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와이퍼, 노사민정 운영 ‘사회적 고용기금’ 합의
한국와이퍼, 노사민정 운영 ‘사회적 고용기금’ 합의
  • 정다솜 기자
  • 승인 2023.08.16 16:53
  • 수정 2023.08.16 23: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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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일 한국와이퍼 노사, 사회적 고용기금안 조인식 개최
교육·훈련, 사회적 일자리 창출 등 프로그램 운영 예정

한국와이퍼 노사가 ‘사회적 고용기금’ 운영에 합의했다. 회사 청산으로 209명의 노동자가 한꺼번에 일자리를 잃게 된 상황에서 노조가 지역 고용약자와 같이 미래를 준비하겠단 목표로 투쟁했고, 외투기업은 결국 사회적 책임을 외면하지 않은 결과다.

한국와이퍼 노사는 16일 오후 고용노동부 안산지청에서 ‘사회적 고용기금 운영 합의서’ 조인식을 개최했다. 이 운영안은 금속노조 한국와이퍼분회 조합원 95.83%의 찬성으로 가결된 바 있다. 조인식엔 덴소코리아, 덴소와이퍼시스템 측도 참석했다. 한국와이퍼는 일본 자동차 부품사 덴소의 자회사다. 한국와이퍼는 완성차에 납품하는 덴소와이퍼시스템(모터, 링케이지, 암, 브레이드) 중 와이퍼 암·브레이드를 덴소코리아(덴소의 한국지사 총괄)의 발주에 따라 생산해 왔다.

한국와이퍼분회는 외투기업 규제나 산업전환에 대한 고용 안전망이 부족한 현실에서 조합원뿐 아니라 지역 노동자들을 위한 대책이 필요하다는 판단을 했다. 이에 따라 한국와이퍼분회는 회사에 사회적 고용기금을 요구해 왔다. 특히 올해 4월부터 고용노동부 안산지청의 중재로 금속노조(지부·지회·분회), 덴소코리아, 덴소와이퍼시스템, 한국와이퍼가 참여하는 5자대화 테이블에서 노동자들의 요구가 구체화됐다. (▷관련기사 : 사회 속 존재하는 노동자, 외투기업에 ‘사회적 고용기금’을 요구하다)

최윤미 한국와이퍼분회 분회장은 “한국와이퍼가 외투기업으로서 혜택을 받은 뒤 이른바 먹튀하는 과정에서 덴소 자본은 우리사회에 빚이 있다고 봤다”며 “그래서 덴소가 우리나라의 고용 약자를 위해 고용기금을 형성하면, 이 기금을 바탕으로 한국와이퍼분회 조합원뿐 아니라 정리해고 사업장 노동자들을 재훈련·재취업시키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보자는 구상을 하게 됐다”고 밝힌 바 있다. 

ⓒ 고용노동부 안산지청
한국와이퍼 노사는 16일 오후 고용노동부 안산지청에서 ‘사회적 고용기금 운영 합의서’ 조인식을 개최했다. ⓒ 고용노동부 안산지청

기금은 노사민정이 운영···
조합원 및 고용약자 위한 사업 계획

한국와이퍼 노사가 합의한 사회적 고용기금은 △한국와이퍼 조합원을 위한 재고용 지원 사업 △사회적 고용약자를 위한 고용 안정 지원 사업 △운영비 등으로 쓰인다. 

‘한국와이퍼 조합원을 위한 재고용 지원 사업’은 조합원 회복 지원 및 심리 상담, 고용 상담, 은퇴자를 위한 생애 전환 프로그램, 창업 지원, 사회적 일자리 지원, 교육·훈련 프로그램 등으로 구성된다. ‘사회적 고용약자를 위한 고용 안정 지원 사업’은 고용 안정을 위한 상담 사업, 사회적 고용 안전망 구축을 위한 활동(교육, 연구사업 등), 사회적 일자리 사업 등으로 꾸려진다.

