년까지의 상황을 보면 부마항쟁은 유신체제 종말의 도화선이었고,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권위주의 정권에 맞선 저항의 정점이었다. 부마항쟁과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통해 민주화에 대한 요구는 학생, 재야인사 등 일부 엘리트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민중들의 요구라는 것이 확인됐다.

부마항쟁이 없었으면 ‘서울의 봄’이 있기 어려웠고, ‘서울의 봄’이 없었으면 광주항쟁도 있기 어려웠다. 광주항쟁이 없었다면 과연 그 기세등등했던 제5공화국이 겨우 7년 만에 종료되고, 1987년에 정치적 민주화로의 평화적 이행이 가능했을지에 대해서는 매우 회의적이다.

- 조정관, “5.18항쟁이 한국 민주화에 미친 영향”, 2008

1979년 부산과 마산, 1980년 광주에서 고립화됐던 지역적 항쟁의 경험을 통해 1980년대 민주화 운동가들은 전국적 연대와 노학연대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1980년대 이후 학생운동가들의 공장, 농촌, 빈민운동 투신이 본격화됐고, 운동조직 간 전국적 연대를 모색했다. 이는 1983년 민주화청년운동연합(민청련), 1985년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결성으로 이어진다. 이후 1987년 6월 항쟁 과정에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라는 전국조직으로의 전환과 국민적 항쟁의 전개는 6.29 선언을 이끌어냈고 직선제 쟁취로 이어졌다.

오늘을 살아가는 이들이 바라본 ‘5.18’
그리고 ‘윤상원’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없었다면 1987년 6월 항쟁, 그리고 2016년 촛불혁명이라는 한국사회 민주화의 진전은 어려웠을 것이라는 데 많은 역사가들이 동의하고 있다. 그렇기에 39년이 지난 오늘도 광주민주화운동을 기념하는 자리뿐만 아니라 노동·시민사회단체의 집회, 행사 등에서 윤상원 열사가 남긴 마지막 말은 노래로 변주되어 퍼져나간다. 오늘날 우리는 5.18과 윤상원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일반 대학생들과 시민, 그리고 5.18 관련 행사를 경험해본 사람들과 인터뷰를 진행했다.

“‘주먹밥’, ‘금남로’, ‘전남대’ 등의 이미지가 떠올라요.”
- 노동조합 집행부 A씨(30)

 

“자유한국당이 5.18을 폄훼하는 만행을 저지르고 있어서 5.18에 대해 올바로 전달하기 위해 올해 5.18 행사는 더 적극적으로 진행하려고 해요.”
- 정철우 서울 대학생 겨레하나 대표(29)

 

“‘민중항쟁’이라는 이미지가 강해요.”
- 이진희 서울여대 미술대학 학생회장(23)

 

“무자비한 ‘폭력’과 총알자국이 선명한 구도청 그리고 전일빌딩이 떠올라요.”
- 광주시민 이예빈 씨(27)

 

“최근에 전두환 전 대통령이 ‘이거 왜 이래’라고 한 것과 영화 <택시운전사>가 생각나요.”
- 서강대 학생 김○○ 씨(21)

 

“영화 <26년> 생각이 많이 나는데 자극적으로 느껴졌고 비극적인 사건이라 생각해요.”
- 서강대 학생 신○○ 씨(22)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념행사를 경험해 본 사람들은 5.18과 연관된 이미지에 대해 ‘주먹밥’, ‘금남로’, ‘전남대’, ‘민중항쟁’ 등이라고 대답했다. 행사 참여 경험이 없는 일반 시민은 ‘폭력’, ‘구도청’, ‘전일빌딩’ 등을 떠올렸고, 대학생들은 <택시운전사>, <26년> 등 영화와 최근 논란이 된 전두환의 발언을 언급했다.

