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공순이도, 누구의 딸도 아닌 ‘노동자’였다
그들은 공순이도, 누구의 딸도 아닌 ‘노동자’였다
  • 손광모 기자
  • 승인 2020.03.0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970년대 민주노동운동의 주역이었던 ‘여성노동자’
‘전태일의 뜻’ 이해하면서 ‘노동자’로서 자기 정체성 확립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은?

커버스토리 ② 1970년대 ‘시다’와 ‘여공’의 삶

여성노동자, 지금 어디쯤 왔나

대한민국은 300년을 30년으로 압축한 고도성장으로 불과 반세기만에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압축성장의 이면에는 여성에 대한 차별이 있었다. 가부장적인 사고방식 아래, 여성노동자는 성희롱·임금차별·대량해고의 1순위가 됐다. 차별의 대상이었던 여성노동자들은 누군가의 딸도, 엄마도 아닌 ‘온전한 주체’로 존재하기 위해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발걸음을 내딛어왔다. 1960년대 산업화의 시작과 함께, 여성노동자들이 걸어왔던 발자취를 따라가 보고자 한다. 그리고 여성노동자는 현재 어디쯤 와있는지 되물어본다.

“나 공장에서 일해요.” 이 말을 누구도 떳떳하게 말하기 어려웠던 시절이 있었다. 공장에 다니는 노동자를 일컬어 ‘공순이와 공돌이’라고 불렀던 때였다. 공순이와 공돌이라는 호칭 속에서 노동자 개인의 이름은 흐릿했다. 사회가 노동자를 하대했고, 노동자 스스로도 노동자임을 부끄럽게 여겨야 했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그 시절에도 희망은 있었다. 노동자이며 인간이기에 존중받아야 한다고 소리치던 사람들이다. ‘민주노동조합운동’을 이끌었던 노동자들이었다. 그들은 공순이와 공돌이라는 호칭을 거부하고 한 사람의 노동자로서 대우받기 위해 싸웠다. 그 치열했던 투쟁의 기억을 평화시장의 ‘시다’와 삼성제약의 ‘여공’의 삶에서 다시 찾아봤다.

1975년 청계피복노동조합 구정 기념사진 ⓒ 전태일재단
1975년 청계피복노동조합 구정 기념사진 ⓒ 전태일재단

도시를 찾아온 가난한 농부의 딸
춥고도 험한 공장 생활

1960년대 시작된 산업화와 더불어 ‘이촌향도’가 시작됐다. 1970년대 공장에서 일했던 여성노동자는 대개 1950년 전후 가난한 농부의 딸로 태어나 너나없이 가난에 시달렸다.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수단인 교육은 집안의 ‘아들’에게 몰렸다. 딸들의 교육은 초등학교 전후로 끝났고, 가정에 보탬이 되기 위해서 도시로 흘러들었다.

1969년 열여섯의 나이로 평화시장을 찾은 이숙희 전태일재단 교육위원장도 마찬가지였다. 이숙희 위원장은 “집이 어려워지면서 학교가기가 어려워 초등학교만 졸업했다. 맏이이기도 했다”면서, “주변에서 1년만 기술을 배우면 돈을 벌 수 있다고 했다. 기술자가 돼서 돈을 벌면 학교에 갈 거라는 생각으로 자발적으로 왔다”고 말했다.

“지금도 가난한 사람들은 먹고 살기 어렵지만 그때는 더 어려웠죠. 중학교를 가고 싶었지만 못 간 친구들. 그런 친구들이 시골에서 농사를 짓다가 공장에 가면 기술 배우고 돈 벌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지고 공장에 들어오는 경우가 많았죠. 친구들이 다 그랬던 것 같아요.”

김은임 화학노련 삼성제약노동조합 지도위원의 사정은 다소 나았지만 전반적인 상황은 비슷했다. 김은임 지도위원은 학교에서 급사로 일하며 고등학교를 졸업했지만 “돈을 안 벌고 살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기에 1974년 삼성제약에 입사했다. “가난한 농부의 딸들이 뭘 할 수 있었겠나? 할 수 없이 공장에 갔다”던 김은임 지도위원은 당시 열아홉이었다.

