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부분실업은 [생계위협]이다
나에게 부분실업은 [생계위협]이다
  • 정다솜 기자
  • 승인 2020.08.17 00:00
  • 수정 2020.08.16 23: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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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용관계는 유지되지만 수시로 마주하는 일감 감소
‘시간’ 기준 실업 개념 도입 검토해야

커버스토리 ➍ 부분실업도 실업이다

각자 저마다의 절벽에서 버티고 있는 사람들

고용절벽을 막기 위한 정부의 노력이 이어지고 있지만, 코로나19 장기화 속 가팔라지는 고용절벽을 막기란 쉽지 않다. 8월호 커버스토리에서는 코로나19 이후 각자 저마다의 절벽에서 버티고 있는 사람들을 만났다. 실업을 다루지만, 실업에만 국한하지는 않았다. 계약해지로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은 청년, 코로나19로 인해 일감이 줄어든 노동자, 정부 지원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생계 문제로 눈앞이 캄캄한 노동자가 서 있는 절벽을 마주 보았다.

7년 차 장애인활동지원사 송명숙(가명·62) 씨는 올해 2월 초 일이 끊겼다. 센터는 “코로나19 확산 이후 일자리가 없다”며 이용자와 연결시켜주지 않았다. 6개월째 수입이 ‘0’원이지만 센터와는 고용관계가 유지되어 ‘실업급여’ 등 보호받을 수 있는 길은 없었다. '100인 미만 사업장' '고용보험 미가입자' 등 정부의 코로나19 지원대책 조건에도 들어맞지 않았다. 부분실업으로 인한 ‘생계위협’, 이 네 글자는 지금 명숙 씨의 삶을 갉아내는 중이다.

ⓒ 클립아트코리아
ⓒ 클립아트코리아

일복 많은 명숙 씨가
장애인활동지원사가 된 이유

명숙 씨는 건설노동자인 남편 박용철(가명·58) 씨와 경기도 어느 반지하집에서 산다. 8년 전, 명숙 씨는 특전사 출신에 건강 하나는 자신하던 남편이 자꾸 소화가 안 된다고 말하던 날을 기억한다. “그날이 김장하는 날이었는데, 이상하게 우리 아저씨가 자꾸 소화가 안 된다는 거야.” 이튿날, 생배를 곯다 일을 나간 남편은 명숙 씨에게 아침밥을 먹으려는데 도저히 목구멍으로 넘길 수가 없다며 전화했다. 당시 동네 배드민턴장에서 청소·관리 아르바이트를 하던 명숙 씨는 일을 마치자마자 곧장 남편과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에서 검사를 마친 뒤, 의사는 명숙 씨 옆에 앉아 있던 용철 씨가 환자인 줄도 모르고 위암이라는 진단을 대뜸 꺼냈다. “우리 신랑이 깜짝 놀라가지고, 안 그래도 하얀 사람인데 혈색이 아주 하얘지는 거야.” 바로 큰 병원으로 옮긴 용철 씨는 위와 비장을 크게 절개하는 수술을 받았다.

“이제 위가 없어져서 기름기 조금만 먹었다 하면 쫙, 뭐만 먹었다 하면 다 쏟는 거야. 살이 붙으려야 붙을 수가 없어.” 오른쪽 주먹을 든 명숙 씨는 검지 하나를 펴며 “튼튼하던 사람이 이렇게 빼- 말랐어”라고 말했다. 이후 일복 많은 명숙 씨는 더욱 일을 놓을 수 없었다.

그러다 7년 전, 친구가 중증장애인의 손과 발이 되어주는 ‘장애인활동지원사’라는 직업이 좋다며 소개해줬다. 명숙 씨도 괜찮겠다 싶어 15개 장애유형에 관한 안전교육을 비롯해 총 40시간의 이론교육을 받았다. 그는 교육 과정에서 “눈이 뜨였다”고 이야기했다. “내가 장애인의 존재 자체를 잘 몰랐어. 보이지도 않고, 신경 써서 본 적도 없는데 교육을 딱 받으니까 이 사람들을 알게 된 거지.” 명숙 씨는 뒤늦게 알게 된 그들을 도울 생각에 자부심이 차올랐다.
 