“윤상원 열사에 대해선 박기순 열사와의 영혼결혼식과 시민군이라는 이미지가 떠올라요. 윤상원 열사가 노동운동가라는 인식은 없었어요. 위장취업자였다는 것과 전민노련 중앙위원이었다는 얘기는 오늘 처음 들어봐요.”
- 노동조합 집행부 A씨(30)

 

“윤상원 열사하면 야학에서 활동하셔서 선생님 같은 이미지와 시민군 대변인이셨기 때문에 달변가일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요. 그리고 ‘님을 위한 행진곡’의 배경인 박기순 열사와의 영혼결혼식 내용이 인상적이었어요. 윤상원 열사가 노동운동가라는 인식은 없었는데 얘기를 듣고 나니 들불야학에서 노동자들을 가르쳤다는 정도는 어렴풋이 기억나요.”
- 정철우 서울 대학생 겨레하나 대표(29)

 

“‘님을 위한 행진곡’이 떠오르는데 망월동 묘역 순례를 할 때 묘비 앞에서 ‘님을 위한 행진곡’을 함께 불러서 기억에 남아있어요. 윤상원 열사가 노동운동가라는 인식은 없었어요. 노동운동을 했다는 이야기는 얼핏 듣긴 한 것 같은데 위장취업이나 전민노련 활동 같은 내용에 대해서 알지 못했어요.”
- 이진희 서울여대 미술대학 학생회장(23)

 

“누군지 잘 몰라요. (‘님을 위한 행진곡’에 대한 설명 후에) ‘님을 위한 행진곡’이 영혼결혼식을 배경으로 한다는 건 알았는데 윤상원이라는 분이 그 주인공인지는 몰랐어요.”
- 광주 시민 이예빈 씨(27)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어요.”
- 서강대 학생 김○○ 씨(21)

 

“5.18에 대해 교과서에서 짧게 배워서 윤상원 열사라는 분이 어떤 분인지는 모르겠어요.”
- 서강대 학생 신○○ 씨(22)

윤상원에 대해 떠오르는 이미지에 대해 물었을 때 5.18을 어느 정도 아는 이들은 ‘영혼결혼식’, ‘님을 위한 행진곡’, ‘야학’ 등의 이미지를 떠올렸다. 이들에게 윤상원 열사가 ‘노동운동가’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느냐는 질문에는 처음 들어보거나 어렴풋하게는 들어봤지만 자세한 내용은 모른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에 반해 5.18을 잘 모르는 대학생들은 ‘윤상원’이라는 이름에 대해 생소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한편 광주시민은 윤상원이라는 이름은 알지 못했지만 ‘님을 위한 행진곡’의 배경에 대해선 알고 있었다.

“청년들은 (윤상원 열사에 대해) 잘 모른다. 통계를 내본 적은 없다. 광주에서는 ‘님을 위한 행진곡’ 주인공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다. 지금도 정확하게 모르는 사람이 많다.”
- 조계현 윤상원기념사업회 상임이사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그들의 직업은 그 곳에서 직접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대부분은 노동자, 목공, 공사장 인부 등 직접 노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이거나 구두닦이, 넝마주이, 술집 웨이터, 부랑아, 일용품팔이 등이었으며…”
- 황석영 외,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1995

황석영 등이 5.18 당시 모습을 기록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는 도청을 마지막까지 사수하며 광주민중항쟁을 완성시킨 대다수의 시민군들이 노동자였다고 적고 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승리의 역사로 기록될 수 있었던 데에는 군부의 폭압에도 타협하지 않았던 시민군의 저항이 있었다. 그리고 시민군 지도부에 ‘광천공단 위장 취업자’, ‘전국민주노동자연맹(전민노련) 중앙위원’으로서 ‘노동’을 통해 세상을 바꾸려 했던 청년 노동운동가 윤상원이 존재했다.

은행원이자 노동운동가였고,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에는 ‘투사회보’를 발행한 언론인이자 시민군 대변인이었던 윤상원은 당시 항쟁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하지만 ‘5.18은 폭동’이라는 공격에 맞서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순수한 시민들의 자발적 항쟁’이라는 방어적 대응이 계속되는 사이 윤상원의 ‘노동운동가’로서의 모습은 흐릿한 그림자로만 남게 됐다.

이렇게 윤상원 열사의 노동운동가로서의 모습은 잊히고 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에서 ‘노동’이라는 키워드가 지워지고 있는 것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노동’이 어떤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지와 무관하지 않다. 그날 윤상원이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 것”이라고 이야기한 중심에는 노동운동가로서 그가 꿈꿨던 세상이 자리 잡고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