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버스 제조의 산증인 대우버스, 65년 역사 뒤로 하나
국내 버스 제조의 산증인 대우버스, 65년 역사 뒤로 하나
  • 이동희 기자
  • 승인 2020.08.28 06:45
  • 수정 2020.08.28 0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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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신진공업사에서 자일대우상용차까지, 외길 걸어왔지만…
25일 전 직원에 해고 개별 통보 예고해 ‘발칵’… 정리해고 절차 밟아

우리에게 대우버스라는 이름으로 더욱 친숙한 자일대우상용차(이하 대우버스)가 정리해고 절차를 밟고 있다. 26일 금속노조 부산양산지부 대우버스지회(이하 대우버스지회)는 “25일 대우버스 사측이 전 직원에게 해고 개별 통보를 예고했다”고 밝혔다.

대우버스 노사는 지난 3월 대우버스의 대주주인 영안그룹 경영진의 울산공장 폐쇄 발표 이후 울산공장 폐쇄 및 구조조정으로 갈등을 겪은 바 있는데, 최근까지도 구조조정으로 노동조합과 실랑이를 벌였던 대우버스 사측이 최종 정리해고 통보를 내린 것이다. 이번 대우버스 정리해고에 대해 노동조합에서는 애초 경영진이 계획했던 울산공장 폐쇄가 현실화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대우버스지회에 따르면 최종 해고일은 10월 4일로 알려졌다. 대우버스는 그때까지 희망퇴직, 고용노동부 정리해고 계획서 신고, 정리해고 대상자에 대한 해고 개별 통보 등의 수순을 밟을 것으로 보인다.

대우버스는 ‘시민의 발’인 버스를 제조·판매하는 기업으로, 국내 울산공장 외에도 중국, 베트남, 코스타리카, 카자흐스탄, 대만, 파키스탄, 미얀마 등 7개 나라에서 해외공장을 운영하고 있다.

대우버스는 1955년 신진공업사로 출발해 지금의 자일대우상용차까지 65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기업이기도 하다. 긴 시간을 거치며 여러 차례 그 주인과 상호가 바뀌었지만, 오직 버스만을 만들어 버스 전문 생산기업으로서의 기술과 경험을 축적했다. 이번 정리해고로 대우버스 울산공장이 사실상 폐쇄 상황에 놓인다면 우리나라 버스 제조 역사의 한 축을 담당했던 대우버스의 65년의 역사도 함께 떠나보내야 한다.

대우버스는 앞으로도 국내에서 그 명맥을 이어갈 수 있을까? 대우버스의 지난 65년 역사를 되돌아보고 현재 대우버스 노동자들이 처한 구조조정 사태를 들여다보았다.

군용 폐차 재생조립으로 시작된
우리나라 버스 제조의 역사

대우버스 65년의 역사를 살펴보기 전에 우리나라 자동차산업 역사에서 버스가 등장한 시기를 짚어볼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 자동차산업의 역사는 1945년 광복 이후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해방 이후 우리나라에는 목탄자동차(목탄가스를 연료로 움직이는 자동차) 외에는 쓸 만한 자동차가 거의 없었다. 때문에 40년 말부터 시작된 부품공업과 정비업, 수리 및 재생업 정도가 미미하게 존재하는 정도였다.

이때 자동차 수리 및 재생을 위한 부품은 미군용 폐차로부터 얻었다. 이후 목탄차가 휘발유차로 개조되었고, 국내에 있던 자동차들의 부품이 미군용 부품으로 교체되는 등 수리 및 재생업이 널리 흥했다. 1945년 말부터는 미군정 당국에서 군용차와 관련 보수용 부품을 불하하기 시작하면서 자동차 보유 대수가 늘기 시작했다. 불하된 자동차들은 대부분 트럭이었다.

하지만 버스의 경우 군용이 없었기 때문에 부품을 얻기 어려웠다. 더군다나 1930년대 중반 이후 버스 증차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수명을 다한 버스는 계속 늘어났다. 1945년 말 1,156대였던 버스는 1946년 766대, 1947년 654대로 줄어들었다.

이때부터 이른바 ‘버스 재생조립’이 시작됐다. 이때의 버스는 트럭 등 군용 폐차를 불하받아 차체만 버스 형태로 만든 것으로, 설계기술과 제조기술 없이 망치로 철판을 두드려 핀 다음 이를 용접해 만들었다. 보통 5~6명의 작업자가 한 조를 이뤄 만들었는데, 이들 대부분 일제강점기에 정비업체 등에서 경험을 쌓은 사람들이었다. 이들 중에는 수요자가 있는 장소로 이동해 제작을 해주는 이동형 사업체도 있었다.