이숙희 위원장은 평화시장의 첫인상으로 어두침침한 주황빛 백열등을 말했다. “어린 마음에 생각했던 회사의 이미지”와 달랐다고 그는 회상했다. 침침한 불빛처럼 평화시장의 노동조건은 어디에도 비할 수 없을 만큼 열악했다. 하루 14~16시간 장시간 노동은 물론이고 재단사-미싱사-시다로 이어지는 도제식 시스템의 강압적인 분위기에 눌려 지내야 했다.

급여 또한 ‘객공’이라는 방식으로 지급됐다. 옷 한 벌을 생산할 때마다 약정한 공임을 받는 방식이었는데, 사업주는 공임 단가를 재단사하고만 협의하고, 미싱사와 시다는 거들떠보지 않았다. 그마저도 시다의 월급은 미싱사의 월급에서 지급하게 하면서 책임을 떠넘겼다.

“평화시장은 아침 8시에 작업을 시작하고, 밤 10시, 11시에 끝나요. 온전히 기계처럼 일만 했죠. 하루에 15시간, 16시간씩이요. 거기다가 대목이라고 불리는 구정이나 추석이 되면 한 2주정도 집에도 못 가고 공장에서 먹고 자고 야간작업을 했어요.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죠.”

김은임 지도위원은 제약회사의 깔끔한 이미지를 보고 삼성제약에 입사했다. 그러나 기대는 불과 하루 만에 깨졌다. 당시 삼성제약의 주력 상품은 정제약이 아니라 모기향과 소화제(물약)였다. “들어가서 딱 하루 해보니까 할 게 아니었다. 너무 지저분했다”가 삼성제약에 대한 그의 첫인상이었다.

삼성제약 노동자들은 하루 12~16시간의 장시간 노동을 해야 했다. 또한 노동조합 설립 이전에는 국경일에도 일해야 했고, 상여금, 유급휴가, 생리휴가 또한 없었다. 입사 초기 김은임 지도위원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경조휴가조차 받을 수 없었다.

더욱이 성차별적 직군이 제도화 돼 있었다. 남성노동자들은 주로 설비를 정비하는 기능직으로 ‘일반직’에 속했다. 남성노동자들은 승진에 제한이 없었지만 여성노동자들은 달랐다. “생산직, 여공”으로 분류돼 “기껏해야 반장”까지밖에 승진할 수 없었다. 여성노동자를 향한 폭언과 성희롱도 일상적이었다.

1988년 삼성제약노동조합 소식지. ⓒ 삼성제약노조
1988년 삼성제약노동조합 소식지. ⓒ 삼성제약노조

노동조합이 나쁜 거라고?
공장장과 사장의 말을 어기다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 열사는 평화시장 A동과 B동 사이에 위치한 ‘인간시장’에서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거행하고 분신 항거했다. 전태일 열사의 분신 소식은 평화시장에 이내 퍼졌다. 당시 사업주들은 전태일 열사를 매도했다. 이숙희 위원장은 “당시 사장들은 ‘깡패가 일하기 싫어서 자살했다’거나 ‘깡패가 폐병에 걸려서 취업이 되지 않아서 자살했다’는 식으로 말했다”면서, “처음에 저희들은 사장이나 공장장이 하는 이야기를 그대로 믿었다”고 말했다. 그랬던 그가 사장들의 말에 의문을 품은 건 ‘청계피복노동조합’을 직접 보고 겪으면서였다.

