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 ‘내 일’에 살다] ③ 평화시장 주변에도 전태일은 있다
[전태일 ‘내 일’에 살다] ③ 평화시장 주변에도 전태일은 있다
  • 강한님 기자
  • 승인 2020.10.16 00:00
  • 수정 2020.10.16 08: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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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화노동자 권리는 ‘본사’에서 찾아야
탈세 만연한 주얼리업계, “근로기준법부터 우선 지켜야 한다”

[전태일, ‘내 일’에 살다]는 <참여와혁신>이 전태일 50주기를 맞아 준비한 기획입니다. 슬로건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나의 일'에 전태일이 살아있다는 뜻이며, 현재의 또 다른 전태일들이 만들어 갈 ‘내일’을 상상해보자는 것입니다. 50년 전 전태일이 한국사회에 던진 불꽃은 오늘날 다양한 모습으로 번졌습니다. 전태일이 뿌린 불꽃을 다시 모았습니다. 매주 월, 금 총 10회의 연재기사를 통해 오늘날의 전태일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9월 28일 오전 11시 성수동에 위치한 수제화 공장에 놓인 미싱. '갑피'들이 퇴근하고 공장에는 '저부'들만이 남아있었다. ⓒ 참여와혁신 강한님 기자 hnkang@laborplus.co.kr

전태일의 외침은 평화시장을 넘어 수많은 노동자들에게 닿았다. 청계천이 흐르는 중구 일대, 종로, 성수동을 포함한 서울엔 조직되지 못한 다양한 사업장이 있었다. 그 안에서 노동조합 활동을 하는 이들은 5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근로기준법 준수를 위해 애쓴다. 서울 소규모 사업장의 전태일들을 찾았다.

커다란 조직단체 아니지만···
변화의 ‘밀알’ 되어 함께 가겠다

“기자님, 잠깐만요. 지금 본사 직원 왔으니까 사진 찍지 말아봐요.”
“헉, 삼촌 일하는데 잠깐 왔다고 할까요···”

약품냄새, 가득 쌓여있는 구두밑창, 주문서, 작은 의자에 앉아 밑창을 타카로 두드리는 열댓 명의 사람들. 성수동에 위치한 수제화 공장의 풍경이다. 소비자들이 백화점이나 아울렛에 가서 신발을 주문하면 그 주문서는 본사로 들어간다. 본사는 하청 공장에게 생산을 위탁한다.

9월 28일 오전 11시 성수동 수제화 공장에서 저부들이 신발 밑창을 본드로 붙이고 있다. ⓒ 참여와혁신 강한님 기자 hnkang@laborplus.co.kr

공장은 두 팀으로 나뉜다. ‘갑피’와 ‘저부’다. 갑피는 신발 외피를 미싱으로 박아 틀을 만드는 일을 한다. 만들어진 신발 껍데기는 저부들에게 넘어간다. 저부들은 밑창과 외피를 고정시켜 신발을 완성시킨다. 타카로 모양을 잡은 뒤에는 찜통에 넣어 열기를 가한다.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저부로 일을 시작한 노동자 A씨(63세)는 “신발 하나 만들려면 손이 몇 번 씩 가지. 본드가 마르는 시간도 있고. 자리를 잡아야 하니까 저기(찜통)에도 한번 들어가야 하고. 그냥 막 만드는 게 아니야”라고 설명했다.

이날 저부들의 뜨거운 감자는 ‘부츠 한 켤레의 공임’ 이었다. 공임은 신발 한 켤레 당 노동자에게 돌아가는 임금을 뜻한다. 가을 시즌을 준비하기 위해 공장에도 부츠 주문이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부츠는 발목이 길어 일반 구두보다 조금 더 받는다. 그런데 본사에서 신규 아울렛 제품의 단가를 낮춘 것이다. 원활한 소통을 위해 박완규 서울일반노조 제화지부 부지부장이 저부들과 공장 사용자를 한데 모았다. 저부들은 보통 30년 이상 일한 업계의 ‘베테랑’이다. 그러나 구조 자체가 대부분 하청으로 이뤄지는 상황에서 공임은 잘 오르지 않았다. 대화는 ‘조금 더 고민해보는 것’으로 끝났다.

