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가계저축에서 가계부채로
[기고] 가계저축에서 가계부채로
  • 참여와혁신
  • 승인 2023.11.20 12:02
  • 수정 2023.11.20 12:0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글 김도균 제주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김도균 제주대 사회학과 교수
김도균 제주대 사회학과 교수

외환위기가 한국사회에 끼친 가장 큰 충격이 노동시장 유연화와 고용 안정성의 훼손이라는 점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정리해고가 허용되면서 실업과 조기퇴직이 일상화됐고, 노동시장 구조조정은 노동자·중산층들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자극했다. 하지만 이러한 고용불안에 대처할 수 있는 공적 안전망의 확보는 매우 더뎠다. 예전에는 고용안정으로 국가복지의 공을 메울 수 있었지만 이와 달리 외환위기 이후에는 공적 복지의 확대에도 불구하고 공적 복지가 고용불안을 대체하지 못했다. 복지증세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부재한 상황에서 포괄적이고 보편적인 복지체제를 구축하는 데도 상당한 어려움이 따랐다.

이렇게 고용은 불안정해지는데 공적인 안전망도 부실한 상황에서 사람들이 기댈 수 있는 것은 부동산 등을 통한 자산 형성이었다. 이미 한국사회는 산업화와 민주화를 거치면서 저축으로 목돈을 마련해 집 한 채 장만하고 이를 불려 나가면 안정된 가족주의적 안전망을 구축할 수 있다는 경험을 한 바 있다. 외환위기와 복지국가의 지체는 이런 경향을 더욱 가속화했다. 고용조건은 불안정해지고 기대수명은 느는데 50대부터 노동시장에서 퇴출당할 가능성이 높은 상황에서 부동산 특히 아파트는 유일하게 안정된 대상이었다. 그러므로 노동시장에서 퇴출되기 전에 그리고 아직 경제적 여력이 있을 때 아파트 한 채라도 확보하는 것만이 불안과 위험에서 탈출하는 방법이었다.

게다가 외환위기 이후 금융개혁으로 은행에서 돈을 빌리는 것도 쉬워졌다. IMF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받아들인 결과 금융의 역할이 산업자금 조달에서 소비자금융 공급으로 전환되면서 은행들은 주택담보대출 등 가계대출을 중요한 영업 전략으로 택하게 됐다.

그 결과 가계부채가 급격히 증가했다. 주택, 특히 아파트가 본격적으로 자본이득을 바라고 대출받아 투자하는 대상이 됐고, 은행의 영업 전략은 이러한 경향을 부채질했다. 이에 따라 세계 최고의 가계저축률은 급격히 하락하는 대신 가계부채는 빠르게 증가하게 됐다. 현재 우리나라의 가계부채 수준은 세계적으로도 최고 수준에 해당한다.

이렇게 가계저축이 빠르게 가계부채로 대체됐지만 주목할 것은 가계부채가 맡은 역할이 산업화와 민주화 시기 가계저축이 맡은 역할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가계부채의 용도를 보면 20대와 50대에서는 각각 본인이나 자녀의 학비 마련 때문에 교육비 명목으로 빚을 진 경우가 많다. 20~30대에서는 전월세 보증금 마련을 위해, 그리고 30~40대에서는 내 집 마련을 위해 빚을 진 경우가 많다. 50대 이후에는 거주 주택 이외 부동산 마련이나 사업자금 관련 대출이 증가한다. 이는 조기퇴직에 대비하거나 노후 준비를 위한 것으로 보인다.

자영업 부채 증가도 주목할 만하다. 외환위기 이후 대거 정리해고와 명예퇴직이 진행되면서 직장에서 쫓겨난 많은 사람이 자영업을 생계의 대안으로 선택하게 됐다. 그런데 자영업을 하게 되면서 빚을 지고, 자영업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파산하는 경우도 증가했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자영업 부채 증가는 노동시장 유연화 및 부실한 사회안전망의 직접적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가계부채의 용도를 보면 가계부채가 생애주기상 부딪히는 다양한 욕구들을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돼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저축에서 부채로 형태만 바뀌었을 뿐, 가계저축 형태의 금융 의존성이 가계부채 형태의 금융 의존성으로 전환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사실 가계부채 증가는 전 세계적인 현상이고, 이런 맥락에서 한국사회의 가계부채 증가를 좀 더 일반화된 맥락에서 평가해 볼 수 있다. 서구의 고소득 국가들에서도 세계화와 금융화가 진행되면서 실질임금이 정체되고 복지국가가 축소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됐는데, 이런 상황에서 국가의 공적 지출이 아니라 가계부채가 중요한 수단으로 활용되기 시작했다. 금융기법의 발달로 노동소득이나 복지급여 대신 가계부채를 이용해 가계의 구매력을 지탱시켜 주는 것이 가능해졌고, 금융시장이 가계의 구매력을 지탱시켜 줌에 따라 국가는 사회안전망을 제공해야 한다는 책임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게 됐다. 즉 국가 대신 가계가 빚을 떠안고, 금융시장이 복지국가를 대신함으로써 사회적 안정과 질서를 유지하려는 노력들이 시도돼 왔던 것이다.

하지만 지난 20여 년 동안 가계부채가 급격히 불어나면서 이러한 해법이 과연 지속가능한 것인가라는 의문이 전 세계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특히 한국사회는 세계적으로도 손꼽히는 가계부채 규모로 인해 경제적·사회적으로 여러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 막대한 규모의 가계부채는 금리정책 등 거시정책 운영에도 어려움을 낳고 있다.

이보다 더 주목할 점은 가능하다면 빚을 져서라도 부동산을 구입하고, 여력이 된다면 다주택자가 되는 것이 생존전략처럼 인식되면서 사회 전체가 자산경제의 논리에 종속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는 것이다. 빚을 져서 생계를 유지하게 되면 채무자가 돼 신용평가와 리스크, 금융시장의 변동에 그대로 노출될 수밖에 없게 된다. 결국 투자자나 채무자로서의 정체성이 강화될 수밖에 없다. 주택 구입 혹은 생계유지를 위해 빚을 지게 될 때 임금노동자로서가 아니라 금융적 주체로 스스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경향이 강화되는 것은 불가피하다.

그런데 이렇게 노동자나 시민으로서의 정체성이 아니라 투자자나 채무자로의 정체성이 강화될 때 이것이 현재 한국사회가 직면한 불평등이나 분배 이슈를 둘러싼 사회적 합의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그것이 한국사회가 복지국가로 나가는 데 어떤 영향을 미칠지 주의가 요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