“제가 초등학교밖에 안 나왔지만, 사회선생님이 조합의 종류를 설명하면서 노동조합이 어떤 일을 하는지 설명을 하셨어요. 평화시장에도 있겠거니 했는데 전혀 아니었죠. ‘노동조합은 은행이나 무역회사 같이 좋은 회사에만 있나보다’고 생각하는 차에 전태일 열사의 분신 항거 사건이 났어요. 사장들은 깡패가 그랬다고 했지만, 그 엄마와 친구들이 노동조합을 만들었다고 하니까, ‘옛날에 선생님이 노동조합이 이런 거라고 하셨는데? 잘못 알려진 거 아니야?’라는 생각을 했죠. 그리고 저는 평화시장에 들어오기 전에 교회생활을 열심히 한 아이였어요. 노동조합에서 찬송가를 부른다고 사장들이 욕을 하니까 ‘사장들이 말했던 것과 좀 다른데?’ 하면서 관심을 가지게 됐죠.”

전태일 열사의 항거 2주 후인 1970년 11월 27일, 이소선 어머니와 전태일 열사의 친구들은 청계피복노조를 결성했다. 노조 결성 이후 “전태일의 죽음을 이해한” 노동자들이 스스로 찾아오기도 했다. 이들은 여성노동자가 대부분인 평화시장에서 청계피복노조가 확장하는 마중물 역할을 했다. 이숙희 위원장이 정식으로 조합원이 된 계기도 1972년 5월 7일 청계피복노조에서 주최한 ‘금곡릉 야유회’를 통해서였다.

“개별적으로 전태일의 죽음을 이해하고 청계피복노조에 찾아온 사람들이 많았어요. 먼저 전태일의 아랫집에 살았던 김명례 씨는 초대 부녀부장이었죠. 그리고 박명옥, 유정숙 언니도 스스로 전태일의 죽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느꼈기 때문에 노동조합을 찾아가 활동을 했죠. 이 언니들이 주축이 돼서 ‘아카시아회’라는 모임을 만들었어요. 그 아래 다양한 소모임도 조직했고요. 이런 모임을 통해 여성노동자들의 의식이 점점 높아졌어요.”

청계피복노조는 소모임 활동을 통해 ‘이름 부르기 운동’을 전개했다. 이름 부르기 운동은 노동자 스스로 ‘인간’임을 자각하게 하는 운동이었다. 이숙희 위원장은 “평화시장에 들어오는 순간 이름은 사라지고 번호로 불렸다. 미싱 한 대마다 번호를 써놓고 ‘1번 미싱사’, ‘1번 시다’ 이런 식으로 불렀다. 사람으로 취급하는 게 아니라 돈벌이나 기계, 도구로 생각했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삼성제약에서 노동조합은 1975년 5월 전국화학노동조합(현 전국화학노동조합연맹)의 선전전 이후 만들어졌다. 몇몇 노동자들이 노동조합 가입 신청서를 받아오자 회사는 “내년이나 올 가을에 상장을 한다. 그러면 순이익의 50%는 나누어줄 건데 굳이 노동조합에 가입해서 조합비를 낼 필요가 없다”면서 신청서를 수거했다. 노조에 가입하면 불이익을 줄 것이라는 협박이 동시에 이뤄졌다.

그러나 회사의 조치는 역효과를 불렀다. 김은임 지도위원은 “회사가 왜 저렇게 노동조합을 한다고 하니 난리치는지 의문”이었다며, “그렇다면 곧 노동조합은 노동자에게 상당히 유리한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삼성제약노조는 1975년 7월 20일 결성했다. 그러나 1977년까지 회사의 지속적인 탄압을 감내해야 했다. 초기 노조 설립에 앞장섰던 조향자, 김석자 씨는 회사로부터 해고를 당했다. 삼성제약노조 대표자는 회사에 의해 결정됐다. 삼성제약노조가 ‘민주노조’로 발돋움한 건 1976년 12월 31일이었다. 1976년 8월 조합원이 민주적으로 선출한 지부장을 회사가 일방적으로 해고하자 삼성제약노조는 복직을 요구했다. 서울시의 조정에도 문제가 풀리지 않자 12월 30일 삼성제약 노동자들은 첫 농성을 벌였다.

