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다와 어시가 꿈꾸는 ‘내 일’
시다와 어시가 꿈꾸는 ‘내 일’
  • 강한님 기자, 손광모 기자
  • 승인 2020.11.09 00:00
  • 수정 2020.11.10 09:1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시다’와 ‘어시’, “어쩜 이렇게 똑같니” … 시대를 초월한 공감
​​​​​​​여전한 착취 구조, 조직된 전태일 필요하다

전태일 50주기 기획② 시다와 어시의 만남

(왼쪽 상단부터) 방장 패션어시노동조합지부준비위원회 준비위원장, 이정기 서울봉제인지회 지회장, (왼쪽 하단부터)박태숙 서울봉제인지회 부지회장, 
마라 패션어시노동조합지부준비위원회 준비위원 ⓒ 참여와혁신 손광모 기자 gmson@laborplus.co.kr

평화시장 노동자는 ‘의류산업의 수출역군’이라는 이름 아래 강도 높은 노동에 시달렸다. 그 중 재단사는 노동자로서 닿을 수 있는 가장 높은 위치였다. 청년재단사 전태일은 가장 아래의 노동자인 시다들의 삶에 공감했고, 자신을 비롯한 평화시장 전체 노동자의 삶을 향상시키려 했다. 한편, 2020년 현재 K-POP과 한류는 한국의 연예산업을 급속도로 성장시켰다. 이에 따라 방송에 출연하는 이들의 의상을 책임지는 ‘패션스타일리스트’가 자리매김했다. 또한 이들을 보조하는 ‘패션스타일리스트 어시스턴트(이하 패션어시)’라는 직업도 등장했다.

시다는 옷을 만드는 미싱사를 보조한다. 패션어시는 옷을 입히는 패션스타일리스트 밑에서 일한다. 이들은 더 나은 일터를 위해 노동조합을 조직했다. 시대는 다르지만 서로 비슷한 경험을 한 화섬식품노조 서울봉제인지회와 청년유니온 패션스타일리스트 어시스턴트 지부 준비위원회(이하 패션어시유니온 준비위원회)를 10월 20일 오후 4시 전태일기념관에서 만났다. 패션어시들은 ‘한 다리 건너면 아는’ 패션업계 특성상 신변보호 차원에서 몸과 얼굴을 가렸다.

* 참석자 *
이정기 서울봉제인지회 지회장
박태숙 서울봉제인지회 부지회장
방장 패션어시유니온 준비위원회 준비위원장
마라 패션어시유니온 준비위원회 준비위원

"어쩜 이렇게 똑같니"

경력 30~40년차 봉제노동자와 ‘요즘 직업’인 패션어시는 연신 서로의 이야기에 공감을 표했다. 두 직업은 모두 옷을 다뤘지만 구체적으로 하는 일은 분명히 달랐다.

“저는 옷 만드는 게 너무 신기했어요. 사람이 옷을 만든다고 하지만 시작부터 끝까지 미싱으로 할 거라고는 생각을 못 했어요.”

경력 33년차의 양복 미싱사인 이정기 지회장은 옷은 미싱으로 시작해 미싱으로 만들어진다고 말했다. 옷은 디자인, 재단, 봉제 등의 과정을 거친다. 먼저 옷을 디자인하여 도안을 작성한다. 그 후 옷감을 재단하고 미싱으로 이어 붙인다. 말로는 간단하지만 옷의 종류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 참여와혁신 손광모 기자 gmson@laborplus.co.kr

1972년 14살의 나이로 평화시장에 들어온 박태숙 부지회장은 숙녀복 전문 봉제노동자다. 그가 처음 평화시장에서 시다로 일할 때 만든 옷은 아동용 남방이었다.

