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부동산이 복지국가를 대체하기 시작하다
[기고] 부동산이 복지국가를 대체하기 시작하다
  • 참여와혁신
  • 승인 2023.09.06 07:21
  • 수정 2023.09.06 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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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도균 제주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김도균 제주대 사회학과 교수
김도균 제주대 사회학과 교수

지난 8월호에서 우리는 민주화 시기 분배갈등과 공평과세의 정치가 조세부담의 하향평준화로 귀결되는 과정을 살펴봤다. 대부분 노동자들은 매년 새해가 되면 소위 ‘13월의 보너스’를 받기 위해 연말정산으로 한 번씩 야단법석을 피우는데, 이러한 관행이 정착하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민주화 시기에 소득공제제도가 분배 갈등 해소 차원에서 적극 활용된 결과다.

반면 이렇게 조세부담이 하향평준화된 결과 복지국가 발전은 지체될 수밖에 없었다. 복지증세가 뒷받침되지 않는 상황에서 공적 복지의 확대를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대신 자산 형성 지원의 중요성이 커지게 됐다. 당시 산업화를 거치면서 자산 불평등은 점점 더 심각해지고, 특히 노동자들의 ‘내 집 마련’이 어려워지면서, 자산 격차 중에서도 부동산 격차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떠올랐다. 따라서 노태우 정부는 주택 200만호 건설을 통한 주거 문제 해결을 가장 중요한 정책 목표로 제시했다.

그런데 당시 주택 200만호 건설은 주거 문제 해결이 일차적인 목적이었지만, 이를 통해 자산 소유 중산층을 육성한다는 목적도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 특히 주택 200만호 건설을 계기로 아파트 한 채가 중산층 정체성을 형성하는 핵심 요소로 등장하게 되는데, 이는 민주화 이후 분배 갈등이 탈정치화되는 중요한 계기였다. 당시 아파트 분양 열기는 사회문제가 될 정도로 뜨거웠고, 아파트 한 채를 갖기 위한 청약예금이나 청약저축 경쟁 또한 치열했다. 이것은 당시 주거 문제가 심각했고 그만큼 내 집 마련에 대한 욕구 또한 강렬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분배 이슈를 오로지 아파트 한 채를 소유하는 문제로 국한시키는 효과도 있었다.

당시 《월간말》지에 실린 인터뷰 내용을 보면 중산층들이 “노정권에 반대하는 세력에 정치적으로는 동조하지만, 솔직히 말해 내가 투자한 증권에서 이익을 남기고 작은 아파트 한 채라도 구입할 때까지 만이라도 커다란 격변이 없었으면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중산층들이 “우리가 언제 월급으로 살아왔습니까”라며 본업은 제쳐둔 채 사무실에서도 증권과 아파트 이야기만 하는 세태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민주화를 계기로 한국사회가 점차 자산투자에 대한 학습효과가 쌓이면서 자산 가격 상승과 자본이 득에 집착하게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민주화 과정에서 중간층이 자산 형성에 몰두한 것과 마찬가지로 노동자들에게도 자산 형성은 안전망 확보를 위한 중요한 수단 중 하나였다. 노동자 자산 형성 지원 차원에서 정부는 주택 200만호 중 25만호를 근로자주택으로 건설하고, 기업이 근로자를 위해 임대주택 혹은 사택을 건설할 경우 국민주택기금의 장기저리융자, 조세감면, 택지원가공급 등 각종 금융·세제상 지원을 확대했다. 하지만 노동자들의 자산 형성을 도운 구체적인 수단은 무엇보다도 기업복지였다. 우리나라의 기업복지를 다른 나라와 비교해 보면 흥미로운 특징 중의 하나는 기업복지에서 주택 마련 지원이 차지하는 비중이 컸다는 점이다. 노동자 대투쟁 이후 기업복지에서 주택 마련 지원의 비중이 급격히 증가했으며, 사내근로복지기금을 통한 지원까지 고려할 경우 그 비중은 더욱 높았다.

기업 입장에선 노무 관리 차원에서 기업복지를 활용할 필요가 있었다. 1987년 이후 노사분규의 급증, 산업구조와 노동시장 변화로 인한 숙련 노동력 부족, 급격한 임금인상 등으로 기업 차원에서는 새로운 경영 전략이 요구됐는데, 이런 상황에서 내 집 마련 지원 중심의 기업복지는 노동력 정착을 위한 효과적인 정책 수단이었다. 노동자들 입장에선 중간계급과 경제적 심리적 격차를 완화하는 수단으로 기업복지가 중요했다. 한국사회에서 노동을 하는 것은 천박한 것, 천한 것으로 인식돼 왔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기업복지는 경제적·심리적 차원에서 노동계급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매우 중요한 수단이었다. 특히 주택 마련 지원과 학비 지원은 노동계급이 중산층 정체성을 갖게 되는 매우 중요한 수단이었다.

민주화 이후 중산층 육성대책의 특징은 재산 형성 지원을 통해 중산층을 자산 소유 계층으로 형성시켰다는 것이다. 재산 형성을 통한 중산층 육성은 적극적인 재분배 정책을 필요로 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중산층을 정치적으로 보수화시키기에도 유리했다. 게다가 재산 형성 지원과 관련한 제도들은 이미 산업화 시기 저축 동원 과정에서 도입됐던 것들이었기 때문에 민주화 과정에서 분출하는 분배 요구에 대응해 중산층을 육성하는 수단으로 손쉽게 전용될 수 있었다. 만약 1980년대의 분배 갈등과 주택 문제를 공공임대주택 등 공적 복지 확대를 통해 해결하려고 했다면, 이는 불가피하게 국가의 재정 지출을 크게 증가시켰을 것이다. 하지만 증세와 같은 비용 부담의 문제는 기득권 집단의 이해관계와 충돌하는 등 사회 전체적인 이해관계의 조정을 수반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정치엘리트들 간 협상과 거래에 의해 민주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정치 쟁점화되기는 어려웠다. 반면 내 집 마련이나 재산형성, 공공기금을 활용한 재원 조달은 사회구성원들의 재산권을 침해하지 않고서도 분배 갈등을 완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분배 문제를 탈정치화하는 유용한 수단이었다.

민주화 시기에 한국은 복지국가의 길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렸지만, 중산층 육성 대책과 기업 중심의 노동운동은 결과적으로 산업화 시대에 적극 활용됐던 소득공제와 자산 형성의 역할을 더욱 강화시키고 말았다. 오히려 주택 200만호 건설로 자가소유자 사회가 펼쳐지면서 본격적으로 부동산이 복지국가를 대체하기 시작했다. 일단 주택구입 자금을 마련해서 집 한 채 장만하고, 가능하면 다주택자가 되는 것이 중산층 전략으로 고착되기 시작하고, 이것이 가족 단위의 사적 안전망을 마련하는 표준적인 생활양식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