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외환위기와 증세 없는 복지
[기고] 외환위기와 증세 없는 복지
  • 참여와혁신
  • 승인 2023.10.03 13:01
  • 수정 2023.10.03 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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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균 제주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김도균 제주대 사회학과 교수
김도균 제주대 사회학과 교수

외환위기를 계기로 한국사회는 급격한 단절을 겪었다. 경제적·정치적·사회적·문화적 차원 등 모든 영역에서 질적으로 다른 사회로 진입했다고 할 수 있다. IMF 등 국제기구와 재벌, 경제관료들이 구조조정을 강력하게 밀어붙인 결과 노동시장은 유연화됐고 고용은 불안정해졌다. 정리해고가 일상화되면서 평생직장이라는 신화는 깨졌고 비정규직은 급속도로 증가하게 됐다. 인구변동 차원에서는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을 정도의 초저출산 현상과 압축적 고령화가 진행돼왔다.

이렇듯 한국사회가 지금까지 겪어 보지 못한 사회적 위험들의 증가는 당연히 공적 복지에 대한 요구를 급격히 증가시켰다. IMF와 세계은행조차도 사회적 안전망의 취약성을 지적하고, 한국 정부에 실업자와 빈민을 위한 사회안전망 확대를 요구할 정도였다. 실제로 공적 복지 지출 수준도 빠르게 증가했다. 외환위기 직후에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가 도입된 데 이어 노인장기요양보험 제도가 도입되는 등 사회보험제도도 확장됐다. 또한 기초연금이나 무상보육 등 조세기반의 소득보장 제도들이 도입됐다.

복지정책을 둘러싼 사회적 정치적 논의도 매우 활발해졌다. 외환위기 전에는 국민들의 공공복지에 대한 요구와 관심이 매우 저조했다. 과거 권위주의 체제하에서 사회정책 이슈가 정치담론에서 거의 배제되다시피 했다는 사실은 차치하더라도, 민주화 이후에도 사회정책 이슈가 중요한 선거 쟁점이나 사회적 의제로 부상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 무상급식 논쟁에서도 알 수 있듯이 2000년대 들어서는 복지이슈가 선거정치의 핵심 이슈로 부상하게 되고, 한국 정치사상 처음으로 정당세력들이 득표를 위해 복지정책을 전면에 내세우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들의 성격이 무엇인지, 과연 우리나라의 복지시스템은 질적인 변화를 겪은 것인지 곰곰이 따져볼 필요가 있다. 외환위기 이후 공적 복지의 확대 과정이 산업화 이후 사회적 차원에서 형성된 사회적 규범들과 무관하게 진행될 수는 없었다. 이전 호 글들에서 살펴봤듯이 이미 한국사회는 산업화와 민주화를 거치면서 국가복지를 대체하는 다양한 수단들이 발전해 왔으며, 이를 둘러싼 이해관계가 형성돼 왔다. 외환위기 이후 국가복지의 확대는 바로 이러한 제도적 정책적 유산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이 증세 없는 복지 현상이다. 외환위기 이후 다양한 차원에서 복지 지출은 증가해 왔지만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조세개혁이나 증세 정책에 대해서는 어느 정부하에서도 진지하게 논의된 적이 없다. 우리는 그동안 국가복지의 미흡한 부분을 광범위한 소득공제 제도로 대체해 왔다. 그런데 복지 목적의 소득공제는 국가복지와는 대체재의 성격을 갖기 때문에 복지지출을 늘리려면 소득공제와 같은 조세감면 혜택은 줄일 필요성이 있다. 가령 국가가 아동수당을 지급하거나 보육료를 지원한다면 부양자녀공제나 자녀세액공제 혜택은 불필요할 것이고, 의료보장이 잘 돼 있다면 의료비 공제는 불필요할 것이다. 더구나 소득공제 제도는 소득 수준이 높을수록 공제 혜택도 더 커지는 역진성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불평등 해소를 위해서도 제도개혁의 필요성이 컸다.

이런 점에서 보면 박근혜 정부 때 추진된 소득공제를 세액공제로 전환하는 정책은 과세형평성 개선과 복지국가로의 전환을 위해 필요한 조치 중 하나였다. 하지만 이러한 제도개혁의 시도는 ‘13월의 세금폭탄’이라든가 ‘서민 증세’라는 비판이 쏟아지면서 결국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소득공제의 세액공제 전환이 엄청난 반발을 초래했던 이유는 무엇보다도 정부가 증세에 대한 사회적 합의의 필요성을 명시적으로 요구하지 않고 우회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는 점에 있다. 박근혜 정부는 공식적으로는 ‘증세 없는 복지’를 표방했지만 소득공제 제도의 개편이 사실상 증세로 느껴질 수밖에 없는 집단에서는 정부에 대한 불신과 불만이 매우 클 수밖에 없었다.

또한 조세저항은 조세형평성 문제와도 관련이 있었다. 우리나라가 근로소득공제 등을 통해 근로소득의 상당 부분을 과세대상 소득에서 제외해 왔던 주된 이유는 자영업자와 근로소득자 간의 조세부담 형평성 문제 때문이었다. 자영업자들의 소득탈루가 심각하다 보니 조세형평성 차원에서 아예 근로소득의 일부를 과세대상에서 제외해 왔던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기존에 형평성 차원에서 제공되던 혜택이 줄어들다 보니 다시 한번 예전처럼 ‘월급쟁이만 유리알 지갑’이라는 레퍼토리가 등장하게 됐다. 게다가 이명박 정부 때 법인세가 대폭 감면된 것도 조세형평성 문제를 악화시킨 요인 중의 하나였다. 법인세는 여러 논란에도 불구하고 투자활성화 차원에서 감면시킨 반면, 근로소득에 대해서는 증세를 추진하다 보니 ‘서민증세’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박근혜 정부 때의 소득공제 개편 시도와 이를 둘러싼 사회적 갈등은 산업화와 민주화 시기 소득공제를 둘러싸고 전개됐던 조세정치와 유사한 양상을 보여준다. 특히 1987년 민주화 이후 전개되었던 갈등과 판박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세저항의 결과 전반적으로 조세부담이 하향평준화됐다는 점도 유사하다.

외환위기 이후, 특히 무상복지 논쟁을 계기로 한국사회에서도 정치적으로 분명 중요한 변화가 나타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복지증세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여전한 한계다. 이러한 교착 국면이 지속될수록 결국 복지국가에 대한 지지기반도 약화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 주의가 요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