“평화시장에 들어왔을 때 아동용 남방을 만들었어요. 이런 건 시다 일이 굉장히 많아요. 요즘은 프레스로 심지(옷 형태를 잡는 부자재)를 붙여주지만 옛날에는 가정용 다리미로 붙였어야 했어요. 시다들이 카우스(커프스, 셔츠 소매), 카라(옷깃)에 심지를 붙이고 다려서 미싱사한테 주면, 미싱사들이 박아주죠. 그 후에 옷을 또 다림질해서…….”

패션어시들은 방송카메라 뒤에 있다. 방송에 출연하는 가수, 배우, 코미디언 등의 의상을 책임진다. 주로 가수들의 의상을 맡았던 마라 준비위원은 “한 연예인이 옷을 입고 나오기 위한 모든 일”을 패션어시가 한다고 말했다.

“첫 번째로 어떤 옷을 입힐까 회의를 해요. 컨셉이나 시안을 정한다고 하죠. 다음은 옷을 구입을 하거나 협찬을 받아요. 백화점에서 사거나 해외 배송시키기도 하고요. 협찬을 받으면 회사 PR팀이랑 이야기해서 옷을 받고요. 아니면 협찬 대행업체에서 옷을 골라서 받아요. 옷을 구했으면 연예인에 맡게 수선을 해요. 피팅을 본다고 하죠. 그 다음에 현장에 가서 방송 촬영을 해요. 모니터링하고 중간 중간에 옷매무새 봐주고요. 촬영이 끝나면 옷 수선을 풀고 세탁을 하죠. 구매했다면 깨끗이 빨아서 사무실에 정리를 하고, 협찬한 옷이면 반납하고…….”

같은 듯 다른 듯 어시와 시다

봉제노동자는 옷을 만든다. 패션어시들은 옷을 입힌다. 서로가 공감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일을 하면서 겪은 현실이 너무나 비슷했기 때문이다. 가정형편이 그다지 좋지 못했던 이정기 지회장은 4남 중 장남이었다. 그는 1987년 당시 여성 노동자가 대다수였던 ‘시다’부터 일을 시작했다.

“저는 시다로 먼저 시작을 했어요. 취직이 시다가 더 쉬웠죠. 재단보조는 경력이 좀 필요하고 또 실력도 있어야 했어요. 물론 선배님(박태숙 부지회장)보다는 덜 고생했는데. 그래도 비슷하죠. 시다라는 직책 자체가 처음에 들어와서 할 수 있는 게 한계가 있잖아요? 일도 배워야 하고 시키는 거 해야 하고 눈치도 빨라야 하고요.”

마라 준비위원은 패션과는 전혀 상관없는 과목을 전공했다. 하지만 이전부터 패션에 관심이 있어 ‘비주얼 디렉터’를 꿈꿨다. 하지만 현실의 벽은 높았다.

“사실 저는 비주얼 디렉터라는 요즘 새로 생긴 직업을 해보고 싶었는데. 그건 사실 스펙도 있어야 했어요. 요새는 스펙싸움이잖아요? 관련 없는 전공을 하고 있는 입장에서 도저히 가능성이 없었다고 판단했죠. 그래서 현장을 바로 경험할 수 있는 곳을 찾아봤어요. 패션어시가 굉장히 진입장벽이 낮더라고요. 물론 그에 따른 대가가 있었죠. 굉장히 낮은 임금이랑 정해진 휴일이 없었어요.”

마라 패션어시유니온 준비위원회 준비위원. 마라 준비위원은 마라탕을 좋아한다. ⓒ 참여와혁신 손광모 기자 gmson@laborplus.co.kr

1970~80년대 시다가 됐던 이들은 ‘가난’에 떠밀려 평화시장에 온 경우가 많았다. 박태숙 부지회장은 언니 두 명과 함께 평화시장을 찾았다. 생계에 보탬이 되기 위해서이기도 했고, 4남매 중 하나 있는 ‘남동생’을 “학교 보내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오늘날 패션어시들은 다르다. 패션어시들은 보통 한 달에 40~50만 원의 월급을 받고 1~2일 쉰다. 방장 준비위원장은 “패션어시가 돈을 못 벌긴 하겠다”고 예상했다면서, “그래도 이 직업을 꼭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시대상에 따라 흘러 들어와 일을 했건, 자원해 일을 시작 했건 부당한 처우를 받는 건 당연한 게 아니었다.