“누가 탈의실에 ‘오늘 퇴근하지 맙시다’라고 붙였어요. 그래서 퇴근하지 않고 밤새 노래를 부르며 농성했죠. 그때 처음으로 <노동조합은 흔들리지 않게>, <큰 힘 주는 조합> 같은 노래를 배우면서 밤을 샜어요. ‘자 흔들리지 않게 우리 단결해’ 이런 노랫말이었죠. 농성하다 보니 저녁에는 회사 상무가 와서 난리치고, 새벽에는 경찰이랑 사장도 왔어요. 결국 31일에 합의하고 마쳤죠.”

‘공순이’가 아닌 ‘노동자’로
노동조합으로 ‘함께’ 희망 찾아

청계피복노조는 1981년 1월 6일 신군부의 정화조치로 파괴되기 전까지 노동자들의 든든한 방패로 남았다. 청계피복노조는 결성이후 ▲8시 퇴근 ▲시다임금직불제 실시 ▲10인 이상 사업장 퇴직금 지급 등을 요구하고 관철시켰다. 이숙희 위원장은 “여성노동자들을 인간답게 살게 해주고 싶었던 전태일의 뜻에 맞게 노동조합은 평화시장에 산재해 있는 문제들을 해결해 나갔다”고 말했다.

삼성제약노조는 1970년대에 활동했던 민주노동조합 중 유일하게 신군부의 정화조치를 비껴갔다. 조합원이 모두 여성으로 구성된 당시 삼성제약노조는 지금에 비추어 봐도 ‘선진적인’ 제도를 단체협약으로 실현했다. 대표적으로 ▲수유시간 확보 ▲결혼퇴직제 철폐 ▲출산 후 퇴직 철폐 ▲성희롱 금지 및 위반 시 조치 ▲성별 성과급 동일 지급 등이었다.

김은임 지도위원은 1980년부터는 삼성제약노조 위원장에 선출돼 10년간 활동했다. 김은임 지도위원은 조합원들이 노조 활동을 통해 처음에는 부정하려고 했던 ‘공순이’라는 주홍글씨를 떨쳐내고 자신의 정체성을 점점 ‘노동자’로 바꿔나갔다고 말했다.

“처음에 조합원들이 자기가 노동자라는 걸 엄청 싫어했어요. 어디 가서 ‘나는 뭐 현장에서 일한다’고 얘기를 할 수 없었던 거예요. 남자를 만나서 자기 소개할 때도 저희는 제약회사니까 약사 아니면 경리였어요. 노동조합 활동으로 그걸 많이 깼죠. 제가 노동조합을 하면서 가장 자랑스러웠던 게 조합원들이 노동하는 거를 떳떳하게 이야기하는 거였어요. 어디 가서 ‘저 노동자에요. 현장에서 일해요’라고요. 제 정체성을 찾아갈 수 있다는 게 자랑스러웠죠.”

1980년대 평화시장은 일대 변화를 맞았다. 평화시장 내 봉제공장은 창신동, 장의동, 숭의동, 신당동 등 서울 전역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더불어 신군부에 의해 청계피복노조가 파괴되면서 당시 봉제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은 전태일 열사의 분신 이전으로 되돌아갔다.

이숙희 위원장은 결혼을 하면서 1980년대에 진행됐던 청계피복노조 합법성 투쟁에는 함께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항상 청계피복노조 곁에서 함께했다. 이숙희 위원장에게 노동조합이란 노동자가 기계가 아닌 인간임을 알려주는 표지였고, 변화를 위한 희망이었다.

“그때 저에게 노동조합은 ‘우리도 권리가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다가왔던 거죠. 그래서 열심히 노력하면 바뀔 수 있구나. 이런 희망을 가졌던 거죠. 그런데 이거는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내가 아닌 ‘우리’가 함께하면 어느 한 부분이라도 변화를 시킬 수 있다는 거요.”