사측이 내놓은 사회적 고용기금은 재단법인을 통해 관리된다. 기금 운영은 지역 노사민정이 맡는다. 한국와이퍼분회는 “노사민정 각 주체의 역할은 준비위원회 단계에서 충분한 논의가 이뤄져야 한다”며 “노조가 사측 외에 지역을 대표하는 민간과 지방정부도 참여해야 한다고 보는 이유는 이번 대량 해고 사태와 향후 기금을 통한 사업 수행이 단지 한국와이퍼 해고노동자들의 복리에 한정된 것이 아니고 반월공단과 안산 지역사회 전반적으로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23일 경기도 안산시 반월시화 공단 내 한국와이퍼 공장 내부에서 농성을 하는 한국와이퍼분회 조합원들을 시민사회·노동단체 회원들이 찾아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 참여와혁신 천재율 기자 jycheon@laborplus.co.kr
지난해 2월 23일 경기도 안산시 반월시화 공단 내 한국와이퍼 공장 내부에서 농성을 하는 한국와이퍼분회 조합원들을 시민사회·노동단체 회원들이 찾아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 참여와혁신 천재율 기자 jycheon@laborplus.co.kr

‘사회적 일자리 창출’도 고민

다만 사회적 고용기금을 통해 노동자들이 재취업을 준비한다 해도, 노동자들이 갈 일자리가 부족할 가능성이 있다. 한국와이퍼 공장이 있는 경기도 안산시 반월공단에는 대부분 2, 3, 4, 5차 하청업체가 모여 있다. 산업전환의 압력을 버틸 수 있는 업체는 많지 않다. 손정순 시화노동정책연구소 연구위원은 “반월·시화공단은 요즘 경기 자체가 안 좋다. 산업전환, 나아가 기후변화와 관련된 공단 내 산업의 구조 전환은 필요하지만 아직까지 변화를 위한 움직임은 체감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공장이 떠난 도시의 미래는 대표적으로 미국 위스콘신주 제인스빌 이야기가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 때인 2008년 12월 23일 제인스빌에선 GM공장이 폐쇄됐다. 80년간 지역 경제를 떠받쳐 온 대공장이 문을 닫자 제인스빌과 인근 지역에선 9,000여 명의 노동자가 일자리를 잃었다. 인구 6만 도시 제인스빌 중산층의 삶은 뿌리째 흔들렸다. 제인스빌에선 재취업을 위한 다양한 교육·훈련 프로그램이 운영됐지만, 양질의 일자리 자체가 부족했다. 실직 이후 직업을 바꾼 사람 중 절반 이상이 이전보다 소득이 떨어졌다. 차라리 수백 명의 노동자들은 ‘GM집시’가 되길 선택했다. 차로 4~8시간 걸리는 도시의 GM공장에서 일하며 주말에만 집에 오는 식이었다. (《제인스빌 이야기》, 2019)

한국와이퍼분회도 노동자들이 떠돌지 않고 안착할 수 있는 일자리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다. 합의안에 ‘사회적 일자리 사업’이 담긴 이유다. 한국와이퍼분회 조합원의 평균 연령은 48세로, 약 60%는 여성이다. 이들이 한국와이퍼의 노동조건을 유지하면서 재취업할 수 있는 일자리가 마땅치 않다. 최윤미 분회장은 “중장년 조합원이 많다 보니 사실상 재취업이 어려운 상황이다. 그래서 사회적 일자리를 고민하게 됐다”며 “예를 들어 작업복 세탁소 등 노동 복지와 관련한 사회적 일자리를 안산시와 논의해서 만들어 보는 내용을 구상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분회 유지하며
미래 함께 준비

지난해 외투기업이 공장 폐업을 통보한 뒤 흩어지게 된 다이셀코리아 노동자들의 사례*에서 보듯 한국와이퍼분회 노동자들의 재취업 과정은 녹록지 않을 수 있다. 구상을 현실화하기 위한 여러 난관이 한국와이퍼분회 앞에 있다는 뜻이다. 한국와이퍼분회는 지금껏 함께 길을 만들어 왔듯 앞으로도 분회를 유지하면서 새로운 미래를 준비할 예정이다. 