“방광도 계급이 있는 방광인 거죠”

패션어시와 시다는 특히 식사와 화장실에서 크게 공감했다. 이정기 지회장은 “당시 밥 세 끼 제대로 먹은 사람이 없었다”면서, “점심에 하루 한 끼를 먹었다. 감자탕이라고 하지만 고기 하나 없고 그냥 국물만 냉면 사발에 한 그릇이었다. 거기에 밥 말아서 하루 버텼다”고 말했다. 마라 준비위원도 하루 점심 한 끼가 다였다.

“저희는 공장처럼 딱 식사시간이 딱 정해져 있지 않아서 실장님이 배고파야 밥을 먹거든요? 제가 배고픈 건 아무런 관계가 없어요. 그리고 패션어시 특징이 서울 전역을 왔다 갔다 해요. 몇 시까지 정해진 장소로 넘어가야 하는데 정해진 업무가 있으니까 시간이 없는 거예요. 사실 눈치껏 편의점에서 사먹으면 되는 건데, ‘열심히 해야 한다’, ‘걸리면 혼난다’는 생각에 계속 일했어요. 처음 일할 때 한 달에 10kg가 빠졌죠. 그때 저도 점심만 먹었어요. 점심은 그래도 실장님이랑 같이 먹으니까 일부러 많이 먹었어요. 많이 먹고, 계속 배고픈 채로 있고.”

박태숙 부지회장은 평화시장에서 처음 일했던 당시 화장실 가기가 그토록 어려웠다고 말했다.

“일이 너무 많은 거예요. 그 때 제가 14살이었잖아요? 해도 해도 이걸 다 해낼 수가 없는 거예요. 미싱사들은 ‘객공’이라고 해서 하나 만드는 대로 돈을 받아요. 그러니까 시다들이 빨리 안 해주면 빨리하라고 독촉하죠. 그런데 나는 잘 못하지. 화장실 갈 시간이 없는 거예요. 화장실 가고 싶어서 죽겠는데 소심해서 그 소리를 못했어. 그래서 오줌보가 터지기 직전까지 참다가. 도저히 안 되면 조그만 목소리로 ‘언니, 나 오줌 마려워요’ 그랬던 기억이 있어요.”

박태숙 서울봉제인지회 부지회장 ⓒ 참여와혁신 손광모 기자 gmson@laborplus.co.kr

방장 준비위원장도 마찬가지였다. 패션어시에게 화장실은 마음대로 갈 수 없는 곳이었다.

“처음에 현장에서 촬영을 기다리는데 일이 바빴어요. 그런데 쉬가 너무 마려운 거예요. 선배 언니한테 ‘화장실 좀 가면 안 돼?’라고 말했더니 ‘지금 안 되는데’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조금 있다가 ‘지금 가도 돼요?’하니까, ‘하 진짜 빨리 갔다 와’ 이러는 거예요. 내가 쉬가 마려워서 잘못했다고 생각했죠. 그때부터 물을 안 마시는 습관을 들였어요. 중간에 마려우면 안 되니까요. 하루는 지방촬영을 갔는데 고속도로에서 쉬가 마려운 거예요. 모델이 화장실 가고 싶다고 하면 멈추는데 어시가 멈출 수는 없어요. 방광도 계급이 있는 방광인거죠. 그래서 계속 참다가 어떤 모델이 화장실 가고 싶다고 해서 ‘하, 살았다’고 했죠.”

이정기 지회장은 시다와 패션어시의 공감대 밑에는 ‘착취 구조’가 있다고 말했다. 시다는 미싱사가 되기 위해 거쳐야 할 관문이었다. 패션어시도 실장이 되기 위한 질곡이었다.

