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숙! 현장으로 돌아가자”
“김진숙! 현장으로 돌아가자”
  • 강한님 기자
  • 승인 2020.07.28 17:24
  • 수정 2020.07.28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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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진중공업 해고노동자 김진숙 복직투쟁 응원 기자회견
7월 28일 오전 11시 여의도 산업은행 앞에서 한진중공업 35년 해고노동자 김진숙 씨의 복직투쟁 응원 기자회견이 있었다. ⓒ 참여와혁신 강한님 기자 hnkang@laborplus.co.kr

“김진숙이 크레인에서 입었던 빨간 파카를 나에게 주며 ‘깨끗하게 드라이해서 가지고 오라’고 치사하게 말했지만, 나는 그 파카를 돌려주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김진숙은 파카를 입기 전에 사랑하는 조합원 곁으로, 현장으로 돌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_박문진 영남대학교 의료원 해고노동자

7월 28일 오전 11시 여의도 산업은행 앞에서 한진중공업 35년 해고노동자 김진숙 씨의 복직투쟁 응원 기자회견이 열렸다. 김진숙 씨는 1981년 10월 대한조선공사(현 한진중공업)에 한국 여성으로는 최초로 용접 일을 시작했다.

선각공사부 선대조립과 용접 1직으로 일하던 김진숙 씨는 집행부의 어용성을 폭로하는 ‘제23차 정기대의원대회의를 다녀와서’라는 유인물을 배포했다는 이유로 1986년 7월 해고됐다. 당시 스물여섯이던 그는 올해로 환갑, 정년을 맞았다.

7월 28일 오전 11시 여의도 산업은행 앞에서 발언하는 김진숙 씨 ⓒ 참여와혁신 강한님 기자 hnkang@laborplus.co.kr

김진숙 씨는 2011년에 한진중공업 정리해고에 반발하며 85호 크레인에서 309일간 고공농성을 진행하기도 했다. 이 때 운행을 시작한 희망버스는 그에게 상징성이 있다. 김진숙 씨는 10년 전 희망버스 손수건을 들고 “희망버스 타고 와서 눈물로 손을 흔들어주고 가시던 그 간절한 손짓들이 눈에 밟혀 버텼다”며 “또 한 번 기적을 만들어내고 우리 손으로 승리의 역사를 써보자”고 말했다.

이날 기자회견에서는 여러 연대발언들도 이어졌다. 김혜진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상임활동가는 “많은 분들이 그래서 희망버스 이후에 도대체 뭐가 달라졌냐고 묻는데, 우리가 달라졌다”며 “우리는 함께 산다는 게 무엇인지 알았고, 희망버스에 함께 했던 분들이 자신의 문제를 되돌아보게 됐다”고 했다.

끝내 눈물을 보인 김계월 공공운수노조 아시아나KO지부 부지부장은 “오늘 김진숙 동지를 만나면 뜨겁게 안아주고 싶었다”라며 “2020년이 되고 나도 해고자가 되어 길 위에서 인천공항으로 돌아가는 투쟁을 하고 있다. 김진숙 동지는 우리에게 역사를 이끄는 하나의 수레가 됐다”고 전했다.

심진호 전국금속노동조합 한진중공업지회 지회장도 “민주노총 지도위원 김진숙, 해고자 김진숙이 아니라 한진중공업 용접사 김진숙으로 돌아가야 한다”며 “김진숙 동지가 회사에 당당하게 나갈 수 있도록 만들 테니 끝까지 지켜봐 달라”고 선언했다.

문정현 신부가 기자회견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 ⓒ 참여와혁신 강한님 기자 hnkang@laborplus.co.kr

‘길 위의 신부’인 문정현 신부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자신이 노동자라는 걸 잊지 않고 버티겠다는 것이 지칠 만도 한데, 우리나라 노동자는 아무리 탄압받고 빼앗긴다고 하더라도 죽지 않는다”라며 김진숙 씨를 응원했다.

아래는 김진숙 씨의 발언 전문이다.

문 신부님 앞에 죄송스럽습니다. 어제가 환갑이었는데 산전수전 공중전에 항암전까지 겪으며 한 200년쯤 산 거 같은데 아직 60년밖에 안 살았나 싶다가도 환갑이라서 징그럽기도 하고 그랬는데 감옥에서의 생일도 크레인에서의 생일도 특별했지만 회사 정문 밖에서 여러분들의 축하를 받으며 맞는 생일도 각별했습니다.

환갑도 훨씬 전에 간경화로 돌아가신 엄마 생각도 많이 났습니다. 18살부터 공장생활을 하면서 온종일 욕을 먹고 뺨을 맞고 머리를 쥐어박히는 게 일상이었던 보세공장 시다부터 신문배달, 우유배달, 시내버스 안내양, 그러나 산업역군의 꿈을 안고, 잔업 좀 하면 30만 원도 넘는다는 조선소의 용접공이 되었습니다.

화장실이 없어 어둔 구석을 찾아 현장을 뱅뱅 돌고 식당이 없어 쥐똥이 섞인 도시락을 먹으며 떨어져죽고 깔려죽고 끼어죽고 타죽는 동료들의 시신을 보며 그 사고보고서에 ‘본인 부주의’라고 지장을 찍어주고 내가 철판에 깔려 두 다리가 다 부러졌을 때도 ‘본인 부주의’에 누군가 또 지장을 찍어주며 산재처리를 피하던 현장.

일이 너무 힘들고, 스물다섯 살짜리가 사는 게 아무 희망이 없어 죽으려고 올라갔던 지리산. 천왕봉에서 본 일출이 너무 아름다워 1년간 더 살아보자고 내려와 노동조합을 알게 됐고, 화장실이 없고 식장이 없으면 요구하고 싸워야 한다는 걸 알았습니다. 유인물 몇 장에 불순분자 빨갱이가 되어 해고된 세월이 35년. 박창수도, 김주익도, 곽재규도, 최강서도 살아서 온전히 돌아가고 싶었던 곳, 현장으로 돌아갈 마지막 시간이 남아있습니다.

항암을 하면서 하루 종일 토하며 서지도 못하고 눕지도 못할 때 이 힘든 걸 뭐하러 하나 싶다가도 이대로 죽으면 저승에 가서도 자리를 못 찾아 헤맬 것 같기도 하고, 희망버스 타고 와서 눈물로 손을 흔들어주고 가시던 그 간절한 손짓들이 눈에 밟혀 버텼습니다.

10여 년 전 희망버스 손수건입니다. 손수건은 다 헤지고 낡을 만큼 세월이 흘러 그 때 세 살이던 성민이는 6학년이 되고 초등학생이던 은서는 고등학생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한진 조합원들은 다시 고용의 위기 앞에 서 있습니다. 얼마 전 조합원 한마당에서 만난 조합원에게 불안하지 않냐고 물었습니다. “정리해고 투쟁을 몇 번이나 겪었는데 인자 만성이 돼서 개안심니다. 큰 싸움을 몇 번이나 했는데 또 못하겠심니까. 또 바짝 싸우면 되지요.”

이런 조합원들이 있어 전 걱정하지 않습니다. 새벽마다 목이 쉬도록 출근선전전을 하는 지회장과 간부들. 그리고 2011년 울고 웃으며 끝까지 함께했던 희망버스 동지들. 또 한 번 기적을 만들어내고 우리 손으로 승리의 역사를 써봅시다.

웃으면서 끝까지 함께 투쟁!

2020년 7월 28일 김진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