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허리띠 졸라매고 저축해야 했던 시대
[기고] 허리띠 졸라매고 저축해야 했던 시대
  • 참여와혁신
  • 승인 2023.07.10 01:03
  • 수정 2023.07.12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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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도균 제주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김도균 제주대 사회학과 교수

지난 6월호에서는 한국사회가 덜 내고 덜 받는 복지체제를 갖게 된 이유를 살펴봤다. 산업화 과정에서 선성장-후분배 기조하에 복지지출을 극도로 억제하다 보니 오일쇼크 같은 경제위기가 발생할 때 소득세 감면 같은 조치가 요구됐고, 이러한 조치들이 반복되다 보니 덜 내고 덜 받는 복지체제가 고착화됐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공적 사회보장제도가 부재한 상황에서 어떻게 산업화의 충격을 감당해 왔을까? 보통 한국사회가 복지국가 없이도 산업화 시기를 잘 헤쳐 나올 수 있었던 이유로 가족의 역할이 꼽힌다. 가족주의가 워낙 강해서 국가의 도움 없이도 서로 어려움에 처한 가족 구성원들을 도와가며 난관을 헤쳐 나갈 수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한국사회에서 그동안 가족이 핵심적인 복지공급자의 역할을 떠맡아왔다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가족주의가 지속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경제적·물질적 기반이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당시 이러한 가족주의를 뒷받침했던 핵심 요소 중 하나가 저축이었다.

복지국가가 부재한 상황에서 당시 가족들이 기댔던 것은 저축이었다. 가계의 입장에서 저축은 생존을 위해서 불가피한 것으로서 저축은 주로 공적 복지가 포괄하지 못한 부분을 대체하는 복지수단 역할을 했다. 저축의 목적이 주로 자녀교육이나 주택마련, 노후대비 등 생애주기상 필요와 밀접하게 관련된다는 점에서 저축은 가족주의 생존전략을 뒷받침하는 매우 중요한 경제적 수단 중의 하나였다. 당시 대다수 사람은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환경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해서든 결혼해서 가족을 꾸리고, 주거공간을 마련하며, 아이를 낳고 기르고 교육하기 위해 아끼고 절약해서 저축을 해야 했던 것이다. 당시 노동자들의 생활수기를 보면 노동자들이 내 집 마련을 위해 영양실조에 걸려 가면서까지 저축한 사례들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런 사례들은 당시 사람들이 말 그대도 허리띠 졸라매고 저축해야 겨우겨우 생계를 꾸려 나갈 수 있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런데 당시 사람들이 허리띠 졸라매고 저축을 하게 된 데는 국가의 역할도 중요했다. 산업화시기 한국의 저축률이 매우 높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며, 한국 사람들은 여러 가지 어려움에 대비해 근면·저축하면서 살아왔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지적이 틀린 말은 아니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점은 당시의 높은 저축률은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가 산업화 과정에서 저축을 동원하기 위해 다양하게 저축장려정책을 추진한 결과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사실 한국사회는 19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가계저축률이 매우 낮아서 심각한 문제를 보였다. ‘빈곤의 악순환’이라는 말이 보여주듯이 한국사회가 산업화를 추진하는 데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난관은 낮은 저축률과 자본부족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있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가는 국민의 일상생활과 가정경제에 개입해 들어가기 시작했는데, 그 방식은 대체로 저축장려운동, 저축계몽 및 저축교육의 강화 같은 캠페인 방식이었다.

한국의 높은 가계저축률을 유교적 전통이나 문화적 요인으로 설명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는 사실과 다른 측면이 많다. 1960년대만 해도 저축률은 마이너스에 머물 정도로 극도로 낮았는데, 그 주된 요인 중 하나로 관·혼·상·제와 같은 전통적인 의례로 인한 낭비가 지목되었다. 따라서 국가는 다양한 캠페인과 계몽활동을 통해 가정경제의 모범적인 상을 제시했다. 또 근대적인 가정학 지식에 기초하여 의식주를 합리화하고 생활을 과학화하는 등 저축증대를 위해 생활개선을 강조했다. ‘가정의례준칙’을 만들어 이를 따르도록 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가계저축률은 빠르게 증가하지 않았다. 그 주된 이유는 경제성장과 투자촉진을 위해 정책당국이 저금리 정책을 유지해 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금리정책의 딜레마를 해소하기 위해 정책당국이 채택한 것이 저축에 다양한 보조금이나 세제혜택을 줘 가계저축을 유도하는 것이었다. 이 중에서도 특기할 만한 것은 1970년대 중반에 도입된 ‘근로자 재산형성저축제도’(이하 재형저축)이다. 재형저축은 아시아에서는 일본에 이어 두 번째로 도입됐을 정도로 매우 빨리 도입되었을 뿐 아니라 저축장려를 위한 구체적인 인센티브를 제공했다는 점에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1970년대 저축장려는 우리나라 복지자본주의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함의를 갖는다. 민간저축을 활용해 산업화를 추진함에 따라 경제성장의 과실이 조세에 기반한 재분배 형태가 아니라 저축에 대한 수익의 형태로 직접 국민에게 돌아가도록 메커니즘이 형성됐던 것이다. 당시 재무부 장관이었던 김용환은 중화학공업 부문에서 기업공개, 주식출자 등을 통해 민간저축을 동원할 경우 이를 통해 수익의 상당 부분을 직접 국민들에게 배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저축동원은 조세정책과 사회정책을 중심으로 하는 일반적인 재분배 메커니즘과는 매우 다르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리고 가계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저축동원전략의 결과 가계저축이 중요한 복지수단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가계저축이 공적연금과 같은 공공복지수단에 비해서는 미흡하다고 할 수 있지만 공적 복지가 부재한 상황에서 저축을 통한 생활설계와 재산형성은 생활의 안정성을 뒷받침하는 핵심적인 수단으로 발전하게 된다. 또한 저축률이 증가하는 등 가계저축이 가정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증가하게 되면서, 가계저축이 점차 삶의 안정성을 제공하는 수단으로 인식되기 시작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생명보험이나 민간보험 한두 개쯤 가입하는 것을 당연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러한 관행이 생기게 된 계기도 1970년대의 국가의 저축장려 정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