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이사제로 본 한국 노동의 참여
노동이사제로 본 한국 노동의 참여
  • 임동우 기자
  • 승인 2020.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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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수기(擧手機) 이사회에 숨 불어넣는 노동이사제
기업 지배구조 개선, 이제 첫 발 뗐다

커버스토리 ② 한국 노동, 참여의 오늘은

노동, 참여를 돌아보다

우리나라에서 노동의 사회적 위치는 어디쯤일까? 시키면 시키는 대로 일만 하거나 일터를 벗어나야만 비로소 시민권을 보장받는 존재는 아닐까? 자신이 일하는 현장을 가장 잘 알지만 일터에서 이뤄지는 온갖 의사결정에서는 배제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대부분의 기업에서 의사결정은 소수의 수중에 집중되고, 신속한 의사결정, 경영의 효율성 같은 논리가 이를 뒷받침한다.

그런데 현장의 목소리, 노동이 배제된 의사결정의 결과는 그리 신속하지도 않고 효율성은 더더욱 떨어진다. 다수가 배제된 의사결정은 사회적 갈등을 잉태하고, 기업의 생존을 위해 노동자들을 구조조정하는 일이 반복되면서 갈등이 폭발해 해결되지 못한 채 막대한 시간과 사회적 비용을 초래하는 일은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풍경이다.

사후적인 대응에만 머물렀던 노동자가 기업의 의사를 결정하고 나아가 일터를 개선하는 데 주체로서 참여할 수 있는 길은 없을까? ‘노동의 참여’의 의미를 짚어본다.

1980년 노사협의회법으로 출발한 ‘근로자참여 및 협력증진에 관한 법률’(이하 근참법)은 1997년 노동자와 사용자가 참여와 협력을 통하여 노사공동의 이익을 증진함으로써 산업평화를 도모하고 국민경제발전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제정됐다. 노사협의회 설치 등을 토대로 기업의 경영계획과 경제적 상황을 공유하며 협력을 도모하고자 한 이 법률은 노동이 사용자와 함께 ‘참여의 주체’로 나아가도록 만드는 발판이 되었으나, 그럼에도 여전히 한국사회에서의 노동의 참여 기회는 빈약한 상황이다. 이후 노동의 참여에 대한 방안으로 ‘노동이사제’가 거론됐다. 2017년 촛불로 탄생한 문재인 정부의 100대 국정과제이기도 했던 ‘노동이사제 도입’은 2016년 9월 서울특별시로부터 처음 시도됐다.

2016년 5월 10일 오전 시청 브리핑실에서 ‘노동이사제’ 도입 배경을 설명 중인 박원순 서울시장 ⓒ 서울특별시
2016년 5월 10일 오전 시청 브리핑실에서 ‘노동이사제’ 도입 배경을 설명 중인 박원순 서울시장 ⓒ 서울특별시

서울시 노동이사제 도입,
참여의 첫 발을 딛다

1987년 이후 거대한 민주화 물결이 밀려왔으나 기업의 권위주의적 통치체제는 여전했다. 경영은 특정 소수에게만 허용된 권리였으며, 경제 활동의 주체에 해당하는 노동자는 철저히 배제됐다. 1997년 제정된 근참법에는 ‘노사협의회 설치’가 명시됐다. 오늘날 노사협의회는 노동자와 사용자를 대표하는 3~10인 이내 동수 위원으로 구성해 ▲생산성 향상과 성과배분 ▲노동자 채용·배치 및 교육훈련 ▲노동자 고충처리 및 안전·보건 등 작업환경 개선 ▲인사·노무관리 제도개선 ▲고용조정의 일반원칙 ▲임금 지불방법·체계·구조 등 제도개선과 같은 기업 내부 경영 문제를 논의하는 자리로 활용되고 있지만, 기업의 전략적 의사결정 등에 해당하는 외부 경영까지 노동의 참여를 이끌 여력이 되진 못했다.

2018년 기준 우리나라의 사회 갈등의 수준은 OECD 27개국 중 두 번째로, 연간 소진되는 경제적 비용이 최대 246조 원에 해당했으며, 이 중 노사갈등이 계층갈등에 이어 두 번째를 차지했다. 이전부터 이를 염두에 두고 있던 서울시는 노사갈등에 대한 실질적인 해결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2014년 11월 24일부터 ‘노동자의 이사회 참여를 보장하겠다’고 밝히고, 이후 약 1년 8개월 동안 각계의 의견을 수렴해 서울시 노동이사제 모델을 구축했다.

