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속 존재하는 노동자, 외투기업에 ‘사회적 고용기금’을 요구하다
사회 속 존재하는 노동자, 외투기업에 ‘사회적 고용기금’을 요구하다
  • 정다솜 기자
  • 승인 2023.08.02 07:32
  • 수정 2023.08.02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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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전환 등 영향 한국와이퍼 청산··· 대량해고 위기 노동자들
외국인투자촉진법 등 혜택 받아온 외투기업에 사회적 책임 촉구

회사 청산으로 대량해고 위기에 놓인 한국와이퍼 노동자들이 모기업 덴소에 ‘사회적 고용안정기금’을 요구하고 있다. 외국인투자기업(외투기업) 규제나 산업전환에 대한 고용 안전망이 부족한 현실에서 위기에 몰린 노동자와 지역 경제에 대한 외투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묻는 것이다. 1년 넘게 투쟁 중인 한국와이퍼 노동자 209명은 어떻게 고용승계라는 개인의 ‘일자리’ 지키기에서 나아가 ‘지역 노동자’ 자체를 지키겠단 더 큰 목표를 품게 됐을까. 

26일 오후 경기 화성시 덴소코리아 화성공장 앞에서 열린 ‘덴소규탄 뚜벅이가 간다, 한국와이퍼 투쟁문화제’를 마친 참가자들이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 참여와혁신 천재율 기자 jycheon@laborplus.co.kr
지난 7월 26일 오후 경기 화성시 덴소코리아 화성공장 앞에서 열린 ‘덴소규탄 뚜벅이가 간다, 한국와이퍼 투쟁문화제’를 마친 참가자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 참여와혁신 천재율 기자 jycheon@laborplus.co.kr

한국와이퍼, 강한 고용안정협약에도
산업전환 등 영향 이유로 청산계획 발표

2018년경 한국와이퍼 노동자들은 회사가 수상했다. 회사가 새로운 납품계약 기회를 포기하는 등 매출 규모를 줄이고 있단 의심이 든 것이다. 같은 해 노동자들은 노조를 만들었다. 점점 매출이 줄면서 금속노조 경기지부 시흥안산지역지회 한국와이퍼분회는 2020년 사측과 고용안정협약을 체결했다. 

이후 회사가 청산을 검토한 정황을 포착한 노조는 2021년, 더 강하게 고용을 보장하는 노사 협약을 맺었다. 이 협약에는 “청산, 매각, 공장 이전의 경우 반드시 노조와 합의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이를 이행하지 않으면 조합원 한 명당 1억 원씩 손해배상해야 한다는 조항도 있다. 협약서엔 덴소코리아와 덴소와이퍼시스템 대표이사가 연대책임자로 서명했다. * 일본 자동차 부품사 덴소는 한국와이퍼의 모회사다. 한국와이퍼는 완성차에 납품하는 덴소와이퍼시스템(모터, 링케이지, 암, 브레이드) 중 와이퍼 암과 브레이드를 덴소코리아(덴소의 한국지사 총괄 사업체)의 발주에 따라 생산해 왔다. 

그런데 한국와이퍼는 지난해 7월 노조와 합의 없이 청산계획을 발표했다. 청산 이유는 반복되는 적자, 미래차 산업전환 영향 등이었다. 이는 고용안정협약 위반이라며 노조는 투쟁하고 있다. 선전전, 기자회견, 국회 토론회, 결의대회, 파업, 단식, 일본 원정투쟁 등을 이어온 한국와이퍼분회는 올해 4월 새로운 기점을 맞았다. 고용노동부 안산지청의 중재로 금속노조(지부·지회·분회), 덴소코리아, 덴소와이퍼시스템, 한국와이퍼가 참여하는 5자 간담회가 열린 것이다.

자동차 산업 현실 받아들인 노조
스웨덴 사례 참고해 고용안정기금 요구

5자 간담회에서 노조는 회사의 청산계획 철회가 어려운 상황, 고용승계가 어려운 현실 등을 이해했다. 최윤미 한국와이퍼분회 분회장은 “덴소코리아가 한국와이퍼시스템 자체를 이미 매각했기에 한국와이퍼는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고, 청산 철회도 어렵겠다고 판단했다”며 “또 우리가 한국와이퍼를 빼고 한국와이퍼시스템을 매수한 DY오토에 고용승계 약속을 받은 것도 아니기에 사실상 고용승계도 어려운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덴소코리아 화성공장에선 와이퍼 핵심부품인 모터를, 한국와이퍼가 와이퍼 암·블레이드를, 협력사인 EHE가 와이퍼 링케이지를 생산하는 시스템에서 DY오토는 한국와이퍼를 뺀 나머지를 영업양수하기로 했다. 

