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집 마련, 성공·실패·도전史 Part.1
내 집 마련, 성공·실패·도전史 Part.1
  • 손광모, 임동우 기자
  • 승인 2020.10.10 00:00
  • 수정 2020.10.11 00: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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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조사 대상자 중 4人 심층 인터뷰
집과 부동산을 둘러싼 희노애락

커버스토리 ❸ 네 사람 이야기 Part.1

신화는 신비롭지만 우리 모두 신전에 살 수는 없다

‘부동산 가격은 어찌 됐든 오른다. 살 수 있으면 사라, 후회하지 말고’ 대한민국 부동산 불패신화의 1장이다. 심지어 실화에 가까운 신화이다. 그 덕분에 신화는 더 신비롭고 힘이 있다. 그러나 우리 모두 신화에 동승해 신전으로 가지 못하는 것도 실화이다.
부동산 신화를 자세히 보면 일하는 사람들에게, 일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공동체에 다방면으로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일 할 맛도 떨어뜨리고 사회도 둘로 갈라놓는다. 그래서 부동산 신화의 다른 얼굴을 살펴보려 한다.

ⓒ참여와혁신 백승윤 기자 sybaik@laborplus.co.kr
ⓒ참여와혁신 백승윤 기자 sybaik@laborplus.co.kr

<참여와혁신>은 내 집 마련에 관련한 개인의 자세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설문조사에 응한 205명의 노동자 중 네 사람을 선정해 심층 인터뷰를 진행했다. 내 집 마련에 성공한 사람(50대)과 도전하는 사람(30대), 그리고 포기한 사람(30대, 50대)이었다. 이들의 이야기는 한국사회에서 집과 부동산이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다층적으로 드러낸다.

Part.1 쉰, 다른 공간 같은 고민 두 가장의 이야기

하나. 박승우 씨 이야기
부동산은 ‘사치’

“월세 사는 놈이 무슨 부동산을 갖겠습니까? 부동산을 꿈 꿔요? 꿈꾼다는 것 자체가 사치에요.”

서울시 강서구 화곡동이 고향인 서울 토박이 박승우 씨(52세가명)는 현재 월세 40만 원인 1.5룸에서 지내고 있다. 슬하에 딸이 하나 있지만 7년 전 이혼한 이후 혼자서 산다. 배달대행일은 2년 반 전부터 시작했다. 동료에 비해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적응하기가 쉽지는 않았으나 현재는 화곡동 P 배달대행지에서 배달도 다니면서 상점 영업도 함께하는 관리자로 일하고 있다.

벗어날 수 없는 반지하와 곰팡이

승우 씨는 20대 초반 직장을 얻은 이후 수시로 사는 곳을 바꾸며 지냈다. 언론사 판촉업무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승우 씨는 직업 특성상 3년 간 ‘여관방’을 전전하며 생활했고, 이후 직업을 바꾸고부터는 월세 주택을 짧게는 몇 개월, 길게는 2~3년씩 바꾸면서 살았다. 승우 씨는 결혼하기 전까지 화곡동 한 곳에서 이사를 8차례나 다녔다. 모두 반지하 주택이었다. 승우 씨가 이사하는 이유에는 늘 ‘곰팡이’라는 단어가 따라다녔다.

결혼에 성공하면서 승우 씨는 한 차례 변화의 계기를 맞는다. 신혼 초기 승우 씨 내외는 ‘대출이 가능하다’는 분양사의 말을 믿고 작은 빌라를 사려고 했다. 하지만 이미 입주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약속했던 대출은 나오지 않았다. 한 순간에 오갈 데 없는 처지가 된 것이다. 분양사는 ‘어쩔 수 없이 나가라’는 말을 되풀이 했고, 승우 씨 내외도 ‘어쩔 수 없이 못 나간다’는 말을 할 뿐이었다. 그렇게 버티기도 2년 반, 별 수 없이 승우 씨 내외는 이사비 몇 푼을 받고 집을 비워줄 수밖에 없었다.

이후 승우 씨의 삶에서 ‘내 집 마련’은 없는 말이었다. 유난히 자주 바뀌었던 승우 씨의 사는 곳처럼 승우 씨의 직업 또한 수십 개에 달했다. 언론사 판촉, 부동산 시행사, 옷가게, 대리운전, 무역 오퍼, 성인PC방, 호텔 등등 상당히 많은 일을 했다. ‘불법적인 일’에도 손을 대긴 했지만 누구보다 열심히 산 승우 씨였다. 그러나 승우 씨는 “결론은 이상하게 다 꼬였죠”라고 담담히 말했다.