1950년 한국전쟁 시기에는 버스를 비롯한 대부분의 자동차가 군에 징발됐고 전쟁 중에 파괴됐다. 이때도 전쟁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온 군용 폐차를 재생조립해 버스 또는 트럭으로 개조했다.

“전쟁통에 쏟아져 나온 군용 폐차를 불하받아 망치로 드럼통을 펴서 버스, 트럭, 합승택시를 만드는 ‘군용 폐차 재생시대’를 맞은 것이다. 부서진 군용차 부속품들과 드럼통, 산소용접기, 망치들이 천막 속으로 들어간 후, 며칠 만에 자동차가 만들어져 나오는 것을 본 미군들은 깜짝 놀라며 한국 사람들은 신기(神技)를 가졌다며 감탄했다.” ―《고종 캐딜락을 타다》, 전영선 저, 인물과사상사(2010)

이처럼 우리나라 자동차산업은 재생조립을 통해 그 시작을 알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완성차에 대한 기반이 전무했던 당시 상황에서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지만, 현재에 와서는 국내 자동차산업 발전에 보이지 않는 기여를 했다고 평가되고 있다. 이 시기를 지나 1955년에는 우리나라 자동차산업 역사에 이름을 새긴 여러 업체들이 탄생한다. 대우버스의 뿌리인 신진공업사 역시 1955년 처음 세상에 등장했다.

65년의 역사,
신진공업사에서 자일대우상용차까지

신진공업사(1955~1965) 1955년 2월 대우버스의 뿌리인 신진공업사가 발족하고 1957년 신진공업㈜가 창립했다. 신진공업은 부산에서 자동차 부품 제작 및 정비 사업을 시작한 김창원, 김재원 형제가 만들었는데, 당시 신진공업은 자동차 정비와 함께 버스 재생조립을 주로 했다.

신진공업이 본격적으로 버스 제조에 뛰어든 것은 1958년 유엔 한국부흥기관(UNKRA) 계획에 따라 20만 달러를 배정받으면서부터다. 신진공업은 이 돈으로 현대식 공장 건설에 들어가 1960년 5월 신진공업 부산공장을 완공했다.

1962년에는 25인승 마이크로버스 ‘신진스타’ 생산을 개시했다. 신진스타는 그해 덕수궁에서 열린 산업박람회에서 상공부 장관상을 받기도 했다. 신진스타는 이전 버스들과 달리 규격화가 되어있고 승객을 많이 태울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폭발적인 인기를 얻은 신진스타는 1966년까지 2,000여 대나 생산됐다. 이는 신진공업이 버스 제조 능력을 인정받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이어서 1963년 6월에는 대형버스 ‘뉴스타’ 양산을 개시하고 같은 해 11월에는 소형승용차 ‘신성호’ 제작에 성공한다.

1964년 신진공업 국산 자동차 및 부품 전시회. ⓒ 국가기록원
1964년 신진공업 국산 자동차 및 부품 전시회. ⓒ 국가기록원
1965년 4월 19일 촬영한 신진공업 국산 자동차 생산공장 모습. ⓒ 국가기록원
1965년 4월 19일 촬영한 신진공업 국산 자동차 생산공장 모습. ⓒ 국가기록원

신진자동차공업㈜(1965~1972) 1965년 11월에는 새나라자동차를 인수하고 1966년 1월 신진자동차공업㈜로 상호를 변경했다. 이때부터 종합자동차 제조공장으로 허가를 받고 대량생산 체계를 갖추게 된다. 1966년 1월에는 토요타와 기술 및 부품도입 계약을 맺었으며, 그해 12월 신형 대형버스 ‘B-FB-50’을 출시했다. 1968년 부산공장에서는 9m급 버스 모델 ‘DB102L’을 생산해 약 4년간 4,049대를 생산했다.

지엠코리아(1972~1976) 1972년 6월에는 글로벌 자동차 브랜드 제너럴모터스(GM)와 합작해 지엠코리아를 설립했다. 지엠코리아는 현대자동차, 기아자동차, 아시아자동차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1973년 국내 자동차산업 대표 기업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다.