최윤미 분회장은 “분회를 유지하기로 조합원 총회에서 결정했다. 재고용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과정에서 분회 유지가 필요하다”며 “또 산별노조 시대에 사업장이란 울타리에 갇혀서 노조 활동이 가능하다는 개념에서 탈피하고 싶다. 앞으로도 지역의 노동조건을 더 개선하는 활동도 함께해 나갈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이어 “우리 노조의 1년 넘는 투쟁이 이로써 마무리됐다. 결국 고용은 쟁취하지 못했다. 20년 가까이 근속한 일자리를 잃는다는 슬픔과 상실감은 어떤 지원으로도 대체 불가능할 것 같다”며 “그래도 이번 합의를 통해 해고되는 조합원들에 대한 지원 방식이 단순한 금액 보상에서 그치지 않았다. 사회적 고용 안전망을 구축하는 길을 만들어 냈다. 의미 있는 일이고 감사한 마음”이라고 밝혔다.
 

*외투기업 공장 폐쇄 뒤,
다이셀코리아 노동자들은 어떻게 지냈나? 

경상북도 영천시 채신공단에 있는 일본 외투기업 다이셀코리아(에어백 부품 생산)는 재고 소진 등을 이유로 들며 지난해 6월 30일부로 폐업하겠다고 통보했다. 폐업 시기는 부지 무상임대 종료를 약 4개월 앞둔 때였다. 노동자들은 반발하며 투쟁했지만 폐업 자체를 막진 못했다. 다이셀코리아 전 직원 132명은 희망퇴직서를 제출했다. 

다만 투쟁 과정에서 금속노조 다이셀지회는 사측과 △회사는 청산절차 종결 후 전국 어느 지역에서도 회사의 현재 생산품을 생산하지 않을 것 △노조는 근로관계가 종료된 후 회사의 청산절차를 방해하는 행위를 하지 않을 것 △회사는 앞선 조항을 위반해 한국에서 지역을 불문하고 공장을 재가동할 경우, 회사의 기존 재직자를 우선하여 재고용할 것 등의 내용이 담긴 합의서를 지난해 6월 27일 맺었다. 

이어 금속노조(경주지부·다이셀지회)는 경상북도 영천시와 지난해 7월 14일 ‘다이셀 일방폐업에 대한 재발방지 및 고용대책 합의서’를 체결했다. 합의서에는 △영천시가 다이셀 노동자들의 생활 안정을 위해 고용노동부와 연계한 프로그램을 비롯해 재취업과 직업훈련, 창업 등 활동에 적극 지원한다 △영천시가 외투기업과 협약을 체결할 경우 사업 중단 시 노조에 최소 6개월 전까지 통지해야 한다는 조건이 협약에 포함될 수 있도록 노력한다는 등의 내용이 있다.

약 1년이 흘렀다. 옛 다이셀코리아 노동자들은 어떻게 지냈을까. 김진홍 전 다이셀지회 부지회장은 “재취업을 원했던 노동자들은 재취업이 되긴 했다”며 “문제는 기존 노동조건보다 안 좋은 쪽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영천시 자체가 노조 활동에 대해 보수적인 인식이 있어서 나중에라도 다이셀코리아에 다녔단 사실이 드러나면 계약 해지당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고 전했다. 

김진홍 전 부지회장은 “지금 구인 사이트를 들어가 보면 다이셀코리아가 있던 채신공단에서 직접고용 일자리는 찾아볼 수 없다. 거의 다 아웃소싱 업체 계약직”이라고 이야기했다. 김진홍 전 부지회장은 민주노총 경주지부가 운영하는 이주노동자센터 활동가로 자리 잡았다. 이전에 출퇴근 시간은 차로 왕복 20분이었다면, 지금은 1시간 30분이 걸린다. 김진홍 전 부지회장은 “다이셀지회를 만든 초동 멤버이기 때문에 좁은 영천시에서 다른 제조업체로 재취업하는 선택지는 고려하기 어려웠다”고 이야기했다.

최윤정 금속노조 경주지부 조직국장은 “고용노동부에서는 적극적으로 재취업 관련해서 도우려 했지만 다이셀지회 상황과 맞지 않았다. 다이셀지회 절반 이상이 여성노동자에 연령대가 높았는데, 노동부가 제안하는 요양보호사 등 프로그램은 호응을 얻지 못했다”며 “또 연령대가 비교적 낮은 노동자들에게 수요가 있는 프로그램은 적정 인원을 채우지 못해 대구까지 가서 교육을 받아야 했다”고 말했다. 김진홍 전 부지회장은 “정부의 재취업 프로그램을 통해 취업한 조합원은 한 명도 없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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