승우 씨는 결혼생활 막바지에 신월동에서 잠시 산 것 이외에는 서울 강서구에서 줄곧 살았다. 어릴 적 대통령이 김포공항을 오갈 때마다 태극기를 손에 들고 환영인사를 한 기억도 강서 토박이인 승우 씨의 뇌리에 또렷이 남아있었다. 그러나 넓디넓은 강서구 땅에서 승우 씨가 맘 편하고 쾌적하게 몸을 누울 수 있는 공간은 없다.

“집은 노후가 좀 돼서. 작년에 물이 조금 샜는데, 올해 물이 또 샜어요. 집이 오래되다보니까 곰팡이가 많이 피는 편이에요. 2층인 데도요. 이사를 가려고 해도 이사가 만만치 않더라고요. 왜냐고요? 돈이 없으니까요. 돈이 있으면 편하게 가겠죠?”

“부동산 꿈도 꾸지 말아야 해요”

승우 씨는 내 집 마련을 포기했다. 내 집 마련은 승우 씨에게 “별 의미가 없는” 일이다. 자녀 양육, 노후 준비 등 아직 남아있는 삶의 문제들이 많지만 부동산은 승우 씨에게 “사치”이기 때문이다. 승우 씨의 월 수입은 320만 원 정도다. 하지만, 여기에서 월세, 오토바이 리스비, 공과금, 통신비, 보험비, 자녀용돈 등을 제하고 나면 한 사람 생활비도 빠듯한 상황이다. 그런 승우 씨가 내 집 마련을 하기에는 부동산 가격은 언제나 승우 씨의 소득보다 더 많이 널뛰었다.

“제가 입고 있는 바람막이가 네파 거예요. 이월상품으로 4만 원 주고 샀어요. 이것만 해도 충분한데 저한테 명품 옷은 진짜 큰 사치에요. 그런데 부동산은 명품 살 돈으로도 택도 없잖아요? 부동산이라는 거는 지금 와서 있는 사람이나 하는 거지 없는 사람에게는 사치예요. 지금 현재 상황에 맞게끔 살아야 하잖아요? 부동산 사려고 하면. 어휴……. 힘들어요. 보지도 말아야 해요……. 꾸지도 말아야 해요…….”

이 말을 마친 승우 씨는 목이 타는 듯 차가운 커피를 들이켰다. 승우 씨가 현재 유일하게 믿는 것은 현재 자신의 노동이었다. 위험한 배달노동을 언제까지나 할 수 없다는 건 승우 씨도 잘 알고 있었다. 배달대행 관리직으로 안정적인 고정수입을 만들어 내려는 이유였다. 승우 씨는 평탄하지 않은 본인의 삶을 이야기했지만 인터뷰 내내 당당했다. 그것은 자신의 노동으로 먹고 산다는 떳떳함이었다.

“집으로 돈 벌려고 하는 사람은 안 좋게 보이죠. 있는 돈으로만 사려고 하면 좋은데 대출을 받아야 하잖아요? 오르면 팔고, 오르면 팔고 그만큼 편하게 벌겠다는 거잖아요? 남의 돈 가지고요. 어떤 사람이 그렇게 안 살고 싶겠어요?”

둘. 김정기 씨의 ‘내 집 마련’ 이야기
“운 좋게 재건축 기회 잡았죠”

“출·퇴근만도 1시간 반 넘게 걸리는 게 다반사였죠.”

사회생활 28년차에 접어드는 김정기 씨(51세가명)는 전남 정읍에서 태어났다. 정읍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정기 씨는 3,000평 규모의 땅을 가진 부모님 곁에서 부족함 없이 자랐다. 집에 방이 10개였다는 정기 씨의 주거환경은 어느 날 아버지가 1기 신도시인 일산에 국민주택을 받게 되면서 변했다. 당시 일산의 국민주택 가격은 4,000만 원이었으며, 1가구 1주택 규제 탓에 정기 씨의 부모님은 정읍의 3,000평 전부를 당시 500만 원에 팔아버리고 이사를 추진했다.

1990년 상경해 기아산업에 다니던 정기 씨는 1년 후 결혼을 하면서 독립하게 되는데 당시 부모님이 지원해준 금액이 1,320만 원이었다. 당시 1,320만 원 전세로 서울 부근에 구할 수 있던 집은 연탄을 때는 재래식 집들 밖에 없었다. 도저히 이와 같은 주거환경에서 살 수 없다고 여긴 정기 씨가 선택한 곳은 서울보다 먼 수원이었다. 1호선 성균관대역(수원)에서 내려 마을버스를 타고 15분 정도 가면 나오는 산꼭대기 빌라의 반지하가 그의 첫 번째 전셋집이었다.

정기 씨는 이곳에 살면서 시흥까지 출퇴근을 했다. 그러다 정기 씨는 공무원으로 직업을 바꾸게 되는데, 당시 초봉은 35만 원으로 자녀 한 명을 포함한 3인 가족에게는 턱없이 부족했다. 서울 구로구 궁동에 위치한 정진학교로 발령받은 정기 씨는 운 좋게 관사에 있는 사택에서 들어가 살 수 있었다. 당시 궁동의 전세가격은 2,700만 원 정도로 정기 씨가 가진 기존 보증금 1,320만 원의 두 배가량 되는 금액이었다.