새한자동차㈜(1976~1983) 1976년 11월 지엠코리아에서 새한자동차㈜로 상호를 또 변경하게 된다. 1976년은 여러모로 의미 있는 해였다. 대우버스에 전성기를 가져다준 ‘BF101’ 전신 모델인 ‘BD101’ 리어엔진 버스(Rear-engine Bus, 엔진이 차 뒤쪽에 있는 버스)를 이집트로 첫 수출하는 쾌거를 이루기도 했다. 이후 BD101은 도시형 버스로 국내에 시판됐다.

1977년에는 대우그룹에 편입됐다. 편입 이후에도 꾸준히 생산을 이어갔으며 그해 BF101 생산을 개시했다. BF101은 튼튼한 내구성과 우수한 연비를 자랑해 국내 대우버스 전성기를 열어준 버스기도 하다. 1991년 단종 때까지 큰 사랑을 받아 당시 도시는 물론 시골에서도 BF101이 없는 지역을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

1976년 12월 28일 촬영한 새한자동차 공장 노동자 조업 모습. ⓒ 국가기록원
1976년 12월 28일 촬영한 새한자동차 공장 노동자 조업 모습. ⓒ 국가기록원

대우자동차㈜(1983~2002) 1983년 1월 대우자동차㈜로 상호를 바꾼다. 대우버스가 대우자동차 이름을 달았던 1980년대 후반은 국내 자동차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해 자동차의 대중화가 이루어졌던 시기다.

우리나라 자동차산업은 내수 시장 규모가 협소해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기 어렵다는 문제가 늘 따라다녔었는데, 1987년 자동차 대중화가 시작되면서 내수 판매가 자동차산업 발전을 빠르게 견인했다. 1988년에는 자동차 국내 연간생산 100만 대를 돌파하고, 자동차 보유 대수 200만 대를 돌파했다. 전체 자동차 내수 판매는 1986년 28만8,000대에서 1993년 143만6,000대로 증가해 7년 동안 연평균 증가율은 25.8%를 기록했다.

버스 판매도 빠르게 증가했다. 버스 내수 판매는 1987년 5만4,100대, 1989년 7만9,066대, 1991년 10만2,919대, 1993년 14만291대로 급격히 증가했다. 이에 발맞춰 대우자동차 시절 대우버스는 국내 버스시장을 석권해 나갔다.

그러나 1997년 외환위기가 닥치면서 짧은 전성기를 뒤로해야 했다. 당시 재계 3위였던 대우그룹이 해체되면서 대우자동차는 워크아웃 대상으로 지정됐다. 당시 정부는 대우자동차의 앞날을 두고 고심을 거듭했다. 재무 상황이 악화됐기 때문에 강도 높은 자구계획을 추진하더라도 독자 회생이 어려울 것으로 보았고, 공기업화도 바람직한 방법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반대로 청산을 하자니 청산가치가 너무 낮았다. 남은 방법은 해외매각뿐이었다.

정부는 곧바로 대우자동차 해외매각을 추진했고 GM-피아트 컨소시엄, 포드, 다임러크라이슬러-현대자동차 컨소시엄 등이 입찰의향서를 제출했다. 이중 포드가 우선협상 대상자로 선정됐으나 포드는 선정 세 달 만에 인수 포기를 선언했다. 정확한 이유는 발표되지 않았지만, 대우자동차의 경영 부실 규모가 너무 컸기 때문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후 채권단은 대우자동차에 대한 강도 높은 구조조정에 들어갔다.

대우버스㈜(2002~2013) 2년여 동안 이어진 대우자동차 사태는 2001년 9월 21일 GM이 대우자동차, 산업은행과 양해각서(MOU)를 체결하면서 일단락된다. 2002년 4월 GM이 채권단과 본계약을 체결하고 그해 10월 GM대우가 공식 출범했다. GM대우 출범과 함께 기존의 대우자동차는 GM대우, 대우인천자동차, 대우버스, 대우상용차 등의 사업체로 분할된다. 이중 버스에 특화된 사업체가 대우버스㈜다. 2000년대 중반 국내 버스시장에는 현대자동차, 기아자동차, GM대우(경급만 생산), 쌍용자동차(소형급만 생산), 대우버스 5사 체제가 확립됐다.

이후 대우버스는 2003년 3월 31일 영안모자㈜에 매각됐다. 대우버스는 영안모자로 편입된 후 중국 계림, 코스타리카, 파키스탄, 대만 등 해외법인 투자를 확대해 나갔다. 2004년에는 울산시와 투자양해각서(MOU)를 체결해 2006년 울산에 제2공장을 추가 건립했다. 이후 2010년 4월에는 부산공장의 생산 설비와 인력을 울산공장으로 완전히 통합했다. 그해 10월에는 150명의 연구 인력이 상주하는 기술연구소와 주행시험장을 울산에 추가 완공하기도 했다.