“밸난 사람들 다 만났어요”

이론교육을 받은 뒤 10시간 실습교육도 마쳐 하는데, 센터(민간 서비스중계기관)에서는 일이 별로 없다며 실습 기회를 주지 않았다. 겨우 어느 장애인자립센터에 들어간 명숙 씨는 실습 첫날부터 자립센터 이사를 돕고 청소를 했다. 사무실에서 시키는 대로 했더니 실습교육 시간은 채워졌다.

그 뒤 명숙 씨는 7년 동안 “밸난 사람들을 다 만났다”고 털어놨다. 첫 이용자의 집은 방에서 몰래 술을 마시기만 하면 중증장애를 가진 두 형제에게 욕하고 소리치며 울분 쏟아내던 엄마가 있는 곳이었다. 명숙 씨는 “아들 둘이 그러니 얼마나 답답했을까” 싶다가도 도무지 불편했다. 2년 정도 버티던 명숙 씨는 스스로 그만뒀다.

그 다음엔 집은 CCTV까지 달아놓고 온 가족이 명숙 씨를 감시하는 곳이었다. 온 가족의 빨래를 도맡았던 명숙 씨는 그 집에 출근할 때마다 “호랑이 아가리”에 들어가는 것 같았며 고개를 저었다.

이후 만난 20대 여성 이용자와 일은 꽤 즐거웠다. 주말에도 쉬지 못하고 틈만 나면 불려갔지만 괜찮았다. 85kg은 족히 나가는 이용자가 무거워서 그를 들고 옮기느라 팔꿈치가 다 나갈 정도로 골병이 들었지만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2년 6개월 정도 일하던 명숙 씨는 보호자에게 갑자기 해고 통보를 받았다. 장애인활동지원사 자격을 갖춘 보호자의 지인이 대신 일해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명숙 씨는 그동안 일터에서 부당한 일을 당하면 견디다 못해 제 발로 나와야 했고, 이용자의 한마디에 쉽게 잘려왔다.
 

6개월째 수입 ‘0’원
코로나19 이후 일 끊긴 명숙 씨

지난해 11월부터 맡은 이용자는 30대 여성이었다. 이용자와 운동하고, 목욕시켜주고, 밥 먹여주고, 설거지 등 집안일을 하며 하루 4시간씩 일했다. 그러던 올해 2월 초, 코로나19가 확산하던 시기에 명숙 씨는 몸이 이상했다. “머리가 너무 아프고 기침이 나니까 너무 깜짝 놀랐어요.” 그는 바로 보호자에게 몸이 아파 출근을 못하겠다는 문자를 남겼다. 답장이 없자 한 번 더 문자를 보냈고, 또 답이 없어 “그렇게 알겠다”는 세 번째 문자를 남긴 뒤 병원에 갔다.

그리고 그날 “난리가 났다.” 문자를 평소에 확인하지 않는다던 보호자는 명숙 씨가 말도 없이 일을 나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센터 사무실을 발칵 뒤집었다. “아주 벼락을 쳤는가 봐. 내가 미안하다고 했는데도 대화가 안 되더라고요.” 한 순간에 보호자와 틀어진 뒤 명숙 씨는 센터와 1년 단위로 계약해 고용관계는 유지됐지만, 그 길로 6개월째 수입이 없는 상황이다.
 