2016년 9월 26일, 박원순 서울시장이 지방자치단체 최초로 노동이사 관련 조례를 제정하여 서울시 산하기관을 대상으로 노동이사제를 도입하면서, 2017년 1월부터 2020년 1월까지 17개 기관에 22명의 노동이사가 임명됐다. 시행 당시 서울시 산하 투자출연기관 이사정수는 정원 300인 미만 사업장의 경우 1명, 300인 이상 사업장의 경우 2명으로 지정했으며, 정원 100명 이상인 기관의 경우 의무적으로 노동이사제를 도입하도록 했다.

서울시 조례에 따라 서울시 산하기관에서는 노동이사가 기업 최고의사결정기구인 이사회에 비상임이사로 참석해 의결권을 행사함으로써, 노동이 기업의 외부 경영에 직접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 됐다. 최근에는 서울시 노동이사제 모델을 기초로 한 논의가 광주광역시, 경기도, 인천광역시, 경상남도, 경기도 부천시, 부산광역시, 울산광역시 등 지방자치단체 등으로 확산되고 있다.

당시 서울시 노동이사제 모델 수립에 참여했던 박태주 고려대학교 노동문제연구소 선임연구위원은 노동이사제에 대해 “기업의 지배구조 개선과 전략적 의사결정에 노동이 참여하는 것”이라며, “(서울시 노동이사제 도입 이후) 노동이사가 이사회에 참가하게 되면서 제시하는 의견·질문 등으로 인해 이사회가 진지해지고 의사결정이 신중해졌다. 사용자 측에서 안건을 올릴 때 노동이사의 반응을 염두하고 선정하게 됐다”고 밝혔다.

서울시가 2020년 1월 발표한 노동이사제 운영성과 자료에 의하면, 설문 대상 이사 중 71%가 노동이사제 도입 후 경영의 투명성이 개선됐다고 응답했고, 69%가 이사회 운영의 민주성이 개선됐다고 답했으며, 40%가 노동조합과 사용자 간의 갈등 중재에 기여했다고 답했다. 또한 노동이사제의 도입 당시 일각에서는 경영권 침해나 의사결정 지연 등의 문제를 야기할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됐으나, 설문 대상 이사의 94%가 의사결정이 지연되지 않았다고 응답했다.

변춘연 서울농수산식품공사 노동이사는 “더 나은 결정, 더 효과적 결정을 위한 과정 속에서 문제제기가 되는 것이고, 문제제기란 조직 내 직원들의 이해가 있어야 하는 것”이라며 “기존 이사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노동이사가 문제제기를 했을 때, 결정을 미루고 밑에서부터 다시 검토하는 게 올바른 의사결정구조”라고 말했다.

변춘연 노동이사는 노동이사의 역할 수행을 위해 팀 단위로 직원들을 만나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누군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준다는 것만으로 굉장히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다양한 사람들의 입장에서 이해해보고, 이를 경영에 반영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며 “노와 사만 있던 기존 관계 속에서 노동이사가 제 역할을 다함으로써 거버넌스가 잘 이뤄질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이처럼 노동이사제 시행 이후 긍정적 효과가 있었던 반면, 현장에서 활동한 노동이사들의 요구를 기반으로 한 제도 개선의 필요성도 대두됐다.

박희석 서울교통공사 노동이사는 “일주일에 한 번, 1급 실장들이 들어가는 경영전략회의에서 회사의 중요한 방침 등이 결정되는데, 서울시 산하기관 노동이사 중 회의에 참여할 수 있는 노동이사는 손에 꼽는다”며 “노동이사제의 근본적인 목적인 견제와 감시 등에서는 노동의 참여가 이뤄지고 있지 않다”고 밝혔다. 이와 같은 맥락의 발언은 변춘연 노동이사로부터도 들을 수 있었다. 변춘연 노동이사는 “노동이사가 주로 상대하는 사람들이 사장이나 상임이사, 본부장 등이라 조직 내에서 지위가 낮으면 노동이사로서의 역할이 제약받게 되고 위축되는 사례가 있다”며 “위계질서를 중시하는 한국 사회에서 노동이사가 조직에서 어느 정도 지위를 가져야 더 원활히 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고 밝혔다.

서울특별시 투자출연기관 노동이사 협의회는 노동이사제 개선과 발전방안을 위해 2018년 3월 개최된 ‘노동이사제 한국형 모델 전문가 TF’ 1차 회의를 거쳐, 주요 쟁점인 ▲노동이사의 노동조합 조합원 자격 ▲노동이사의 직원 겸직 ▲노동이사의 권한 ▲노동이사 활동지원 등에 대한 개정안을 제시하면서 개선을 도모하기도 했다.

ⓒ 전국금융산업노동조합
ⓒ 전국금융산업노동조합

금융권의 ‘노동자추천이사제’ 추진

노동이사제를 노동의 직접적 경영참여라고 본다면, 노동자추천이사제는 간접적 경영참여라는 점에서 차이점을 둘 수 있다. 노동이사제의 경우 노동자나 노동자대표가 경영의사결정에 직접 참여하는 방식이지만, 노동자추천이사제의 경우 주로 노동조합이 추천하는 전문가가 기업경영의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방식이다.