“시대만 바뀌었지. 딱 그런 거 같아요. 일을 배운다. 일을 가르쳐 주겠다. 자기 꿈을 이루기 위해서 꼭 거쳐야 하는 과정이 있잖아요? 그런 과정에서 착취가 있어요. 그런 착취 구조가 지금도 똑같은 거죠. 정말 심각한 문제라고 봐요.”

전태일이 남긴 것

“시다 때 본인이 느꼈던 것, 미싱보조 했을 때 느낀 것을 재단사 될 때까지 생각한 거잖아요? 근데 또 몸으로 실천을 했죠. 삶 자체가 대단한 거예요. 전태일을 무슨 정신이고, 뭐라고 하는데, 제 선배들은 사랑이라고 해요. 진짜 인간 사랑을 끝까지 몸으로 생각하고 실천했던 사람이에요. (청계피복노조 때) 저희는 노동조합의 힘을 느꼈어요. 현장에 가면 사업장도 무시 못 하는 힘이 있었어요. 저는 그게 멋있었어요.”

이정기 지회장은 전태일의 “초울트라 악필” 메모장을 읽고 소름이 돋았다고 말했다. 서울봉제인지회의 전신은 청계피복노조다. 1970년 11월 27일 한국노총 전국연합노동조합 청계피복지부가 출범했고, 48년이 흐른 2019년 11월 27일 민주노총 화섬식품노조 서울봉제인지회가 설립됐다.

청계피복노조는 전태일과 노동조합의 힘을 이미 경험한 바 있다. 이들은 70년대 청계피복노조의 힘을 되찾고 싶다는 의지를 보였다. 박태숙 서울봉제인지회 부지회장은 “70년대부터 노동조합에서 활동을 했다. 당시에는 역량이 커서 우리 스스로 많이 쟁취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노동조합이 없어지면서 지금은 옛날 전태일이 싸웠던 시절로 돌아갔다”며 “‘평화시장이 한 사람의 죽음으로 노동조합이 생겼는데 다시 원상으로 갔구나’ 이런 생각을 하는 찰나에 봉제인 지회가 생겼다. 다시 70년대 우리 노동조합에서 일했던 것처럼 (서울봉제인지회 활동을) 했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이정기 서울봉제인지회 지회장 ⓒ 참여와혁신 손광모 기자 gmson@laborplus.co.kr
이정기 서울봉제인지회 지회장 ⓒ 참여와혁신 손광모 기자 gmson@laborplus.co.kr

반면, 전태일을 책으로 접한 방장 패션어시유니온 준비위원회 준비위원장은 그의 삶에 거리감을 느끼면서도 평화시장의 노동환경이 지금 자신의 상황과 다르지 않다는 것에 분노했다.

“다들 노조라고 하면 강경한 이미지밖에 없잖아요? 그리고 기껏해야 전태일? 완전 초등학교 때 배운 거? 그래서 친구들이 노조 만든다고 했을 때, ‘너도 그런 거 하다가 전태일처럼 되는 거 아니야?’ 장난으로 이야기했거든요.”

“전태일평전을 읽으면서 뭐랄까, 거리감이 확 느껴졌어요. 노동하기 전까지도 구구절절하게 아침드라마더라고요. 그런데 시다들을 위해서 일을 하고, 자기도 봉제공장에서 일하고, 또 노동법 준수 해달라고 했던 노력은 우리랑 너무 맞닿아 있는 거예요. 60~70년대랑 지금은 시대상이 완전히 다르잖아요? 50년의 세월이 지났는데, 근로시간이 15시간이 넘고, 노동법이 준수되지 않고, 월급은 말도 안 되게 적은 것들이 공감대가 형성된다는 게…….”

전태일은 ‘태일피복’을 만들어 미싱사와 시다가 건강하게 일할 수 있는 모범업체를 만들고자 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패션어시들은 자신들이 ‘갑’이 되어서 업계를 바꾸는 상상을 한다. 패션어시들의 어마어마한 노동강도를 걱정하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열정노동의 굴레에 빠져 있는 패션어시들에게 노동조합 활동까지 ‘열심히’ 하라는 말은 쉽게 나오지 않는다.

