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⑥] 사업장 울타리를 넘어 서로의 울타리가 되자
[커버스토리⑥] 사업장 울타리를 넘어 서로의 울타리가 되자
  • 강한님 기자
  • 승인 2021.06.08 10:05
  • 수정 2021.06.08 17: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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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된 힘으로 대변해야 할 지역 노동 의제
조합원이 스스로 지역 바꾸는 경험 쌓아야

 

지역은 희망을 싣고

천 하나를 짜기 위해 무수한 씨줄과 날줄이 베틀 위에서 쉼 없이 교차한다. 가로 줄과 세로 줄을 뜻하는 순우리말인 씨줄과 날줄은 흔히 상호 보완하는 관계를 비유할 때 쓰이곤 한다. 한국 노동운동을 이끌어온 씨줄이 산별조직이라면 날줄은 지역본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동안 지역본부는 산별 차원에서 해결하기 어려운 노동 현안을 ‘지역’이라는 공간을 토대로 현장 노동자와 밀착하며 포용해왔다.

4차 산업혁명 시대가 도래하면서 기존 산업구조는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변화의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노동의 측면에서도 노동조합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울타리 밖 노동자가 늘어가고 있는 가운데, 새로운 과제에 당면한 지역본부를 조명해본다.

커버스토리 ➏ ‘내 사업장→지역 전체 노동자’ 지역본부는 안내자

지역본부는 지역의 노동조합들을 잇는다. 개별 노동조합이 마음을 먹으면 지역본부를 통해 다른 사업장 노동자와 연대하고, 지역사회 의제를 함께 풀어갈 수 있다.
지역본부 운영이 어려운 건 사실이다. 워낙 인력과 예산이 부족한데다가, 각 지역이 처한 상황도 다르다. 총연맹에서 내려오는 사업도 해야 한다. 하지만 어렵다는 말에 그치면 머무르게 된다. 지역본부와 조합원이 함께하는 경험이 쌓이고, 노동조합이 하나둘 사업장의 울타리를 넘는다면 지역본부는 보다 두터운 ‘날줄’이 될 수 있다. 지금의 울타리는 나의 노동조건에만 관심을 가지려는 마음이다. 이 울타리는 지역 전체로 넓어질 수 있다.

2020년 인천차별철폐대행진에 참여한 조합원 ⓒ 노동과세계

지역본부,
지역의 이해당사자를 안내하려면

“산별노조가 주요하게 조직돼 있는 나라들 같은 경우는 거기서 결정하는 게 하나의 사회적 협약이 돼요. 그런데 한국은 단위사업장에서 임금이나 노동조건을 결정하면 그 사업장 안에 머물러버려요. 그것들을 지역의 가이드라인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건 결국 지역조직이 할 수밖에 없는 거거든요. 우리는 지금 당장 안 된다고 해서 영원히 안 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가이드라인을 보편적으로 굳히면 한국이 일하는 사람이 살기 좋은 사회가 되지 않겠습니까?”

김태영 민주노총 경북지역본부 본부장은 “지역 단위 현장의 노동조건이 좋아질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 그리고 조직된 노동자로 포괄되지 않는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을 향상시키는 지향점을 가지는 것”이 지역본부라고 말했다.

익명을 요청한 한국노총 강원지역본부 관계자도 “기존 조합원을 위한 노력은 하지만, 앞으로는 큰 노동조합뿐만 아니라 플랫폼 노동자나 이주 노동자 등 노동조합이 없거나 조직이 작은 노동자를 위한 활동을 찾아봐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아직까지 우리나라의 노동조합 조직과 활동은 단위사업장 중심이다. 조합원이 된 노동자들은 스스로 권리를 만들어나가려 애쓴다. 그런데 단위사업장 노동조합이 다른 노동자들에게 관심을 가지기는 쉽지 않다. 당면한 사업장의 현안을 해결해나가는 데도 벅차기 때문이다.

지역본부는 안내자다. 조직된 노동자를 사업장 밖 전체 노동자에게로, 노동조합이 없는 노동자를 노동조합으로 안내한다. 지역 노동자에 대한 책임을 정책으로 질 수 있도록 지방정부를 안내한다.

하고 싶은 일이 많은 지역본부에게 여력을 만들어줄 필요가 있다. 지역의 투쟁 사업장을 지원하고, 총연맹의 결정도 집행하는 지역본부는 자체적인 사업을 쉽사리 시도하기 어렵다. 지역본부는 총연맹이 지역본부의 활동을 지지해주기를 바란다.