자일대우상용차(2013~현재) 대우버스 이름은 2013년 자일대우버스로 변경하기 전까지 사용했다. 이후 자일대우버스는 2018년 자일대우상용차로 또다시 이름을 바꿔 현재까지 사용하고 있다.

자일대우상용차 울산공장. ⓒ 자일대우상용차
자일대우상용차 울산공장. ⓒ 자일대우상용차

느닷없는 ‘울산공장 폐쇄’ 선언에
대우버스 노사 갈등 점화

대우버스지회에 따르면 지난 3월 30일 대우버스의 대주주인 영안그룹 경영진과 대우버스 사측 관계자는 노동조합과 면담을 가졌다. 면담에는 대우버스지회와 대우버스사무지회가 함께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경영진은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버스시장의 급변, 적자 누적 등 경영상의 어려움을 이유로 울산공장을 폐쇄하겠다는 입장을 노동조합에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기도 부천시에 위치한 본사와 부품 수출을 맡고 있는 KD(반제품 수출), 내수 A/S 부품 부서만 유지하고 연구 부문과 생산공장을 폐쇄, 해외법인 중 하나인 베트남공장을 대우버스의 주력 공장으로 육성해 베트남에서 제조한 차량을 역수입해 판매하겠다는 이야기였다.

이후 대우버스는 4월 울산공장의 하루 버스 생산 대수를 8대에서 6대로 줄였다. 6월 15일부터 19일까지는 울산공장 휴업에 들어갔으며 6월 22일에는 희망퇴직 시행을 공고했다. 7월 1일부터 8월 31일까지 추가 휴업을 진행했다. 계약직 노동자 35명도 계약해지 수순을 밟았으며 이후 계약직 노동자 24명을 추가 계약해지한 것으로도 알려졌다. 대우버스지회는 회사가 울산공장 폐쇄를 위한 TF팀을 구성하고 베트남 공장 증대를 위한 증설 작업지원을 지시했다고 주장했다.

7월 26일에는 대우버스를 상대로 제기한 ‘단체협약 위반 금지’ 가처분 신청에 대해 인천지방법원 부천지원이 “회사는 올해 12월까지 단체협약상 절차에 따른 노동조합과의 합의 없이 울산공장에서 생산하는 5개 차량을 베트남 및 기타 해외공장에서 생산하기 위한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고 결정하기도 했다. 대우버스지회는 국내에서 생산 중인 BS090, BS106 차종의 부품 KD가 정상적인 업무체제를 거치지 않고 본사에서 직접 부품 협력사에 발주를 냈다며 반발, 이는 단체협약상 합의사항을 위반한 것이라며 5월 26일 단체협약 위반에 따른 업무 중지 가처분 신청서를 제출했다.

또한, 대우버스지회는 회사가 고객사에 7월 이후 생산계획이 없다며 추가 주문을 받고 있지 않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대우버스지회는 사실관계 확인을 위해 고객사 중 하나인 KD운송그룹 관계자와 만나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었는데, 해당 관계자는 “(대우버스가) 울산공장을 해외로 이전하는 것으로 결정하게 되어 KD운송그룹에 대한 공급계획에 차질이 생겼다고 전했다”며 “금년 잔여 물량 208대를 베트남 공장에서 생산한 차량으로 구입해 달라고 부탁했다”는 이야기를 대우버스지회에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우버스의 해외법인 투자는 대우버스가 영안모자로 편입된 이후 확대됐다. 해외법인 투자 확대로 해외 수출 물량은 2011년 1,375대에서 2019년 52대로 점점 줄어들었다. 특히, 연 1,000대의 버스를 생산할 수 있는 베트남공장의 수요 증가가 연 30억 원 가까운 순이익을 내고 있어 대우버스가 베트남공장으로의 공장 이전을 검토하는 핵심 이유로 손꼽힌다.

반면에 해외 투자만큼 국내 투자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노동조합의 비판이 따른다. 대우버스지회는 “최근 미세먼지 등 환경문제가 확산되고 서울시를 비롯한 여러 지자체에서 친환경 버스도입을 발표하고 있으니 향후 버스시장 내에서 대우버스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서 전기버스 개발 투자를 해야 한다”는 취지의 요구를 2017년 단체교섭 요구안에 포함했다. 하지만 이 같은 노동조합의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2019년 전기버스 시장에서 대우버스가 판매한 전기버스는 단 10대였다는 게 대우버스지회의 설명이다.