“2주, 한 달에 한번 겨우 쉬는데 이런 걸 바꿔야겠다고 그 소중한 휴일을 노동조합 모임에 나와야겠다는 게 쉽지 않죠. 최저임금, 휴일이 우리 사회에서 당연한 게 됐는데 그게 우리에게는 자연스럽게 이뤄지지 않는 거잖아요. 투쟁을 하고 노동조합을 만들어서 싸워야 얻을 수 있는 건데 제가 만약에 괜찮은 실장이었으면, 당연한 건 챙겨주지 않았을까. 지금은 사실 잘 나가는 실장님도 사업자 등록이 안 된 경우도 많거든요.”

“최근에 느끼는 게, ‘그럼 이 상황에서 가장 나쁜 건 누굴까?’ 그런 이야기하잖아요? 돈을 적게 주는 엔터인가, 저희를 물건 취급하는 실장일까 아니면 거기에 순응하고 있는 우리일까. 그런데 결국 시다도 마찬가지겠지만 어시가 나중에 실장 되는 구조잖아요? 이 실장들도 다 어시를 거쳤단 말이에요.”

마라 준비위원은 “전태일은 내가 원하는 갑의 표상”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는 “어시들의 뒷배가 되고 싶다. 전태일이 잘나가는 실장이었다면 우리 같은 사람들이 나오지도 않았을 거다”라고 말했다. 만약 본인이 실장이었다면 의미 있는 변화를 이끌어내고 싶다는 소망이 담긴 말이었다.

조직된 전태일 필요하지만···
오늘날 양대 노총은 전태일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패션어시는 300명 정도가 모여 있는 ‘오픈카톡방’을 가지고 있다. 카톡방에서는 주로 정보공유가 이뤄진다. 이곳의 방장이었던 방장 준비위원장은 ‘무언가 해 보자’고 결심한 뒤 노동조합 결성을 생각하게 됐다.

방장 패션어시유니온 준비위원회 준비위원장. ⓒ 참여와혁신 손광모 기자 gmson@laborplus.co.kr

쉽지 않은 과정이었다. 노동조합 설립에 상대적으로 적극적이었던 패션어시들은 따로 카톡방을 만들고 나서 막막함을 느꼈다. 노동조합을 만들기 위해 어떤 것부터 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방장 준비위원장은 조직된 노동인 양대 노총을 “찾아갈 생각조차 안 해봤다”고 말했다.

“제가 당하고 있는 게 부당하다고 생각했어요. 같이 현장에서 일하는 어시들이 계속 같은 동선에서 보이더라고요. 이 사람들이 나랑 다 같이 하루만 딱 쉬면 아무것도 못 돌아가겠다고 생각했어요. 사실은 단체행동을 하고 싶었어요. 단톡방에서는 정보공유만 하고 있고 그것과는 별개로 노조를 만들려고 노력을 했는데, 저도 어떻게 할지를 모르겠더라고요. 하고는 싶은데 방법을 모르겠더라고요.”

“일단 양대 노총이라고 하면, 한국노총이랑 민주노총이죠. 우리는 20대고 사용자·노동자 관계도 분명하지 않은데 우리가 저 사람들이랑 같은 노동자라고 할 수 있을까. 현대차 같은 경우는 노동자가 밀집돼 있고, 대기업에 소속돼 있죠. 그런 사람이 아닌데도 노동조합을 만들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는 노동법을 몰라서 대기업만 노동조합을 할 수 있는 줄 알았어요.”