자동차 산업전환도 고려해야 했다. 최윤미 분회장은 “일본 덴소가 산업전환기에 맞춰 파워 트레인 등 기존 사업부를 정리하고 신사업 중심으로 체질 개선을 하고 있다”며 “덴소코리아는 지난 5년간 500명 정도 구조조정했다. 우리를 직접고용할 여력이 없다. 보통 산업 변화는 외투기업에서 먼저 일어난다더라. 경제 움직임에 민감한 글로벌 기업인 데다 본국에선 고용문제에 더 신중하지만, 외국에선 그렇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항구 자동차융합기술원 원장은 “와이퍼 암과 블레이드 없이 유리 표면 코팅 기술 등으로 대신하는 기술은 이미 몇 년 전에 나왔다. 비용 문제만 남았다”며 “DY오토는 와이퍼 모터 등 핵심기술을 중심으로 영업양수 하려는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5자 간담회 이후 노동자들은 내부 간담회, 총회 등을 거쳐 새로운 교섭 요구안을 마련했다. 한국와이퍼분회는 한국와이퍼 대량해고 사태의 원인을 △덴소의 약속 불이행 △외투기업 규제와 산업전환기 사회적 고용 안전망 부족으로 봤다. 이 사태를 풀기 위해선 ▲덴소의 약속 이행과 사회적 책임 강화 ▲사회적 고용 안전망 강화가 필요하다. 이에 따라 한국와이퍼분회의 요구안은 ①덴소코리아의 신규 채용 시 한국와이퍼분회 조합원 우선 채용 ②고용안정협약에 합의된 조합원에 대한 위로금(조정) ③사회적 고용안정기금 출연으로 정리됐다. 

최윤미 분회장은 “한국와이퍼가 외투기업으로서 혜택을 받은 뒤 이른바 먹튀하는 과정에서 덴소 자본은 우리사회에 빚이 있다고 봤다”며 “그래서 덴소가 우리나라의 고용 약자를 위해 고용안정기금을 형성하면, 이 기금을 바탕으로 한국와이퍼분회 조합원뿐 아니라 정리해고 사업장 노동자들을 재훈련·재취업시키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보자는 구상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어 “특히 산업전환기에 정리해고돼 혼자 고용시장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집단적으로 프로그램을 운영하면서 함께 재취업 시장으로 뛰어드는 시스템을 만들고 싶었다”고 강조했다. 덴소 한국 관계사가 2005년부터 2022년까지 외국인투자촉진법 등에 근거해 받은 혜택은 우원식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확인한 금액만 220억 원이다.

한국와이퍼분회의 사회적 고용안정기금 요구는 스웨덴의 노사 자율 고용안정기금(TSL·Trygghetsfonden) 사례를 참고했다. TSL은 정부 기구가 아니라 노사 단체협약에 의해 고용주가 정기적으로 출연하는 기금(연간 임금총액의 0.3% 수준)으로 운영된다. 생산직을 대상으로 소득 지원, 구직 상담, 일자리 중개·알선, 교육훈련 서비스를 제공한다. 

조돈문 가톨릭대 사회학과 명예교수는 “TSL의 성공 비결은 최장 6개월에 달하는 스웨덴의 긴 해고 통지기간을 활용해 정리해고 실시 전 재취업 지원 서비스를 시작하고 사업장 단위의 ‘직장 보장 방식’이 아니라, 노동시장 차원의 ‘취업 보장 방식’으로 고용 안정성을 확보한다는 점”이라며 “스웨덴 노조들이 일자리가 아니라 노동자를 보호하는 전략을 취함으로써 기업엔 노동력 활용 유연성을, 노동자에겐 고용 안정성을 제공할 수 있게 된 것”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 (〈스웨덴 비정부 고용안정기금의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 TSL의 실험을 중심으로〉, 2019). 

노조는 사회적 고용안정기금을 조성하면 기금의 50%는 조합원 생계비용으로 나머지 50%는 사회적 재취업 시스템을 만드는 데 사용하고자 한다. 또 한국와이퍼가 지난해 말 청산 개시 직전에 증자한 1,120억 원 중 덴소코리아에 손해배상 명목으로 지급하기로 한 310억 원을 노조는 ‘셀프 배상’으로 규정하고, 셀프 배상금으로 사회적 고용안정기금을 마련하라고 회사에 요구하고 있다.

23일 경기도 안산시 반월시화 공단 내 한국와이퍼 공장 내부에서 농성을 하고 있는 한국와이퍼분회 조합원들이 회의를 하고 있다. ⓒ 참여와혁신 천재율 기자 jycheon@laborplus.co.kr
지난해 2월 23일 경기도 안산시 반월시화 공단 내 한국와이퍼 공장 내부에서 농성을 하고 있는 한국와이퍼분회 조합원들이 회의를 하고 있다. ⓒ 참여와혁신 천재율 기자 jycheon@laborplus.co.kr

연대 위에 성장한 ‘사회 속 노동자들’ 
“사회에 긍정적 변화 일으키는 투쟁 꿈꾸게 돼”

처음부터 모든 조합원이 사회적 고용안정기금 조성 요구에 찬성한 것은 아니었다. 최윤미 분회장은 “설득 과정이 쉽지는 않았다. 일부 조합원들은 1년 넘는 투쟁을 통해 받는 기금의 절반을 사회적으로 쓰겠다고 하는 데 동의하지 못했다”며 “하지만 사회적 고용안정기금의 취지의 중요성에 대해 계속 토론하고 있다. 이 방향에 대해선 전체적으로 합의가 된 상태”라고 설명했다.