조순호 한국노총 제주지역본부 의장은 “지역본부의 상황을 나아지게 하려면 노총 중앙의 인력을 조금이나마 지역으로 보내줘야 한다. 노동조합 전문가가 있으면 아이디어나 방안을 들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윤종해 한국노총 광주지역본부 의장도 지역본부에 총연맹 차원의 인력이 필요하다는 것에 말을 보탰다. “지역 조직화를 하려고 해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많이 없다. 인력을 지원해서 같이 활동해주었으면 한다”는 공감이다.

산별지역조직이 노동조합 울타리 밖 활동에 적극적으로 연대해줬으면 한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여기서 말하는 산별지역조직은 산별노조·연맹 안에서 지역으로 편제되는 지역조직(예를 들면 금속노조 경기지부, 금속노련 경기본부 등)이다. 산별조직도 총연맹처럼 각 지역에 지역조직을 두고 있다. 임기환 민주노총 제주지역본부 본부장은 “지역 노동자들을 위한 창의적인 사업을 기획하는 것 자체가 어렵다. 인력과 재정을 정말 획기적으로 늘리는 게 급선무”라면서도, “조직된 산별이나 노동조합들이 지금과는 좀 다르게 생각해야 한다. 산별지역조직들이 지역 노동자들과 할 수 있는 사업을 같이 제대로 하면 좋겠다. 지역노동의 의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정말 같이 힘을 모으는 게 우선”이라고 했다.

 

지역본부가 만들어낼
‘작은 참여’

조합원의 관심이 부재해서 지역본부는 전전긍긍한다. 조직된 노동자들도 지방정부도 지역본부는 잘 주목하지 않으려 한다. 이 상황에서 지역본부는 어떤 사업을 해나가야 할까? 지역본부 간부들이 왜 지역에서 활동을 시작했는지에 힌트가 있다.

“저는 이 지역에서 태어나서 자랐기 때문에 노동조합도 여기서 시작을 했어요. 사실 어찌 보면 저는 혜택 받은 사람이거든요. 노동조합도 있는 사업장이고 정규직이고. 근데 지역에서 같이 일하는 대다수 노동자들은 기본권조차 누리지 못하는 상황이에요. 산별은 이미 조직된 사업장들의 현안 때문에 쉽지 않죠. 지역본부가 해야 하고 또 할 수 있는 역할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제가 단위사업장에서 노조할 때는 사실 조직 외부로 눈을 못 돌렸던 것 같아요. 관심은 가지고 있었는데. 그러다 조직된 노동자도 있지만, 조직되지 않은 노동자 전체를 어떻게 봐야 할 것이냐는 고민이 생긴 거죠.”

“저는 기아자동차 판매 소속이었는데, 어찌 보면 기아차는 한국사회의 보편적 기준으로 봤을 때 노동조건 등이 양호한 편이잖아요. 노동조합 덕분이라서 그런가. 기아차 같은 사업장과 비교했을 때 지역에 소규모로 존재하는 노동자들, 노동조합이 없는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은 사실상 후진국이라고 칭해도 될 만큼 열악한 게 사실이거든요. 열악한 처지에 있는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할 수 있도록 지역 활동을 해야겠다 이렇게 된 겁니다.”

이 세 사람은 사업장을 넘어 지역으로 왔다. 조직된 노동자였던 그들은 지역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 노동자들을 주목했다. 결국 지역본부는 이 공감대를 전체 조합원에게 설득해야 한다는 숙제를 가진다.

첫걸음은 노동조합이 같은 지역 다른 사업장의 현안에 연대하는 것일 수 있다. 예컨대 경남지역은 투쟁사업장이 많다. 한국지엠 창원공장, 한국산연, 사천 항공공단, 대우조선 등 대부분 금속노조 소속 사업장이다. 이 투쟁에는 금속노조뿐만 아니라 경남지역에 있는 산별조직이 모두 힘을 합쳐 돕는다. 시민사회단체들도 함께한다. 공동투쟁위원회의 중심에는 경남지역본부가 있다.