마라 준비위원도 청년유니온을 상급단체로 결정한 이유에 대해 “우리가 근로자성을 인정받더라도 5인 미만 사업장이라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다”면서, “청년유니온이 5인 미만 사업장의 문제를 다뤘던 걸 봤다. 큰 노동조합보다는 우리를 잘 알고 있을만한 사람을 찾아가는 게 맞는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전태일은 당시 재단사로, 평화시장에서 최고 기술을 가진 직급이었다. 그는 자신보다 더 어려운 환경에 놓인 미싱사와 시다를 위해 노동환경 전반을 바꾸려 했다. 오늘날 ‘조직된 전태일’이 돼야 할 양대 노총은 도움이 절실했던 패션어시들에게 닿지 못했다.

평화시장 시다의 증언도 비슷했다. 청계피복노조 초창기 조직된 노동의 연대는 부족했다. 박태숙 서울봉제인지회 부지회장은 “맨 처음 전태일이 돌아가시고 나서 친구 분들과 같이 노동조합을 만들었을 때, 노동조합을 만드는 법을 전혀 몰랐다”면서, “처음에 노동청에서 직원을 파견 해줬다. 그런데 그게 노동자들이 원하는 쪽이 아니고, 정부가 원하는 쪽으로 끌고 가려고 했다”고 말했다.

“조직이 튼튼해지면 룰을 바꿀 수 있어요”

패션어시유니온 준비위원회의 목표는 간단하다. 큰돈을 바라는 게 아니다. 방장 씨는 “근로계약서 작성, 최저시급 보장, 경력에 따른 우대. 기본적인 것들”을 말한다. 서울봉제인지회도 매한가지다. 다만 구체적인 결에서는 사뭇 다르다.

50년 전 평화시장은 공장이 옹기종기 모여 있어 건물별 단체교섭이 가능했다. 그러나 봉제공장이 해외로 빠져나가고 점차 쇠락하는 과정에서 노동조합은 힘을 잃었다. 청계피복노조가 사라진 이유에는 신군부의 탄압도 있었지만 한국 봉제산업이 영세화되는 과정도 함께 있었다.

이제 평화시장에 ‘시다’는 없다. 더 이상 시다가 되려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의 미싱사는 시다와 미싱사가 함께하던 봉제공정을 혼자 하고 있다. 그러나 옷 한 벌 당 돈을 받는 객공, 개수임금제는 그대로다. 미싱사들은 예나 지금이나 아침 6시부터 밤 12시까지 각자도생으로 일하고 있다.

ⓒ 참여와혁신 손광모 기자 gmson@laborplus.co.kr

서울봉제인지회의 궁극적인 목표는 이러한 한국 봉제산업의 작동방식 자체를 바꾸는 것이다. 이를 위해 서로 껄끄러웠던 사이였던 ‘사장’과 손을 잡았다. 10인 미만 사업주도 노동조합 가입대상이 된 것이다. 이제는 사장과 노동자의 경계가 무의미해진 측면도 있다.

이정기 지회장은 “꿈이 있다. 기존 노동조합에서 하지 않았던 비정규직 관련 조직화의 모델을 만들고 싶다”면서, “나도 사업자로 등록돼 있는 사업주다. 조직이 튼튼해지면 룰을 바꿀 수 있다”고 밝혔다.

서울봉제인지회의 모습은 향후 패션어시유니온 준비위원회에게 하나의 길잡이가 될 수 있다. 여태 패션산업은 봉제산업이 시다를 착취해 커왔듯 패션어시를 착취하면서 성장해 왔다. 현재 시다가 되려는 사람이 없듯이 패션어시의 열정도 언제 꺼질지 모른다. 패션어시에게 실장은 ‘갑질하는 사람’임과 동시에 ‘꿈’이기도 하다. 다른 한편, 실장 역시 프리랜서로서 경쟁을 뚫고 엔터테인먼트사로부터 계약을 따내야 하는 처지다.

패션어시가 노동자라면 실장도 역시 노동자다. 시다에게 풀빵을 건넨 건 재단사인 전태일이었다. 패션어시는 실장에게 노동조합으로 손을 내밀었다. 패션어시유니온 준비위원회는 열악한 처우 개선을 넘어 패션산업 작동방식을 바꿀 수도 있을 것이다.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