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③] 지역본부 앞에 놓인 허들은
[커버스토리③] 지역본부 앞에 놓인 허들은
  • 임동우 기자
  • 승인 2021.06.08 10:04
  • 수정 2021.06.08 11: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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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장에 갇힌 노동조합
인력·재정 부족 … 지역본부 사업 추진 난항

지역은 희망을 싣고

천 하나를 짜기 위해 무수한 씨줄과 날줄이 베틀 위에서 쉼 없이 교차한다. 가로 줄과 세로 줄을 뜻하는 순우리말인 씨줄과 날줄은 흔히 상호 보완하는 관계를 비유할 때 쓰이곤 한다. 한국 노동운동을 이끌어온 씨줄이 산별조직이라면 날줄은 지역본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동안 지역본부는 산별 차원에서 해결하기 어려운 노동 현안을 ‘지역’이라는 공간을 토대로 현장 노동자와 밀착하며 포용해왔다.

4차 산업혁명 시대가 도래하면서 기존 산업구조는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변화의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노동의 측면에서도 노동조합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울타리 밖 노동자가 늘어가고 있는 가운데, 새로운 과제에 당면한 지역본부를 조명해본다.

커버스토리 ➌ 무엇이 지역본부를 가로막는가

ⓒ 참여와혁신DB
ⓒ 참여와혁신DB

흔히 지역본부를 지역의 ‘컨트롤타워’, ‘다리’로 비유하곤 한다. 사업장 현안을 지역이라는 이름 아래 한데 묶을 뿐만 아니라 지역 현안에 시민사회와 노동조합이 연대할 수 있도록 길을 놔주는 역할도 하기 때문이다.

인권운동가 안젤라 데이비스(Angela Davis)는 ‘벽을 밀면 문이 되고, 눕히면 다리가 된다’는 명언을 남겼다. 안젤라의 말처럼, 이해관계가 다른 주체 사이의 벽을 밀어 문을 만들고, 벽을 눕혀 다리를 만드는 역할은 지역본부의 몫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지역본부의 역할은 잘 조명되지 않는다. 지역본부가 추진하는 사업이 더디게 진행되는 탓이기도 하다. 지역본부를 더디게 만드는 허들은 과연 무엇일까?

사업장에만 집중되는
노동조합 역량

한국 사회가 노동조합을 바라보는 시선은 어떨까? 노동조합은 노동자를 지켜주는 울타리일 뿐만 아니라 궁극적인 목표로서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을 외치며 인간다운 삶을 지향한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노동조합을 소속 사업장의 임금 및 처우개선 목적만을 가진 단체로 한정해 바라보고 있다.

안병순 구로지방자치시민연대 위원장은 5월 25일 열린 ‘노동-풀뿌리 단체 좌담회’에서 “노동조합이 단체교섭이나 임금협상에 전체 조직역량을 지나치게 소진시키고 있고 오랜 기간 함몰돼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며 “노동조합이 사회적 책무를 신경 쓰지 않고 사유화·고립화되는 폐단을 낳으면서 한 단계 성장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처럼 사업장 현안에만 몰두하는 노동운동 방향은 소속 조합원이 사회 전반의 문제에 개입하기 어렵게 하고, 지역본부의 활동과 목적, 존재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상황으로 이어진다. 시민사회와 연대하며 지역사회 내 구심점을 구축하는 지역본부가 가야 할 길은 멀고도 험난하기만 하다.

5월 25일 오전 참여연대 느티나무홀에서 열린 노동-풀뿌리 단체 좌담회 ⓒ 민주노총 서울지역본부
5월 25일 오전 참여연대 느티나무홀에서 열린 노동-풀뿌리 단체 좌담회 ⓒ 민주노총 서울지역본부

‘탑다운’ 말고, ‘바텀업’

대다수 조직의 집행부 구성은 선거를 통해 결정된다. 선거를 통해 구성된 집행부는 지지층에 따라 사업 방향이 달라진다. 이는 지역본부에도 해당하는 말이다. 예를 들어, 한 지역에 특정 산별조직의 조합원 비중이 높을 경우 해당 산별조직에서 출마한 후보자가 당선돼 집행부를 꾸릴 확률이 높다. 선거 과정이 조직 간 갈등으로 번질 수 있고, 경쟁이 심화될 경우 거버넌스(Governance)를 구축해 다양한 목소리를 반영해야 하는 지역본부의 대의적 기능이 쇠퇴할 수 있다. 이 같은 선출 과정이 반복돼 특정 산별조직이 집행부를 장기적으로 운영하는 경우에는 사업 운영 방향에 대한 시야가 좁아지고 조직이 고착화돼, 지역이 가진 공동의 정서를 간과한 채 사업장 울타리 내 활동만을 반복할 가능성이 높다.

또 한편으로 중앙조직이 결정한 방향성과 지역의 현실이 충돌하는 경우에도 지역본부는 곤란을 겪는다. 지난해 ‘코로나19 위기 극복을 위한 노사정 합의안’을 두고 내홍을 겪은 민주노총은 대표적인 중앙 차원의 사회적 대화기구인 경제사회노동위원회에 참여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이런 결정은 지역으로도 이어져, 각 지역마다 구성돼 있는 지역노사민정협의회에 참여할 것인지 여부에 대한 갑을론박이 이어지고 있다.

