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덜 내고 덜 받는 복지체제의 기원
[기고] 덜 내고 덜 받는 복지체제의 기원
  • 참여와혁신
  • 승인 2023.06.14 07:35
  • 수정 2023.06.14 07:3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글 김도균 제주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김도균 제주대 사회학과 교수

국가가 적극적으로 사회안전망을 제공하려면 어느 정도 재정 규모와 조세수입이 뒷받침되어야 할 것이다. 혜택을 많이 받으려면 그만큼 많이 부담을 질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하다. 복지국가의 대명사로 불리는 북유럽 국가들의 조세부담 수준이 국민소득의 절반 가까이 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 국민은 세금에 대한 거부감이 커서 증세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쉽지 않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북유럽 복지국가들처럼 많이 내고 많이 받는 시스템이 아니라 덜 내고 덜 받는 시스템을 갖게 되었을까? 한국 사람들이 유난히 세금에 대한 거부감이 커서 그럴까?

우리나라가 덜 내고 덜 받는 복지체제를 갖게 된 이유를 이해하려면 역사적인 맥락을 짚어봐야 한다. 그 뿌리는 적어도 국가 주도 산업화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960년대 국가 주도 경제개발이 한창일 때 정부는 경제개발을 위한 자금 마련을 위해 국세청을 신설하고 조세개혁을 추진하는 등 조세 동원을 위해 적극적이었다. 이러한 조세 동원의 결과 내국세수가 1965년부터 1969년까지 4년 동안 무려 5배나 증가하는 등 세계사적으로 유례가 없을 정도로 세입 규모가 빠르게 증가했다.

하지만 국가가 무리하게 세금을 거둬들이려 한 결과 심각한 사회적 반발이 초래됐다. 경제개발이라는 미명하에 세수 목표액을 달성하기 위해 세무서별로 할당액을 정하고 무리하게 징수하는 바람에 곳곳에서 마찰과 충돌이 빚어졌고, 1970년 전후로는 경제 불황도 겹쳐서 급기야는 상인들이 시장에서 철수하는 등 집단적인 저항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이렇게 세금을 둘러싸고 마찰이 극심한 상황에서 마침 1970년대 초반 터진 석유파동과 초인플레이션은 우리나라 조세제도의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서구 선진국들은 2차 세계대전을 전후로 해서 사회보장제도를 구축해 왔기 때문에 경제위기가 터져도 국가가 소득을 보장하는 방식으로 대응할 수 있었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는 물가가 폭등하면서 실질소득이 급격히 하락하는 상황에서도 정작 국가는 이러한 위기에 대처할 수단이 없었다. 선성장 후분배라는 구호하에 국가의 재분배 정책이 극도로 억제된 결과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가가 다급하게 꺼내든 수단이 소득세 감면 조치였다. 1974년 1월 14일 긴급조치 3호(정식명칭은 ‘국민생활의 안정을 위한 대통령 긴급조치’이며, 소위 1·14조치로 불린다)를 통해 소득 공제 규모가 대거 인상되는 조치가 취해졌다. 오일쇼크와 급격한 물가 인상에 대응해 유신정부는 인적공제, 근로소득공제, 특별공제 등을 통해 소득세 부담을 낮추는 방식으로 생계비를 보장하고자 했는데, 이 긴급조치로 근로소득세 납세자의 85%가 근로소득세를 전액 면제받게 되었다.

유신정부가 대폭적으로 소득세 감면 조처를 한 데는 석유파동으로 물가가 급격하게 증가한 것 말고도 유신쿠데타에 대한 정당성 부재와 북한과의 체제경쟁 등 정치적 요인도 크게 작용했다. 당시는 쿠데타 직후 반유신운동이 전개되는 등 유신체제의 정치적 정당성이 심각한 도전에 직면해 있었다. 또한 당시 북한이 직접세 폐지를 대대적으로 선전하는 상황에서 체제경쟁의 문제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초인플레이션으로 인한 실질소득의 급격한 감소는 심각한 사안으로 받아들여졌고, 사회안정을 위해 대폭적인 소득세 감면 같은 조치가 취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1974년에 긴급조치 형태로 취해진 소득세 감면은 이후로도 계속해서 소득공제가 소득보전의 중요한 정책수단으로 활용되는 계기가 되었다. 무엇보다도 소득세 감면 제도는 이후에 13월의 보너스라고 불릴 정도로 전 국민적 관심사가 되는 계기가 되었다. 긴급조치 이후로도 소득공제 확대를 통해 소득세를 한 푼도 내지 않아도 되는 근로소득세 면세점은 지속적으로 인상되어 왔다. 근로소득세 면세점 규모를 도시근로자 가계의 평균 소비 지출 규모와 비교해 보면 1974년 이전에는 근로소득세 공제 규모가 가계 소비 지출 규모에 크게 미달했다. 그런데 1974년 이후에는 상황이 바뀌어서 근로소득세 공제 규모가 평균 가계소비지출 규모를 능가하게 되고, 1970년대 후반에 이르면 평균 가계소득 규모도 넘어설 정도까지 확대되었다.

이러한 1970년대 이후 소득세 감면 논의 과정을 보면 각종 소득세 공제를 통한 생계비 보장과 생활 안정이 국가복지의 공백을 메우는 매우 중요한 정책수단이었음을 알 수 있다. 사회보장제도가 갖춰져 있지 않은 우리의 현실을 고려했을 때 소득세 기초공제를 통해 국민의 생계비를 보장해 줘야 한다는 주장이 팽배했다. 각자가 아플 때는 다 책임을 져야 하고 각자가 교육을 다 맡아야 되는 상황에서 의료비공제나 교육비공제를 통해 소득세 부담이라도 줄여 주는 게 국가의 당연한 역할이라고 주장되기도 했다. 국가도 이런 요구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사회보장제도가 부재한 상황에서 다른 나라에 비해 조세부담률이 낮다는 반론은 설득력이 없었고, 국가가 줄 수 있는 게 없다면 가져가는 거라도 줄여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었다.

이러한 과정을 살펴보면 우리는 근로소득세 면세점 제도가 복지국가가 부재한 상황에서 일종의 소득보장정책으로써 자리매김을 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덜 내고 덜 받는 복지시스템이 굳어진 계기는 산업화 과정에서 선성장-후분배 기조하에 복지지출을 극도로 억제하다 보니 조세제도가 어쩔 수 없이 소득보장의 역할을 떠맡게 된 것과 긴밀하게 연관된 것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1970년대에 복지국가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제도화되기 시작한 소득세 감면제도들은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다는 점에서 여파가 매우 크다. 소득세 감면은 민주화와 세계화를 거치면서 지금까지도 중요한 소득보전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 요즘도 1년에 한 번씩 하는 연말정산이 중요한 이슈가 되고 있다는 점이 이러한 중요성을 단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 박근혜 정부 때 소득공제를 세액공제 제도로 전환하려는 시도가 있었는데 이러한 시도가 심각한 반발에 부딪쳐 좌절된 것을 보더라도 1970년대 형성된 소득세 감면제도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 실감할 수 있다. 이렇듯 우리가 어떻게 해서 덜 내고 덜 받는 복지체제에서 살게 되었는지 역사적 맥락을 이해한다면 앞으로 더 내고 더 받는 체제로의 전환을 위한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 나가는 데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