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새로운 사회적 합의는 가능할까?
[기고] 새로운 사회적 합의는 가능할까?
  • 참여와혁신
  • 승인 2023.12.20 08:25
  • 수정 2023.12.20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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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도균 제주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김도균 제주대 사회학과 교수
김도균 제주대 사회학과 교수

지금까지 기고를 통해 ‘자산 기반 복지’라는 관점에서 한국 복지자본주의가 걸어온 길을 살펴봤다. 어쩌다 한국사회에서 부동산이 복지국가를 대신하게 됐는지, 왜 다른 나라들에 비해 전반적으로 조세부담 수준이 높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조세에 대한 불만이 큰지, 왜 세계에서 저축률이 가장 높았던 나라가 외환위기 이후 세계에서 가계부채 수준이 가장 높은 나라가 됐는지 등 이 모든 문제들은 사실 한국 복지자본주의가 걸어온 길과 무관하지 않다.

어느 사회든 산업화와 시장경제가 몰고 온 파국에 대처하기 위해 나름의 방식으로 안전장치들을 마련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방식은 북유럽 국가들처럼 보편적 복지제도일 수도 있고, 우리의 경우처럼 자산 기반 복지일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가 걸어온 길과 해결책들은 현재 우리가 직면한 문제들을 풀어 나가는 데 상당한 어려움들을 야기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민주화 이행 과정에서 분배정의에 대한 요구가 정치화되지 못한 결과, 그리고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노동시장의 불안정성이 증가한 결과 한국은 지독한 승자독식 사회가 되고 말았다. 외환위기 이전에는 그래도 소득수준이 상승하고 자가 소유도 증가하면서 분배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는 듯 보였다. 하지만 외환위기로 일자리가 불안정해지고, 비정규직이 급격히 늘어나게 되면서 자산 의존적인 생활방식과 부동산에 대한 집착은 매우 불안정하고 취약한 시스템이라는 것이 금방 드러났다. 안정된 일자리를 구한 계층은 내 집을 마련하고, 사회보험에 가입돼 있어 노후나 실업, 질병 등 사회적 위험에도 대비할 수 있었던 반면, 일자리가 불안정한 계층은 내 집 마련도 어렵고, 복지 사각지대에 놓여 사회적 위험에도 그대로 노출되는 상태에 처하게 됐다. 승자는 모든 것을 차지하고 패자는 모든 것을 잃게 되는 지독한 승자독식 사회가 구조화된 것이다.

이렇게 양극화가 심화되는 상황에서 자산 기반 복지 규범은 세대를 거쳐 오히려 더욱더 강화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기성세대가 단칸방·사글세에서 시작해 영양실조까지 걸려 가면서 내 집 마련을 위해 고군분투했다면 현재 청년 세대들은 고시원과 반지하, 빌라 등을 전전하다 내 집 마련을 위해 영끌족이 되고 있다. 한국사회는 연봉 1억을 벌어도 서울에 집 장만하기 어려운 사회, 세습을 경유하지 않고서는 내 명의의 아파트에 살기 어려운 사회가 됐다. 최근에는 전세사기 문제가 불거지면서 그나마 내 집 마련의 사다리 역할을 하던 전세제도마저 무너지고 있다. 주거라는 가장 기초적인 권리조차 제대로 보장되지 않다 보니 전 사회적으로 불안과 좌절감, 박탈감, 두려움이 팽배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불안감은 부동산에 대한 집착을 더욱 강화시키는 경향을 초래하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불안감이 지배하는 불안사회에서 불평등의 심화는 복지국가에 대한 지지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 부동산이 생애 전반을 내리 누리는 불안감의 원천으로 작동하는 현실에서 젊은 세대는 빚을 내서라도 내 집 마련에 나서지 않을 수가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람들은 투자자로서 혹은 채무자로서의 정체성을 갖고 중요한 사회경제적 이슈들에 대해 매우 개인적이고 탈정치화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자산소유자들은 그들대로 자신의 기득권을 보호하기 위해 분배 이슈에 부정적인 태도로 일관하고 있지만 무자산 계층에서도 주택 마련이나 자본이득 등에 대한 집착이 강화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불평등의 심화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정치화되기보다는 ‘부자되기 신드롬’이나 영끌족이니 동학개미니 하는 식의 대중 투자 문화 담론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양극화와 승자독식 사회로의 경향이 심각해질수록 차별과 혐오도 점점 더 일상화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전부 아니면 전무가 돼버린 상황에서 내부자가 되기 위한 경쟁은 말 그대로 생존경쟁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생존경쟁과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연대와 배려는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넷플릭스 시리즈로 방영된 〈오징어게임〉에서처럼 게임에서 지면 죽을 수밖에 없고, 내가 살기 위해서는 남을 죽일 수밖에 없는 상황과 유사하다. 이렇게 대다수 사람이 현실을 〈오징어게임〉과 유사하다고 생각한다면 사회적 연대와 취약계층에 대한 배려 같은 사회적 가치는 설 자리가 없다. 오로지 생과 사를 결정짓는 게임의 룰은 공정해야 한다는 요구만이 득세할 것이다. 이것이 현재 한국사회에서 공정성이 첨예한 이슈가 되는 이유일 것이다.

맑스는 사회가 점점 양극화될수록 사회혁명은 불가피해지고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붕괴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하지만 20세기의 역사가 보여준 것처럼 사회적 양극화는 반대로 사회적 파국을 초래했다. 칼 폴라니가 《거대한 전환》에서 강조한 것처럼 시장경제가 기능을 멈춘 곳에서는 어김없이 파시즘이 번지고 혐오와 차별이 당연시됐다. 반대로 시장의 파괴력에 맞서 보호장치가 마련됐던 곳에서는 사회적 연대가 가능했고 사회적 파국도 모면할 수 있었다. 극단적인 생존경쟁에서 빗겨날 수 있었던 곳에서는 사회적 연대와 취약계층에 대한 배려가 가능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복지국가의 ‘탈상품화’ 효과라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한국사회가 걸어온 것과 같이 부동산에 너무 많은 것을 의지하고 있는 사회는 앞으로 지속 가능하다고 하기 어렵다. 부동산에 대한 의존성이 강화되면 강화될수록 승자독식의 경향도 강화될 것이다. 그러한 경향은 사회적 연대는 말할 것도 없고 아예 사회 자체를 파괴하고 말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분배와 재분배 문제를 둘러싼 새로운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 나갈 필요가 있다. 20세기 초반 스웨덴이 ‘국민의집’으로 가는 길을 개척했던 것처럼 한국사회도 ‘국민의집’을 위한 새로운 길을 찾아나가야 한다. 그 길이 비록 매우 험난할지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