사실상 실업이지만,
실업급여는 받을 수 없어

일을 쉴 수 없던 명숙 씨는 2월부터 센터에 전화해 이용자를 연결해달라고 요청했다. 센터는 “코로나 때문에 일이 없다”며 미루다 일주일에 두 번 3시간씩 일할 수 있는 이용자를 소개해줬다. 한 달에 24시간밖에 일할 수 없어 월 30만 원도 벌지 못하는 자리였다. 생계 유지를 위해 한 달에 100만 원은 벌어야 하는 명숙 씨는 거절했다.

장애인활동지원사들은 최저임금 수준 임금을 받는다. 올해 장애인활동지원 수가는 1만 3,500원인데 수가에는 센터 운영비, 4대보험료, 주휴수당, 연차수당, 교육수당 등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김완수 공공운수노조 의료연대본부 장애인활동지원지부 사무국장은 "올해 내 근로계약서상 시간당 임금은 최저임금 8,590원에 주휴수당 1,720원을 더한 10,310원, 법에서 정한 기준에 1원도 더해지지 않았다"며 "장애인활동지원사들에게 최저임금은 사실상 최고임금"이라고 말했다. 

일이 급했던 명숙 씨는 센터에 전화해서 사표를 쓰고 다른 일을 알아볼 테니, 실업급여라도 받게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실업급여는 ‘비자발적 실업’, 쉽게 말하면 ‘해고’될 때만 받을 수 있기에 센터 입장에선 장애인활동지원사를 해고한 기록이 남길 꺼리기 때문이다. 다른 센터로 옮기는 방법도 있었다. 그렇지만 명숙 씨는 좁은 바닥에서 평판이 나빠지는 것을 걱정했다. “나는 그렇게는 안 살아왔거든. 매번 땀 뻘뻘 흘리며 시키는 일 한 번도 거절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일했어요.” 자발적 실업을 받아들이든, 다른 센터로 쫓겨나듯이 가든 모두 명숙 씨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였다.
 

온몸으로 버티는 생계위협
“나는 일을 안 할 수가 없어”

수입이 사라진 명숙 씨는 지금 생계위협을 온몸으로 “버텨내고” 있다. 가끔씩 동네 목욕탕에 일손이 부족할 때 탕 청소를 하고 카운터를 봐주며 2~3만 원씩 번다. 그사이 아플 때마다 주사로 버티던 왼쪽 팔꿈치도 5월에 수술해야 했다. 통증주사를 자주 맞아 팔꿈치에 석회가 쌓여 제거 수술이 필요했다. 아직 왼쪽 팔꿈치에 빨간 수술 자국이 남은 명숙 씨는 일이 끊긴 이후로 “시장을 거의 못 본다”며 그래서인지 "면역력이 떨어진 데다가 당 수치가 높아서 몸에 상처가 나면 영 아물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일을 안 할 수가 없어. 신랑이랑 둘이 아무리 반지하 살아도 먹을 건 먹어야지. 그래도 내가 근근이 100만 원 돈 벌면서 남한테 손 안 벌리고 그렇게 살았는데 이제 어떡하겠어.”

20년 전 융자받아 온 반지하집 이자와 대출이자로 30만 원에다 남편과 본인 앞으로 들어둔 각종 보험료도 줄일 대로 줄여봤지만 합쳐서 100만 원에 가깝다. 둘 다 고령에 남편이 위험 직종에서 일해서다. 부담되더라도 민간보험이 아니었더라면 영철 씨의 위암 수술은 물론 명숙 씨의 팔꿈치 수술도 엄두내지 못했다. 여기에 두 식구의 휴대전화 요금 등 기타 고정비와 식비·생활비를 합치면 최소 200만 원이 필요한데 현재의 소득으로는 버텨낼 수 없는 현실이다.