이후 일산의 부모님 댁으로 들어가 살던 정기 씨는 4,000만 원 주고 샀던 일산의 아파트가 1억 2천만 원으로 오르면서 부모님의 뜻으로 집을 팔게 됐다. 그 후 서울 강동구 둔촌동에 위치한 주공아파트를 구입하게 되는데, 당시 매매를 위해 7,000만 원 융자가 필요했다. 정기 씨의 융자 행진은 집을 매매하면서부터 시작된다.

자녀 한 명이 더 늘어난 상황에서 20평형대 집은 좁았고, 30평형대 집으로 이사하기 위해 기존 주택담보대출비율은 턱없이 모자랐다. 정기 씨는 이때 한 증권사에서 융자를 받아 집을 매매했다. 당시 융자로 인해 한 달에 나가는 비용만 해도 300~400만 원 정도였다. 허리띠를 졸라매던 찰나 박근혜 정부의 담보대출규제 완화가 시행됐고, 정기 씨는 증권사의 어마무시한 융자를 시중은행으로 돌려 부담을 줄일 수 있었다. 그러던 찰나 둔촌동 주공아파트는 재건축에 들어가게 됐고, 정기 씨의 집은 순식간에 17억 원의 시세를 갖게 됐다. 17억 원을 호가하는 집은 2023년 8월 완공되며, 현재 정기 씨는 가족과 함께 강동구 길동에서 전세살이 중이다.

나이 먹을수록 신경 쓰는 ‘주거 인프라’

“일조권, 건물 간 거리, 층간소음까지…다세대주택 살아보니 편안하지 않아요.”

정기 씨가 자주 이사를 하게 된 이유는 주거환경 개선 목적이 아니었다. 물론 발령에 따른 이유도 있었지만, 집주인의 전세금 인상 요구나 계약기간 만료의 이유가 더 컸다. 반지하 다세대주택과 아파트를 오가며 살았던 정기 씨가 자녀 둘을 키우면서 중요하게 여기게 된 ‘내 집 마련’ 요건은 공원, 학교 등 주위 환경이 포함된 ‘주거 인프라’다.

지금은 임대차3법 개정을 통해 기존 전세계약 기간인 2년에서 추가로 2년을 살 수 있다. 그러나 이마저도 아직은 부족하다는 게 정기 씨의 말이다. 정기 씨는 초중고 성장기 아이들, 특히 대입을 준비하는 아이들에게 교육환경을 포함한 주거환경 변화는 아주 민감한 일이다.

영화에서 자주 봤던, 푸른 잔디가 깔린 집을 꿈꾸는 정기 씨는 적막한 도시생활에서 벗어나 지방에 내려가 살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나이가 들면 병원을 자주 찾을 수 있다는 이유로 섣불리 움직일 수 없다. 현재 소유한 집이 자녀들의 주거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는 희망 때문에라도 버텨야 한다.

일이요? 더 해야죠, 미래를 위해서

“제가 걸어온 길을 자녀에게 대물림 하고 싶지 않아요.”

정기 씨는 우리 사회에 불거지는 청년들의 주거문제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이 자녀들에게 곧 닥쳐올 문제라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정기 씨는 60대에 40~50평형대 아파트에 살고, 신혼시절 아이를 낳고서도 10~20평형대 아파트를 사는 현실이 오히려 반대가 돼야 한다고 말한다. 청년 실업이 문제가 되는 현실 속에서 반듯한 직장 없이 주거문제를 해결하기란 하늘의 별따기라는 걸 정기 씨는 이미 알고 있다. 최근 청년들이 주식시장에 몰리는 걸 보면서도 안타깝다. 근로소득으로 온전히 삶을 영위하기 힘들다는 반증이 아닐까 하는 마음도 든다. 공무원의 장점이 연금이라고 하지만, 은퇴 이후에도 경조사비나 관리비, 가족보험, 대출금 상환에 자녀의 미래까지 생각하면, 정기 씨는 차마 쉴 겨를이 없다.

“부채가 있으면 내 집 같지 않아요.”

자녀들의 온전한 주거 마련 걱정에 벌써 하루가 다 갔다.

사는 곳, 살아온 길이 다른 50대 두 가장의 이야기였다. 두 사람이 부동산을 바라보는 시선과 대하는 태도는 달랐다. 다만 미래 세대의 주거와 삶의 문제에서는 같은 생각을 공유했다. 현재 그들은 ‘어떻게든’ 살겠지만, 이대로라면 다음 세대에게 희망은 없을 수도 있다는 걱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