그러나 노동조합이 제기한 여러 의혹에도 불구하고 대우버스 사측은 언론을 통해 “울산공장 폐쇄 계획은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대우버스 관계자는 21일 <참여와혁신>과의 전화 연결에서 “언론에 말할 수 있는 공식적인 회사 입장은 준비되지 않은 상태”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대우버스지회 관계자는 “회사에서는 처음 울산공장 폐쇄라고 하다가 최근 사업개편이라고 표현을 바꿔 사용하고 있다”며 “노동조합이 전달받은 것과 달리 울산공장 폐쇄가 아니라는 입장을 내고 있다”며 비판했다.

5월 18일 금속노조 부산양산지부 대우버스지회·대우버스사무지회가 울산시청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대우버스 울산공장 폐쇄 철회”를 요구하고 있다. ⓒ 금속노조
5월 18일 금속노조 부산양산지부 대우버스지회·대우버스사무지회가 울산시청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대우버스 울산공장 폐쇄 철회”를 요구하고 있다. ⓒ 금속노조

결국 ‘정리해고’ 단행
대우버스지회, “전체 487명 중 405명 정리해고 예상”

대우버스 노동자들에게 정리해고 소식이 전해진 건 25일이다. 25일 대우버스는 9월 1일 울산공장 가동을 앞두고 전 직원에게 해고 개별 통보를 예고했다. 9월 1일 출근하면 회사가 선정한 정리해고 대상자에게 개별적으로 해고 통보를 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최종 해고일은 10월 4일로 알려졌다.

대우버스지회는 해고대상자 선정 기준도 함께 공지했다고 밝혔다. 회사가 만든 선정 기준 조정안에 따르면 최근 3년간(2017~2019년) 인사고과 60%, 직급별/직능별 배분 20%, 직급별 재직 년수 10%, 나이 10%를 반영해 해고 대상자를 선정한 것으로 확인됐다.

노동조합은 정리해고 대상자를 405명으로 예상하고 있다. 앞서 대우버스 노사는 구조조정 관련 특별단체교섭을 세 차례 진행한 바 있는데, 지난 21일 3차 특별단체교섭을 앞두고 18일 회사가 노동조합에 제출한 구조조정안에는 대우버스 전체 인원 487명 중 405명이 정리해고 대상자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대우버스지회는 9월 1일 회사에서 통보할 정리해고 대상자가 이 숫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해당 구조조정안에 따르면 정리해고는 대우버스 본사와 해외주재원을 제외하고 울산공장을 중심으로 시행한다. 정리해고 대상자는 사무직 81명(비정규직 2명 포함), 연구직 50명, 생산직 254명, KD(반제품 수출)/부품 20명으로, 총 405명이다. 405명이 모두 해고될 시 울산공장에 남은 인원은 20명밖에 되지 않는다. 사실상 울산공장 폐쇄라는 게 노동조합의 지적이다. 대우버스지회 관계자는 “이제 노조에서 할 수 있는 건 투쟁밖에 없다”고 밝혔다.

자료 : 금속노조 부산양산지부 대우버스지회 제공
자료 : 금속노조 부산양산지부 대우버스지회 제공

희망퇴직도 시행한다. 이번 희망퇴직은 지난 6월에 이어 두 번째 시행하는 것으로, 1차 희망퇴직 기간에는 8명의 노동자가 희망퇴직을 신청한 바 있다. 2차 희망퇴직 신청은 29일까지다. 희망퇴직 위로금은 근속연수에 따라 차등 지급할 예정이다. 대우버스는 1차 희망퇴직 때와 달리 향후 회사 경영상황이 개선될 시 2차 희망퇴직자를 재고용 우선 대상자로 선정하겠다는 입장도 함께 밝혔다.

대우버스 노사는 21일 3차 특별단체교섭에 이어 28일 4차 특별단체교섭을 앞두고 있다. 회사는 노동조합에 발송한 관련 공문에서 “3차 특별단체교섭에서 회사가 경영상의 이유에 의한 해고의 불가피성에 대해 충분히 설명한 것으로 생각된다”며 “이에 회사는 회사가 제시한 해고 대상자 선정 기준에 대한 노동조합의 의견을 요청한다”고 밝혔다.

대우버스지회 관계자는 “노조에서는 회사에서 인원을 정해놓고 구조조정에 들어간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는 입장”이라며 “무엇보다 노동자 총고용이 보장이 중요하며 노동조합은 회사와 함께 살기 위한 노력과 고민을 아끼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