“돈이 나갈 데는 많은데 나올 덴 없어서 미치겠는 거야.” 명숙 씨는 미룰 수 없는 돈이 필요할 때 친구에게 손을 벌리고 딸이 용돈을 보내주면 갚고, 남편이 이따금 건설현장에 나가 일당을 받아오면 근근이 살았다. 그러다 5월에는 30년 전 식당일 할 때부터 한 달에 4만 원 정도씩 내오던 국민연금도 조기 해약하고 38만 원씩 매달 받고 있다. “나 이거 없었으면 큰일 날 뻔했어.” 최근 은행 대출도 받았다는 명숙 씨는 국민연금을 빨리 해약해서 아쉬운 마음보다 “당장 굶는 게 더 급했다"고 이야기했다.

공공운수노조 의료연대본부 전국활동지원사지부가 지난 5월 코로나19로 일이 끊긴 장애인활동지원사들의 생계대책 요구 기자회견을 열었다. ⓒ 장애인활동사지부
공공운수노조 의료연대본부 전국활동지원사지부가 지난 5월 코로나19로 일이 끊긴 장애인활동지원사들의 생계대책 요구 기자회견을 열었다. ⓒ 장애인활동사지부

‘부분실업’은 일상이자 현실

이용자의 말 한마디에 일을 잃으면 센터도 마땅히 보호해줄 방법이 없는 장애인활동지원사에게 고용은 유지되지만 일의 일부나 전부가 중단되는 ‘부분실업’은 일상이다. 그때마다 장애인활동지원사들은 센터가 이용자를 연결해줄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특히 코로나19 확산 이후 부분실업은 늘어났다. 이용자가 감염을 우려해 서비스를 중단하거나, 등·하교 등 사회활동을 지원하던 경우에는 서비스를 할 수 없어서다. 실제로 공공운수노조 의료연대본부 전국활동지원사지부가 전국 800여 곳 센터에 정보공개 청구를 한 결과 426개 기관에서 750명 정도가 코로나19 기간에 실직상태를 겪었다고 답했다.

고미숙 장애인활동지원사지부 조직국장은 “장애인활동지원사들은 일상적인 실업을 겪고 있으며 수입이 심각하게 감소해도 마땅한 보전책이 없는 상황”이라며 “코로나19로 인해 이용 중단 문제가 심각하긴 하지만 노조 설립 초기부터 가장 많은 상담을 신청하는 경우가 실업급여 문제였다”고 설명했다. 이어 “사업주들은 자발적 퇴사 처리 이상을 해주려고 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정부의 코로나19 관련 각종 지원책도 장애인활동지원사를 비껴갔다. 고용노동부는 자치단체 지역고용대응 특별지원, 고용유지지원금 상향 등을 통해 휴직, 실업 등에 처한 노동자를 지원하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고용보험 미가입자를 조건으로 걸거나 사업장 전체의 소득 감소율을 따지는 등 장애인활동지원사처럼 시간제로 개별서비스를 제공하는 노동자를 위한 대책은 빠졌다.

 

“부분실업 개념 도입해야”

부분실업은 장애인활동지원사만 겪는 일이 아니다. 요양보호사, 아이돌보미처럼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으면 수당이 없어지는 완전 시급제 일자리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사례다. 이처럼 현실에 존재하는 부분실업을 실업의 개념에 포함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꾸준히 나왔다. 특히 최근 플랫폼노동 등 불안정노동이 더욱 증가하고 있는 가운데 사회보험제도에서 부분실업에 대한 대비가 없을 경우 노동시장의 불안정성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네덜란드의 경우 ‘시간’을 기준으로 실업을 정의하고 있다. 실업급여와 돌봄휴가를 시간단위로 제공해 이른바 노동자의 ‘시간비례동등대우’를 보장하는 셈이다. 이승윤 중앙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한국 사회보장제도에는 부분실업 개념이 없어 상당히 사각지대가 많다"며 “그러다 보니 실업급여를 받지 못하는 사각지대 노동자들이 나쁜 일자리라도 빨리 노동시장에 진입하려는 경우가 잦다”고 지적했다. 이어 “현실을 더 가깝게 반영하는 부분실업 개념을 사회보장제에도 서둘러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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