지역 내 이해당사자들 입장에서는 당면한 의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주체가 참여한 대화가 필요하다. 각 주체와의 지속적인 대화는 이해당사자를 대변하는 합의를 이끌어내는 자양분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총연맹의 결정을 지역본부에서 어떻게 구현할지를 두고 지역 차원의 사회적 대화기구라고 할 수 있는 지역노사민정협의회를 활용하자는 주장과 지역 차원의 사회적 대화기구에도 참여하면 안 된다는 주장이 맞서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민주노총 지역본부 관계자는 “지역본부가 산별조직을 넘어서 지역 공동의 의제를 이끌기 위해서는 중앙에서 지침을 만들어 내리는 탑다운(Top-down) 방식이 아닌 현장의 목소리로부터 시작되는 바텀업(Bottom-up) 방식이 활용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지역도, 지역본부도 재정자립도 낮아

<참여와혁신>이 전국에 분포한 양대 노총 지역본부를 대상으로 ‘사업 운영에 있어 가장 어려운 점이 무엇’인지 물었을 때 공통적으로 나온 단어 중 하나가 ‘재정’이었다.

우선 지역본부가 재정을 어떻게 마련하고 있는지 짚어볼 필요가 있다. 민주노총 지역본부는 재정 확보에 있어 총연맹 차원에서 하달하는 교부금에 크게 의지한다. 이 교부금은 총연맹이 가맹조직에서 거둬들인 의무금의 일부를 지역본부 예산으로 내려 보내는 것이다. 한국노총의 경우 각 지역본부의 자율성에 따라 지역본부가 조합비를 따로 받는 형식을 채택하고 있지만, 의무금 자체가 낮은 수준이다.

이외에 지역본부가 재정을 마련하기 위한 방안은 사업장별 사안에 따라 특별기금을 조성하거나 지자체와의 협력 사업을 꾸리는 정도에 그쳐 선택의 폭이 현저히 좁다. 이러다 보니 재정자립도가 낮은 지역본부가 대부분이다.

김영국 한국노총 인천지역본부 의장은 “조합원들이 산별조직에는 가입하지만 지역본부에는 가입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며 “빚쟁이가 돈 받으러 가듯이 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기 때문에, 사업장 문제 관련해서 지역 활동을 먼저 하고 문제 발생 시 지역에서 도와줄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며 가입을 부탁하곤 한다”고 말했다.

김태영 민주노총 경북지역본부 본부장은 “노동자의 문제를 드러내고 사측을 만나서 문제를 같이 해결해나가는 일련의 과정이 필요한데, 지역본부가 포괄하는 범위가 넓다 보니 시간이나 비용적 측면에서 어려움이 있다”고 말했다.

사업 확장? ‘사람’이 먼저다

연령별 이동률 (자료=통계청)
연령별 이동률 (자료=통계청)

통계청이 발표한 ‘2020 국내인구이동통계 결과’에 따르면, 수도권(서울·경기·인천) 순유입률이 높게 나타났는데, 이는 경기도 유입 인구가 급격히 증가한 점이 가장 큰 이유다. 경기도 유입 인구 16만 8,373명 중 가장 많이 유입된 연령은 30대(4만 5,067명)였고, 20대(3만 9,191명)가 뒤를 이었다. 해당 통계 자료는 한국 사회 및 경제에 주역이 될 청년인구가 수도권에 집중되고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청년인구 유출은 지역 내 구심점으로 역할 해야 하는 지역본부에게 큰 고민거리다. 이길우 민주노총 대구지역본부 본부장은 “미래 산업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데 관련 일자리가 없다. 도시가 계속 노후화되다 보니 청년을 어떻게 잡을 수 있을 것인지를 두고 지역 전체적으로도 고민이 많다”고 밝혔다.

김영태 한국노총 대구지역본부 사무처장은 “지역 산업이 몰락한 상황에서 청년 인재들을 흡수할 여력이 부족하다 보니 대다수가 수도권으로 올라가고 있다”고 말했다.

지역본부 내 인력이 부족하다는 점도 문제점으로 꼽힌다. 대중조직으로서 보편적 가치와 권리를 지향하는 지역본부는 시시각각 변화하는 사회의 흐름에 따라 사업의 지평을 넓혀야 하지만 현재의 인력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게 현장의 목소리다.

김진억 민주노총 서울지역본부 본부장은 “타임오프 시행 이후 전임자 숫자가 확 줄었는데, 일은 더 많아져서 지역본부의 역할과 활동에 있어 여력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윤부식 민주노총 전남지역본부 본부장은 “단위조직의 간부를 겸하면서 지역조직 활동을 하시는 분들은 현업에 종사하는 와중에 자발적으로 휴가를 써가면서 활동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다수의 지역본부는 해당 지역에 노동상담소를 꾸려 사업장에서 벌어지는 노동자의 고민을 듣고 법률상담을 해준다거나, 노동 교육을 실시하는 등 활동을 진행하고 있다. 구성원 한 명이 두세 가지 역할과 직책을 맡는 지역본부에서 추가로 사업을 확장할 경우, 시의성에 맞게 사업을 구축하기 어렵다는 점이 한계로 작용한다.

또 노동과 관련된 전문 인력이 부족해 지역본부 차원에서 대응하기 어려운 지점도 있다. 노동 현안에 대한 전문성을 갖춘 인력은 주로 중앙에 배치된 경우가 많고, 동시에 지역 현안까지 포괄할 수 있는 인력을 발굴하고 육성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다.

조순호 한국노총 제주지역본부 의장은 “지역본부를 운영할 때 시·도 정책에 대해 방안이나 아이디어를 낼 수 있는 전문 인력이 있어야 하는데 미흡하다”고 토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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