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 ‘내 일’에 살다] ① “시대의 횃불이었던 전태일은 혁명가”
[전태일, ‘내 일’에 살다] ① “시대의 횃불이었던 전태일은 혁명가”
  • 강한님 기자
  • 승인 2020.10.05 13:03
  • 수정 2020.10.05 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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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전문] 이수호 전태일재단 이사장

[전태일, ‘내 일’에 살다]는 <참여와혁신>이 전태일 50주기를 맞아 준비한 기획입니다. 슬로건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나의 일'에 전태일이 살아있다는 뜻이며, 현재의 또 다른 전태일들이 만들어 갈 ‘내일’을 상상해보자는 것입니다. 50년 전 전태일이 한국사회에 던진 불꽃은 오늘날 다양한 모습으로 번졌습니다. 전태일이 뿌린 불꽃을 다시 모았습니다. 매주 월, 금 총 10회의 연재기사를 통해 오늘날의 전태일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로 나가는 이수호 전태일재단 이사장 인터뷰는 월간 참여와혁신 10월호에서도 만날 수 있습니다. 이 인터뷰는 지면 인터뷰에 다 담아내지 못했던 전문입니다.

 

모두 ‘작은 실천’ 하나 할 수 있는 50주기 돼야

이수호 전태일재단 이사장 인터뷰 

'전태일’이라는 이름에 무슨 말을 더해야 할까. 그에게 달린 무수한 수식어만큼이나 한국 사회에서 전태일이 가진 상징성은 꾸준히 조명돼 왔다. 1970년 11월 13일 이후, 전태일을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매년 11월이 가까워지면 전태일은 책으로, 집회로, 기사로 다시금 살아나곤 했다.

전태일 50주기다. 그를 다시 떠올리려는 흐름에 <참여와혁신>도 숟가락 하나 보태보기로 했다. 먼저 이수호 전태일재단 이사장을 만나 전태일 50주기의 의미를 되새겼다. 인터뷰는 9월 18일 전태일기념관에서 진행됐다. 이수호 이사장은 인터뷰 과정에서 ‘전태일 열사’, ‘전태일’, ‘태일이’라는 호칭을 혼용해 썼다. 이수호 이사장이 썼던 표현은 그대로 담았다.

 

전태일재단 이사장으로서 올해를 마주하는 마음이 남다르셨을 것 같습니다.

모두 다시 한 번 전태일 열사를 우리 마음속에 부활시켰으면 좋겠습니다. 전태일이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세우려고 했던 사회가 어떻게 되고 있는지 돌이켜보는 게 당연한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노동자 전태일로서 살았지만, 우리 사회에 무엇이 필요한지에 대한 관심도 많았습니다. 특히 연대를 구체적으로 실천에 옮겼습니다. 활동가로는 자기희생을 감수하더라도 그것을 해냅니다. 저희들이 설정한 표어도 ‘연대의 50년 평등의 100년’인데 결국은 연대라는 것은 ‘더불어 함께하자’, 평등은 ‘함께 잘 사는 세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함께 잘 사는 세상을 연대해서 만들어보자는 게 전태일 정신의 요체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전태일처럼 그렇게 살 수는 없지만, 나의 삶을 전태일의 삶에 비추어보면서 주어진 이 시간과 시대를 생각해봤으면 좋겠습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조그만 실천을 하는 전태일 50주기가 됐으면 합니다.

전태일 정신은 하나로 정의할 수 없다는 말처럼 들립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노동자, 힘겹게 사는 시민, 자영업자에게도 전태일의 말과 행동은 위로가 됩니다. 각자에게 다가오는 메시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양한 모습으로 전태일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전태일 50주기를 맞아 여러 사업들이 진행됩니다.

아름다운청년전태일50주기범국민행사위원회(이하 전태일50주기행사위원회)를 지난 5월 7일 꾸렸습니다. 시민들과 함께 하는 축제, 전태일 묘소에서 하는 추모식은 당연히 50주기에 맞게 멋지게 하려고 합니다. 전태일 정신이 지금에 어떻게 나타나야 하는지 학술적으로 접근하는 학술토론회도 상반기에 진행됐고 하반기에 국제학술토론회로 연결시킬 예정입니다.

지금 매주 하는 사업으로는 ‘전태일 50주기 캠페인’이 있습니다. 전태일의 후예인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요구를 가지고 전태일다리에 서 보는 캠페인입니다. 50년 전 전태일이 돼 보는 것입니다. 전태일은 거기서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고 했고, 지금은 여러 노동자들이 각자의 목소리를 외칩니다. 구체적으로 실천하고 행동하는 캠페인이기 때문에 상당히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요즘은 일주일에 한 번 한 단체가 와서 하는데, 지금 대기자가 밀려서 방법을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하고 싶은 사람들이 모두 할 수 있도록 하는 건 우리 재단이나 행사위원회에서 할 일입니다.