“다른 데는 롱이면 조금 더 주는데”
“미들은 양보하기로 했는데, 여기서 더 내려가면 안 돼”
“백화점 수수료가 세잖아. 납품 단가가 너무···”

9월 28일 오전 11시 성수동 수제화 공장의 풍경. ⓒ 참여와혁신 강한님 기자 hnkang@laborplus.co.kr

봉제, 제화, 인쇄 노동자들은 특히 친밀한 관계였다. 1970년 11월27일 평화시장 노동자들이 결성한 청계피복노조 이후, 제화노동에도 노동조합의 바람이 불어왔다. 지역에서 제화공들이 노동조합을 만들기 시작했지만 IMF 이후 흐지부지 없어졌다. 2018년 ‘텐디’ 점거투쟁을 통해 다시 모인 제화노동자들은 본사에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본사와 하청업체로 이뤄지는 수제화 생산 과정 속에서 하청업체 사용자도, 노동자들도 힘든 건 마찬가지다.

‘하청업체들끼리의 싸움’이라고 말문을 연 박완규 서울일반노조 제화지부 부지부장은 “하나의 제품을 만드는 데 드는 비용, 과정, 난이도, 시간을 고려해서 공임을 책정해야 한다. 그런데 본사가 받지를 않는다. 브랜드 본사라고 하는 데가 하청업체 노동조합을 만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라며 “하청 업체에서 제작을 해 보면 수지타산이 안 맞음에도 불구하고 그걸 확 깎아버린다. 성수동은 20년 동안 임금이 오른 적이 없다”고 토로했다.

9월 28일 오전 11시 성수동 수제화 공장에서 저부가 신발에 있는 타카를 떼어내고 있다. 열을 가한 뒤에는 타카를 제거한다. ⓒ 참여와혁신 강한님 기자 hnkang@laborplus.co.kr

“전태일이요? 청계천에 닭장같이 조그마한 계단을 기어서 다녀야 하는 어린 노동자들이 있었다고 들었어요. 그 노동자들을 위해서 없는 돈에도 돌봐주고, 나중에 자신의 몸을 불사른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사실 처음에는 피부에 와 닿지 않았어요. 아니 그렇다고 죽어야 하나? 죽을 정도로 힘들었나? 그 정도만 생각했던 거죠. 저는 실천으로 ‘왜 그래야 했나’는 물음표의 답을 찾은 것 같아요.”

“점거 농성을 머리털 나고 처음 해 봤어요. 경험도 없었고, 조합원 선배님들 모시고 70여 명이 들어갔는데 엄청 추운데 복도에서 잤어요. 한기가 올라오고, 시간은 흐르는데 다들 연세들이 있으니까··· 혼자 이걸 어떻게든 풀어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었어요. 그 때 3층 유리창을 두드려봤어요. 몸을 던질 생각을 한 거죠. 전태일의 답답함이, 자그마하게나마 느껴지더라고요. 작은 변화를 이끌어내고는 앞으로 우리의 노동이 달라질 수 있겠다는 생각을 처음 했어요. 노동조합으로 모여 제화공으로의 제대로 된 삶을 사는 그날까지 같이 걸어가고 싶어요.”

제화지부는 큰 조직단체도 아니고, 평균 연령대가 높아 노동조합의 조직률도 낮은 편이다. 박완규 서울일반노조 제화지부 부지부장은 “제화노조는 자잘한 하부조직이고 현장조직이지만 전체 노동자들이 한 목소리를 낼 때 우리도 자잘한 밀알이 될 수 있었으면 한다”고 말을 맺었다.

9월 29일 오전 11시 전태일기념관에서 왼)김세종 금속노조 서울지부 동부지역지회 주얼리분회 조합원, 오) 김정봉 금속노조 서울지부 동부지역지회 주얼리분회 분회장을 인터뷰했다. ⓒ 참여와혁신 강한님 기자 hnkang@laborplus.co.kr

“전태일이 소망했던 것,
작은 사업장의 권리보장 아닐까요?“

평화시장 옆 전태일다리를 따라 종로로 내려가면 주얼리 상가들이 밀집된 골목이 눈에 띈다. 종로 주얼리 매장에서 귀걸이, 목걸이, 반지 등의 주문을 받으면 공장 노동자들은 귀금속을 세공해서 제품을 제작한다. 금속노조 서울지부 동부지역지회 주얼리분회에 따르면 종로 인근에 위치한 주얼리 공장은 700개 이상이다. 이마저도 등록된 사업장이 많지 않아 실태조사가 어렵다.