금융권에 노동자추천이사제의 바람이 분 건 KB금융지주 사외이사 선임 건으로부터다. 2012년 당시 금융노조 KB국민은행지부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출신 김진 변호사를 노동조합 사외이사 추천 후보로 지정해 이사회에 진출시키려 시도했으나, 이는 결국 주주총회 안건으로 상정되지 못하고 부결됐다. 이후 2017년 11월 열린 임시 주주총회에서 KB국민은행지부는 우리사주조합과 함께 참여연대 출신 하승수 변호사를 사외이사 후보로 추천하고자 주주제안을 했고, 당시 주주총회에서 국민연금 등이 찬성하면서 전체 주주 17.7%의 찬성표를 얻었다. 이러한 변화의 시도는 세간의 화두가 되기도 했지만, 2018년과 2019년에 시도된 노동자추천이사제 도입은 번번이 무산됐다. 2017년 당시 KB국민은행노동조합에서 위원장을 맡고 있었던 박홍배 현 금융노조 위원장은 “당시 경영진은 이사회를 통해 노동조합이 추천한 이사에 대해 정면으로 반박·반대할 것을 권고하며 맞대응했다”고 회상했다.

국책은행 기준으로는 금융노조 기업은행지부가 가장 먼저 노동자추천이사제 도입을 시도했다. 2019년 2월 25일 기업은행지부는 박창완 정릉신협 이사장을 기업은행의 사외이사 후보로 추천했다. 기업은행지부가 노동자추천이사제를 도입하려던 배경에는 채용비리, 셀프연임 등에 대한 견제 목적이 있었다. 국책은행임과 동시에 시중은행의 성격도 함께 갖추고 있었던 기업은행은 정부가 지정한 관료 출신 낙하산 인사들의 전횡에 대한 대책이 없었으며, 은행의 수익성 추구로 인해 노동자들은 단기 성과주의에 내몰려야 했다.

김형선 기업은행지부 위원장은 “공공기관이나 대기업이 사외이사를 구성함에도 결국 공공기관 수장, 일반 회사 대표의 입김이 작용하고, 이들의 하수인으로 들어간 사외이사들이 이사회에서 어떤 역할도 하지 못한 결과가 사회적 피해로 이어지기 때문에, 누군가 이사회에서 다른 목소리를 내고 견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의결안에 대해 고민하지 않고 서명하고 가는 사외이사들도 있는데, 이러한 이사회를 견제해보고자 하는 사명감 있는 사외이사가 있으면 긍정적 작용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노동자추천이사제 추진 계기를 밝혔다. 이에 대해 최종구 전 금융위원장은 “다른 분야보다 먼저 금융권이 노동이사제를 도입해야 할 만큼 열악하거나 불리하지 않다”고 밝히면서 노동이사제에 대해 사실상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기도 했다.

근래에 노동자추천이사제 도입이 시도된 금융기관은 수출입은행이었다. 2019년 11월 1일, 사용자 측은 사외이사 후보 관련 노동조합 추천에 대해 수용했고, 사측 추천후보 4명과 노측 추천후보 3명을 기획재정부와 협의했다. 이후 기획재정부가 사용자 측에 2배수 임명 제청을 요구하면서, 이사후보추천위원회를 통해 최종적으로 사측 추천후보 3명과 노측 추천후보 1명이 후보자 명단에 올랐으나 후순위에 지정된 노측 추천후보는 임명되지 못했다. 신현호 수출입은행지부 위원장은 “기존 대표이사·전무이사·사외이사 등이 참여하는 이사후보추천위원회 내 외부인사 참여를 확대하는 등 공정한 위원 구성을 위해 내부 규정 재정립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앞서 제시한 서울시 ‘노동이사제’ 도입 사례와 금융권 ‘노동자추천이사제’ 도입 시도에는 공통점이 있다. 노동이 기업 최고의사결정기구 이사회에서의 발언권·의결권 행사를 통해 중요 의사결정에 참여해, 노사가 몸담고 있는 기업의 문제를 함께 풀어가자는 의미로 귀결된다는 점이다.

그러나 2016년 당시 노동이사제 도입을 두고 경영계에서는 “우리나라 경제체계나 현실을 도외시한 제도이기에 심각한 부작용과 피해가 우려된다”며 “노동이사제가 경영의 효율성을 저하시키고, 노사관계마저 악화시킬 것이라며 즉각 철회할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경영계의 이 같은 시각은 지금도 여전히 유지되고 있고, 노동이사제 도입을 시도하는 기관이나 기업이 넘어서야 할 과제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