전태일다리는 전태일이 분신 항거한, 참 뜨거운 자리입니다. 거기서부터 전태일기념관까지 길을 만들어 명명하려는 준비도 하고 있습니다. 전태일 35주기 때 그 주변에 3,700개 정도의 동판을 깔았습니다. 이번에는 청계천 물 흐르는 쪽 산책로에 동판 사업을 합니다.

전태일과 관련된 예술 사업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실제로 전태일은 문화적 소양이 깊었습니다. 노래도 잘 불렀다고 합니다. 우리 삶에서 문화라는 건 분리할 수 없습니다. 특히 지금은 문화를 통해서 목소리를 표출하는 게 자연스러워졌습니다. 올해는 미술가들도 모여서 50주기 특별기획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애니메이션 <태일이>도 연말에 개봉할 예정인데, 정말 열심히 만들고 있습니다. 전태일을 내용으로 하는 연극, 영화 등 문화매체를 통한 행사들을 다양하게 준비하는 중입니다. 여러 예술인들이 모여서 스스로 하는 것들도 많습니다. 전태일을 잘 아는 사람들이나 노동자로 국한시키지 말고 많은 시민들이 함께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이사장님 책상 위 《전태일평전》이 눈에 밟힙니다. 최근에 개정판도 나왔습니다. 

올해 50주기를 맞으면서 《전태일평전》을 ‘다시 읽자’는 운동이 일어났고, 거기에 맞춰 전태일재단도 개정판을 냈습니다. 봉제업 전문용어에 각주를 달았습니다. 읽기 쉽게 글씨도 좀 키우고 색깔도 넣어서 시중에 이제 막 나갔는데 반응이 좋아 기쁩니다.

저는 원래 교육노동자였습니다. 읽고 쓰고 아이들에게 강의하는 게 제 노동이었습니다. 읽는 걸 좋아하는데 《전태일평전》은 스스로 좀 답답하거나 힘들거나 혹은 그냥 시간이 날 때 보기도 합니다. 필요한 부분을 찾아보기도 하고 아무 곳이나 펼쳐도 새롭습니다. 늘 가까이 두고 있습니다. 저도 평전을 통해 전태일을 알았습니다. 태일이만큼 가난하지는 않았지만, 저도 무척 어려웠는데 어렵게 야간대학을 다녔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교사가 됐지만 교육과 우리 사회 전반에 대한 문제의식을 느끼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했던 무렵 전태일평전을 읽게 됐습니다. 전태일이 글을 참 잘 씁니다. 거기다 조영래 변호사도 참 글을 잘 써서, 밤을 새워 그냥 읽었습니다. 내가 대학 3학년 때 이 친구는 평화시장 앞에서 자기 몸을 불살랐던 겁니다. 이후 저도 교육운동, 노동운동의 삶을 자연스레 살기 시작했고 전태일은 늘 마음속에 있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전태일이라는 이름이 한국 사회에서 가지는 힘이 크다’고 말합니다. 전태일이 꿈꿨던 세상으로 가기 위해 무엇이 필요하다고 보십니까?

전태일은 자기를 위했다기보다는 힘든 노동자, 특히 여공들을 위해 싸웠습니다. 그 과정에서 합법적인 방법을 다 동원했습니다. 사랑과 단결, 연대를 통해서 노동자들의 권리를 제대로 찾아야 한다는 정신이 정당하게 평가를 받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조영래 변호사는 《전태일평전》에서 인간선언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돈 중심의 사회, 물질 중심의 사회에서 인간중심이 돼야 한다는 게 전태일의 생각입니다. 저는 자본주의 사회의 문제의식을 50년 전에 전태일이 부르짖었다고 봅니다. 지금도 그 문제는 유효합니다. 앞으로 우리 사회도 ‘뭐가 우리 사회의 중심이 돼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근본적 변화 없이는 남을 문제가 많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노동은 우리 삶을 이루는 기본 중에 기본입니다. 노동의 가치와 노동자에 대한 정확한 자리매김이 핵심입니다. 지금 정부도 그것에 대한 고민과 이해를 하려는 노력이 있었다고 봅니다. 그러나 결국은 그냥 구두로 그치고, 구체화시켜나가지 못하는 한계에 봉착한 것입니다. 전통적 성장이나 자본 중심의 체제를 탈피해야 합니다.