1950년대 가난한 농부의 딸로 태어나 1970년대 공장에서 일했던 여성노동자들의 이름은 흐릿하다. 때로는 ‘몇 번 시다’, 때로는 ‘공순이’로 불렸다. 공장 밖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름보다는 ‘며느리’나 ‘애기엄마’로 불리기 일쑤였다. 그런 그들에게 노동조합에 대한 기억은 더 없이 소중하다. 어느 누구의 딸이나 어머니 혹은 시다, 공순이 심지어는 기계나 부품이 아닌 한 사람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미니 인터뷰] 그 이후, 어떻게 지내셨나요?

김은임 화학노련 삼성제약노동조합 지도위원

1990년 삼성제약노조 위원장을 그만 두신 후에는 무슨 일을 하셨나요?

1990년도까지 노조위원장을 하고 1991년부터 2004년까지 화학노련과 한국노총에서 일했어요. 이후에는 한국노총 경기지역본부에 있다가 2015년에 정년을 맞아 퇴직했죠. 그때까지 경기지역의 여성노동자 문제나 한국노총의 여성문제는 직접 많이 다뤘어요.

퇴직 후에는 어떻게 지내시고 있나요?

퇴직 후에는 하고 싶은 거 배우고 있어요. 바리스타 자격증이나 요양보호사 자격증도 땄고요. 최근에는 포토샵을 배우고 있어요. 옛날부터 퇴직하면 하고 싶은 거 하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사실 고등학교 졸업하고 나서 삼성제약 들어가고 정년퇴임까지 놀아 본 적이 없어요.

비교적 최근까지 현역으로 일하셨는데 현재 여성노동자의 문제가 무엇이라고 보시나요?

아직도 좀 먼 것 같아요. 요즘 ‘무슨 놈의 여성 타령하느냐’고 하는데, 아직도 사회는 그렇지 않아요. 임금 격차도 문제지만 사회 자체가 여성을 한 사람으로 보는 게 아니라 남자를 보좌하는 사람으로밖에 안 본다는 거죠. 그걸 해결해 나가는 게 우리 여자들이 할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선진국도 아직 못 하니까. 쉬운 건 아니죠.

당시 여성노동자들이 노동자보다는 현모양처나 요조숙녀를 꿈꿨다고 하던데요?

이런 이야기하면 우스울지 모르겠지만 저도 어릴 때는 빨리 시집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노조 활동을 하면서 바뀌기 시작했죠. 사실 우리사회는 여자들이 일하기 어려운 사회잖아요? 결혼하면 남편에 아이에 시댁식구까지 생기니까요. 그런데 그 과정을 깨지 않으면 여자들은 더 이상 갈 수 없어요.

주위에 학생운동 하는 친구들과 만나서 결혼한 선배들이 참 힘들게 살더라고요. 남편은 운동한다고 나가서 안 챙기니 시집가서 가정 챙겨줘야 하고, 더러는 시부모에게 공순이 들여왔다고 구박도 받고요. 그래서 결혼하지 말고 일을 하자고 생각했어요.

지도위원님께 노동조합은 어떤 의미로 남아있나요?

옛날에 여성동아에서 인터뷰를 한 적이 있어요. 그때 ‘왜 위원장님은 결혼을 안 하세요?’라고 물어보는데 ‘저는 노동조합과 결혼했어요’라고 답했어요. 그래서 한창 진짜 결혼 안 하는 이유가 그거냐고 이야기를 많이 들었었는데(웃음).

저는 노동조합은 ‘나와 함께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세상사람 모두 노동할 수밖에 없는 거잖아요? 저는 노동자로서 당당하게 살기 위해서 노동조합이 필요하고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제가 특별하게 달라서가 아니고 노동자이기 때문에 당당하게 살아가기 위해서요.

늦게나마 결혼을 하신 걸로 알고 있어요.

결혼을 꼭 안하겠다고 하기보다 나이 많이 먹고 친구 같은 사람이랑 살면 재밌을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60살 정도 돼서 오순도순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 만나서 살면 참 좋을 것 같다고요. 50살에 결혼을 했으니까 생각보다는 빨리 갔죠?(웃음) 지금은 편안하게 친구같이 잘 살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