노동조합 입장에서 바꿔야할 사업장의 문제는 셀 수도 없었다. 주얼리 노동자들도 근로계약서를 써야 했고, 4대 보험에 가입해야 했고, 일한 만큼 야근수당을 받아야 했다. 김정봉 금속노조 서울지부 동부지역지회 주얼리분회 분회장은 5월 1일 노동절날 텅 빈 지하철 사진을 찍었다. 노동절에도 주얼리 노동자들은 회사로 향했다. 아이들 졸업식이나 입학식에 가본 적이 없는 조합원들이 태반이었다. 조정신청을 넣었을 때 지노위 위원들의 반응은 노동조합과 비슷했다. “당연히 지켜져야 할 법조항인데, 이게 노조가 주장해야 할 사안인가?” 김정봉 금속노조 서울지부 동부지역지회 주얼리분회 분회장은 노동조합을 시작하기 전에 전태일평전을 읽고는, “왜 우리는 아직도 이대로지? 50년 전과 다른 게 뭐지?”라고 질문했다.

한 주얼리 노동자가 세공 업무를 하고 있다. ⓒ 주얼리분회

금속노조 서울지부 동부지역지회 주얼리분회는 제화지부와 마찬가지로 2018년 노동조합을 세웠다. 라임, 필, 골드크라운 등 사업장별로 두 명씩 노동조합 간부가 있다. 이중 필은 올해 초 코로나19로 회사가 폐업을 선언했다. 위장폐업이었다. 조합원들은 ‘갈 데도 없고, 여기서 싸우자’고 입을 모았다. 결국 회사는 폐업 계획을 철회하고 노동조합과 단협까지 체결했다.

김세종 금속노조 서울지부 동부지역지회 주얼리분회 조합원은 당시를 회상하며 “노동조합이 의지가 많이 된다. 빠르게 움직이면서도 각자 나름의 사명감을 가지고 활동을 하는 것 같다. 무엇보다 고용안정과 임금에 대한 확실한 보존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김세종 조합원은 주얼리를 전문으로 가르치는 학교를 졸업하고 25년 정도 일했다. 필에 입사한지는 1년 반 정도 됐다. 보통 주얼리 노동자들은 관련 학과나 학원을 통해 업계에 진입한다. 소개를 통해 들어오는 경우도 있다.

9월 29일 오전 11시 전태일기념관에서 만난 김정봉 금속노조 서울지부 동부지역지회 주얼리분회 분회장. ⓒ 참여와혁신 강한님 기자 hnkang@laborplus.co.kr

위 봉투는 김정봉 금속노조 서울지부 동부지역지회 주얼리분회 분회장의 월급봉투다. 현금으로 월급을 받는 이유는 주얼리 업계에 탈세가 워낙 만연하기 때문이다. 기록을 남기지 않으려는 의도다. 월급이 어떻게 구성되는지도 사용자는 명시하지 않는다.

김정봉 금속노조 서울지부 동부지역지회 주얼리분회 분회장은 “이대로 둘 수 없다는 게 모두의 마음이다. 앞으로 노동조합을 가입할 노동자들이 우리를 보며 용기를 내기 위해서라도 노동조합을 해야 한다”며 “동지들이랑 공유하고 공감하다 이전까지 해보지 못했던 눈빛교환을 가끔 한다. 그럴 때 집에 가서 배우자에게 ‘여보, 달라. 뭔가 다른 눈빛이 있어’라고 말했다. 우리 애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빠가 되고 싶다. 조합원들은 든든한 우군”이라고 전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간은 ‘노조가 생겼지만 뭐 되겠어?’라고 말하는 분위기였다면, 지금은 어려운 사람들이 찾아오기 시작하고 노조를 같이 하는 동지들이 생겼습니다. 이 다음 1년은 내가 있는 환경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찾아오는 분들이 늘어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 희망으로 계속 버틸 수 있지 않을까 확신합니다.”

“근로기준법은 지금 항상 존재하고 보완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법이 시행되더라도 큰 기업 중심입니다. 저희 같은 작은 사업장들은 노동법의 적용이 확실치 않습니다. 전태일이 소망했던 것도 작은 사업장의 권리보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종로가 워낙 밀집돼 있어 쉽지는 않지만, 조합원들과 지금처럼 신뢰하고 같이 간다면 모두 하나 될 수 있습니다. 지치지 않고 달려간다면 충분히 우리가 원하는 환경을 만들 수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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