한국와이퍼분회 조합원들이 이런 합의를 이룬 배경은 지난 투쟁이 곧 ‘사회 속에 존재하는 노동자’임을 깨달은 과정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최윤미 분회장은 “투쟁 과정에서 자기 일도 아닌데 여러 노동자와 시민이 차가운 농성장 바닥에서 함께 숙식하며 우릴 염려했다. 큰돈을 서슴없이 내놓고 고락을 함께했다”며 “이런 모습이 신기하기만 했던 조합원들이 ‘아, 이때까지 우리는 그냥 한국와이퍼 노동자였는데 알고 보니 사회 속에 존재하는 노동자였구나’ 자연스럽게 깨닫게 됐다. 그러면서 우리의 투쟁이 사회에 긍정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방식으로, 모든 노동자가 승리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는 꿈을 꾸게 됐다”고 이야기했다.  

한국와이퍼분회는 지역사회와 부지런히 연대의 시간을 쌓기도 했다. 정현철 금속노조 시흥안산지역지회 지회장은 “한국와이퍼분회는 무척 특별한 노조”라며 “안산·시흥지역 미조직 노동자 등을 위한 생활 공제회인 ‘좋은이웃’ 회원이 가장 많은 사업장이다. 노조가 만들어지기 전인 2014년 노사협의회 차원에서 통상임금 소송을 준비해 승소했는데, 최저임금 수준인 임금에서 2~3%를 모아 좋은이웃에 기부했다. 자기들도 어렵지만, 더 어려운 지역의 미조직 노동자와 함께하려는 따뜻한 노조다. 그런 노조가 없어질 상황이니 더 가슴이 아픈 것”이라고 말했다.

최윤미 분회장은 “우린 이번 투쟁을 하기 전부터 좋은이웃뿐 아니라 안산노동대학 등 여러 공간에서 지역민들과 많이 만났다”며 “이런 관계가 있었기에 우리가 싸울 때 지역민들이 ‘어? 저기 와이퍼 노조가 싸우네?’가 아니라 ‘내가 아는 미향 언니가 부당하게 일자리를 잃게 됐네?’ 하면서 자기 일처럼 투쟁에 결합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했다. 

아울러 한국와이퍼분회는 지역지회 소속이라는 정체성을 잊지 않았다. 최윤미 분회장은 “반월시화공단에는 작은 사업장이 많이 모여 있다. 노조 만들기가 어렵기에 공단 전체 노동자의 권익을 높이는 방식의 투쟁이나 사업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그래서 시흥안산지역지회가 공단노동자 혼자서도 가입할 수 있는 공단노조를 지향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정현철 지회장은 “시흥안산지역지회는 내 것을 나눠서 어려운 노동자들과 함께할 수 있는 길을 계속 만들고 싶다”며 “이런 정신을 살리기 위해 한국와이퍼분회도 사회적 고용안정기금을 요구하며 투쟁을 마무리하자는 데 뜻을 모은 것”이라고 했다. 

최만복 한국와이퍼분회 부분회장은 “시흥안산지역지회가 미조직 노동자들의 더 나은 삶을 위해 뭔가를 하겠다는 목적으로 열심히 활동하다 보니 지역 내에서도 알아주는 것 같다”면서 “또 안산은 세월호 참사라는 아픔을 겪은 곳이기도 해서 지역 내에서 어려움을 호소하면 여러 단체들이 가서 돕는다. 굳이 노조 조합원이 아니더라도 지역사회 구성원들이 한 몸이라고 생각하고 서로 힘이 돼준다”고 말했다. 

26일 오후 경기 화성시 덴소코리아 화성공장 앞에서 ‘덴소규탄 뚜벅이가 간다, 한국와이퍼 투쟁문화제’가 열리고 있다. ⓒ 참여와혁신 천재율 기자 jycheon@laborplus.co.kr
지난 7월 26일 오후 경기 화성시 덴소코리아 화성공장 앞에서 ‘덴소규탄 뚜벅이가 간다, 한국와이퍼 투쟁문화제’가 열리고 있다. ⓒ 참여와혁신 천재율 기자 jycheon@laborplus.co.kr

현재 한국와이퍼분회 노동자들은 5자 교섭 테이블에서 사측과 사회적 고용안정기금에 대한 입장차를 좁히고 있다. 지난달 26일엔 일본 덴소 본사에 사회적 고용안정기금 출연을 촉구하는 ‘4차 일본 원정대’가 출정했다. 한국와이퍼분회는 투쟁 소식을 알리는 SNS에 이런 글을 남겼다.

“우리는 매 순간 최선을 다하며 이곳까지 왔습니다. 우리는 오늘의 한판 투쟁으로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항상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담담한 마음으로 교섭을 준비하겠습니다.” 

한판 투쟁이 아닌 오랜 연대 위에 성장해, 더 큰 연대를 꿈꾸는 사회 속 노동자들의 담담한 소식엔 ‘좋아요’가 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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