제일 숙제도 많으면서 어려운 게 조직되지 않은 노동자입니다. 우리나라의 5인 미만 사업장은 근로기준법 적용도 안 됩니다. 또 특수고용노동자는 엄연히 노동하는 노동자임에도 불구하고 노동조합을 결성할 수 없습니다. 지금 민주노총과 진보정당이 중심에 서서 전태일3법 입법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전태일이 살아있을 때 가장 관심을 가졌던, 시다라고 불리던 미조직노동자 또는 특수고용 노동자, 중대재해 위험에 놓인 노동자들을 위한 법입니다. 조직된 노동만이 전태일은 아닙니다.

이소선 어머니 9주기 추도식에서 “어머니 앞에 다시는 부끄러운 모습으로 서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발언하셨는데, 10주기 추도식은 어떤 모습이길 바라십니까?

지금도 그렇지만 우리나라의 모든 운동이라는 게 정파다 뭐다 참 많이 갈라져 있습니다. 이게 어머니 보시기에는 안타까운 겁니다. 굉장히 상식적입니다. 근로기준법 준수가 전태일의 대표적인 목소리라면 어머니는 ‘모두 하나가 되라’는 게 중요한 하나의 중심 메시지가 되는 거고, 지금도 유효합니다. 특히 내년에는 10주기인데 제가 바라는 건 한국노총, 민주노총이 중요한 일을 할 때는 같이 좀 했으면 합니다. 지금은 이소선 어머님묘소와 전태일묘소에 같이 모여서 추도식을 함께 하는 수준인데, 전태일 정신계승 노동자대회도 크게 같이 했으면 좋겠습니다. 노동절 행사도 그렇습니다. 상징적으로라도 같이 할 건 하고, 따로 할 건 따로 하면서 이른바 선의의 경쟁을 하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전태일재단도 전태일이 외치던 사회를 만드는 일을 앞장서서 실천해나가는 그런 단체로 발전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그게 전태일재단이고, 책임을 맡고 있는 제가 취해야 할 행동입니다.

얼마 전 민주노총을 포함한 사회적대화가 결렬됐기도 했습니다.

안타깝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민주노총 조직 내의 여러 가지 문제들을 인정을 하면서도, 코로나19라는 큰 어려움 앞에 조직된 노동단체가 무릎을 맞대고 대화를 시작했던 것은 잘 했다고 봅니다. 그러나 아직 우리는 사회적대화의 틀이라든지 방식이 미숙한 것 같습니다. 정부는 너무 서두르고, 성과주의로 가져가려고 하다보니 자꾸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사회적대화 노사정위원회 참여 때문에 너무나 큰 어려움을 겪었고, 그것 때문에 아직도 비정규직 문제가 남발된다고 생각하는 민주노총으로서는 굉장히 어렵게 접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점이 조금 더 고려됐으면 어떨까 하는 안타까움이 있는데, 그렇게 결렬됐던 것이 우리 현실이라고 봅니다.

어떤 점에서 전태일이 아름답다고 생각하십니까?

누구나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하나뿐인 삶을 삽니다. 기자님도, 저도 그렇습니다. 전태일은 스물 셋 청년으로서, 삶에서 가장 활기차고 에너지 넘칠 무렵에 그 특성을 그대로 다 발휘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지금 청년들이 소수자문제, 여성문제, 정의, 공정 등 등 자신의 목소리를 많이 내고 있는데, 이게 아주 좋다고 봅니다. 시대의 특성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편적 가치로 가기 위해서는 함께 가야 합니다. 전태일도 자기 생각은 분명히 맞는데 주장만 가지고는 안 되니까 실태조사를 했습니다. 노동청에 찾아가고 대통령한테 편지도 씁니다. 그 큰 삶에서 연민과 사랑으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한 겁니다. 어떤 벽에 부딪혔을 때도 끝까지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시대의 외침과 횃불이 됐습니다. 그래서 저는 전태일을 혁명가라고 생각합니다.

이사장님은 전태일과 동갑입니다. 전태일이 이 시대를 살고 있었다면 친하게 지냈을 것 같습니까?

그랬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전태일의 남은 친구들하고는 나이도 다 비슷하니까 친구로 지내고 있습니다. 성격이 잘 맞을지는 모르겠습니다(웃음). 저는 어릴 때부터도 좀 내성적이고 말수도 적고 주춤거리고 이런 애였습니다. 전태일은 그런 점에서는 저와 상당히 상반됩니다. 뭐 가출도 막 여러 번 했었습니다. 저는 가출을 할 베짱이나 용기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 점에서 성격이 다르긴 해도, 다르니까 오히려 더 보완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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