한국노총 지역본부는 노동조합 간부 교육·연수를 통해 서로 알아가는 시간을 정기적으로 가진다. 지역본부 차원에서는 모든 산별지역조직을 한자리에 모으는 연수가 가능하다. 김영태 한국노총 대구지역본부 사무처장은 “평조합원과 간부가 어울려서 서로를 알 수 있는 장을 만들어주는 것도 우리가 할 일이다. 각자의 역할을 알 수 있도록 다리를 놔주고, 다른 조직을 이해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4월 26일 양대 노총 대전지역본부를 포함한 53개 시민·사회단체가 대전광역시 노동정책 기본조례 제정 운동본부를 발족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 민주노총 대전지역본부

양대 노총 대전지역본부는 올해 시민사회단체와 ‘대전시 노동정책기본조례 제정 운동본부’를 꾸려 노동정책기본조례 서명운동에 돌입했다. 대전시는 아직까지 노동정책기본조례가 없는 ‘후발주자’ 중 하나다.

전근배 한국노총 대전지역본부 사무처장은 “노동자 대중을 제도권에서 지원해야겠다는 공감대는 지역에 형성돼 있다. 하지만 대전은 아직 노동자 보호지원을 위한 조례도 없다”며 “그래서 이번에 대전지역 양대 노총과 시민사회단체가 뜻을 모아 지속적인 지원이 이뤄질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다. 대전시도 진정으로 노동자와 대전 시민 전체를 위해 진일보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양대 노총 대전지역본부가 서명운동 방식을 택한 이유는 조합원과 시민이 지역을 바꾸는 데 참여하는 경험을 만들기 위해서다. 김율현 민주노총 대전지역본부 본부장은 “조합원들이 지역본부의 사업에 주인답게 참여하고 자신의 결실로 한두 가지 사업을 해내는 경험을 가지는 게 중요하다”며 “조합원들이 내 임금과 내 노동조건만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면 지역본부 활동에 의구심만 남는다. 노동조합이 없는 노동자들의 의제를 가지는 것이 결국 우리 사업장의 임금과 노동조건을 개선하는 것만큼 중요하다는 인식을 같이 만들어나가는 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양대 노총 대전지역본부의 주장은 조합원 개개인이 지역을 바꾸는 경험을 쌓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역 의제를 구체적인 사업으로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지역본부의 존재는 드러날 수 있다. 지역본부는 조합원이 직접 참여하는 방식으로 사업 설계가 가능하다. 지역본부는 조직된 조합원이 지역 현안에 관심을 갖고 참여할 때 힘을 얻는다. 지역본부들이 지역의 문제를 조직된 노동자들에게 알려 나갈 때 사업장에 갇힌 시야도 넓어진다.

 

지역의 문제는
노동의 문제

조합원뿐만 아니라 비조합원들도 쉽게 찾아오는 지역본부. 한 지역본부 간부가 바라는 지역본부의 모습이다. 조직된 노동자들끼리의 연대를 통해 사업장 밖으로 나왔다면, 시민과 만날 차례다. 노동조합은 지역의 풀뿌리단체 중 조직력이 높은 편에 속한다. 지역본부는 노동의제뿐만 아니라 지역의 시민사회단체가 제기하는 문제에도 자리를 지킨다. 그렇게 지역본부는 각 지역 대중운동의 구심점이 된다.

시민사회단체들과 연대하는 활동에서 노동조합 지역본부 간부들은 빼놓을 수 없는 인력이다. 한 지역본부 간부는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매번 공동상임대표나 공동위원장을 맡는다. 가끔은 내가 무슨 ‘공동’ 대표였는지 까먹을 정도”라며 웃었다.

시민은 결국 노동자이거나, 노동자였고, 노동자가 될 수 있다. 이들이 지역에서 겪는 문제는 다양하지만, 노동과 연결된다. 지역 내 집값이 폭등하면 아무리 임금을 인상해도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난개발은 지역 노동자의 생존권과 직결된다.

이인화 민주노총 인천지역본부 본부장은 “노동의 의제뿐만 아니라 사회적 의제가 너무 많다. 그런 의제들에서 노동자들이 시민권자의 한 사람으로 역할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조직된 노동자들의 사고도 더 확장돼야 한다고 본다”고 말했다.

사업장과 산별의 울타리를 넘어서면 무엇이 있을까. 거창한 뭔가가 기다린다기보다는 지역의 조직·미조직 노동자가 서로의 울타리가 될 것이라는 기대가 맞을 듯하다. 서로가 서로의 울타리로 지역에서 함께하고, 그런 지역들이 한국 사회 전반을 바꿔내는 것. 각 지역본부가 품고 있을 희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