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 ‘내 일’에 살다] ➃ 내 생애 첫 전태일평전
[전태일, ‘내 일’에 살다] ➃ 내 생애 첫 전태일평전
  • 손광모 기자
  • 승인 2020.10.19 00:00
  • 수정 2020.10.16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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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평전 출간 37년, ‘불온도서’에서 ‘권장도서’로 탈바꿈
전태일정신은 한결같지만 시대에 따라 표현되는 방식은 달라
‘강철투사’ 전태일에서 ‘사랑’과 ‘연대’ 전태일로

 

ⓒ 참여와혁신 손광모 기자 gmson@laborplus.co.kr

[전태일, ‘내 일’에 살다]는 <참여와혁신>이 전태일 50주기를 맞아 준비한 기획입니다. 슬로건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나의 일'에 전태일이 살아있다는 뜻이며, 현재의 또 다른 전태일들이 만들어 갈 ‘내일’을 상상해보자는 것입니다. 50년 전 전태일이 한국사회에 던진 불꽃은 오늘날 다양한 모습으로 번졌습니다. 전태일이 뿌린 불꽃을 다시 모았습니다. 매주 월, 금 총 10회의 연재기사를 통해 오늘날의 전태일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전태일평전, 언제 처음 읽으셨어요?”

20대 후반인 기자가 처음 전태일평전을 접하게 된 계기는 은유 작가의 ≪글쓰기의 최전선≫(2015, 메멘토)에서의 추천 때문이었다. 은유 작가는 1990년대 초반 노동조합에서 일을 할 때 “필독서 읽는 식”으로 전태일평전을 접했다고 말했다. 이후 전태일평전이 은유 작가의 삶에 다시금 다가온 건 2011년 글쓰기 수업을 시작한 뒤다. 글쓰기를 배우려는 사람에게 추천하는 책으로 전태일평전을 떠올린 것이다.

은유 작가는 “글쓰기는 학식이 높은 전문가만의 전유물이 아니”라면서, “전태일은 평범한 노동자였지만 자기 삶에 밀착해서 느낀 불편과 인식을 글로 풀어낸 사람”이라고 말했다. 은유 작가는 전태일을 “사상가이자 문학가, 인간을 사랑하는 구도자, 노동의 문제를 구조적으로 보는 철학자” 등 입체적인 면모를 가진 사람으로 평했다.

‘불온도서’에서 ‘권장도서’로

전태일은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에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산화했다. 그 후 이소선 어머니와 전태일의 친구들은 청계피복노조를 꾸려 전태일의 뜻과 정신을 이어받았다. 하지만 전태일이 지금처럼 널리 알려지고 노동운동의 상징이 된 건 1987년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전태일기념관건립위원회 저, 돌베개)이 출간된 후였다.

≪전태일평전≫(조영래 저, 1983. 아름다운전태일, 이하 전태일평전)의 초판본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은 1991년 1차 개정을 통해 전태일평전으로 제목이 바뀐다. 이때 베일에 싸였던 책의 저자가 조영래 변호사로 밝혀지기도 했다. 전태일평전은 이후 2001년 2차 개정을 거쳤다. 3차 개정은 2009년 돌베개 출판사에서 전태일기념사업회(현 전태일재단)에 판권이 넘어가면서 이뤄졌다. 최근에는 전태일 50주기를 맞아 2020년 9월 4차 개정판이 나왔다.

1983년 출간 당시 전태일평전은 불온도서 취급을 받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에게 던지는 울림이 컸기 때문에 ‘독재정권’에게는 위협적이었던 탓이다. 한석호 전태일재단 기획위원은 1983년 출간 직후 전태일평전을 접했다. 당시 그는 새내기 대학생으로 학생운동을 위한 지하조직에 들어간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책을 집에 사들고 가서 밤에 읽기 시작했는데 못 놓겠더라고. 다 읽었지. 아마 그 당시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을 읽었던 사람 대부분이 그랬을 거예요. 한 번 펼치면 끝까지 다 봤다는 사람이 많았죠. 읽고 나서 많이 아팠어요. 와 정말 힘들게 살았구나. 부단하게 노동자의 처우를 개선하기 위해서 수모를 당해가면서도 계속 실천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나도 이렇게 살아야겠구나 생각했죠.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은 그거에요. 전태일의 대학생 친구가 돼야겠다. 제 평생에 그 생각이 자리 잡았죠.”

‘투사’ 전태일

한석호 기획위원과 같이 1980년대 대학을 다닌 사람들에게 전태일은 ‘충격’이었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노동자를 조직하고 자신의 목숨도 기꺼이 바치는 모습에서 당시 사회의 지식인이었던 대학생들은 부끄러움과 동시에 충격을 느꼈다.

권태훈 홍보위원은 “그냥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회사 들어가서 돈을 많이 벌면 되는 거라고 생각했다”면서, “전태일평전을 읽으면서 충격을 받게 됐다. 전태일과 같은 사람들의 헌신과 희생 속에서 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됐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당시 대학을 다니지 않았던 노동자에게도 전태일은 충격이었다. 1986년 당시 울산의 평범한 청년노동자였던 황인석 화학노련 위원장은 우연히 공중화장실에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라는 전태일평전 요약본을 발견했다.

“화장실에서 누가 보고 놔둔 것을 가져와서 동료들 하고 돌려봤던 기억이 나요. 인쇄된 게 아니라 타이핑체로 돼있었어요. 비매품으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라는 책이었지요. 전태일 열사가 분신하기 전까지 스토리가 다 담겨있었어요. 일기장 내용이 적혀 있기도 하고요. 그때만 해도 저는 노동법이 있는 거 자체를 몰랐거든요.”

황인석 위원장은 전태일이 평화시장에서 한 일을 똑같이 본인의 일터에서 그대로 반복했다. 황인석 위원장은 “당시 직장 내에 소위 지하세력을 구축했다. 가칭 민주청년회였다”면서, “전태일 열사가 평화시장에서 조직화했던 걸 그대로 따라했다. 조선내화 사업장에서 노동운동의 기초를 익히고 노동자들의 의식 구조를 변화시켰던 책이 바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였다”고 회상했다.

전태일평전의 위기
'투사' 전태일의 박제화

주로 대학가에서 전태일평전은 교본처럼 쓰였다. 1990년대 대학을 다닌 사람은 전태일평전을 ‘선배의 추천’으로 처음 접한 경우가 많았다. 권태훈 전태일재단 홍보위원이 말하듯 당시 전태일평전은 “선배들이 우리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을 바로 잡는데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책” 중 하나였다.

전태일평전 1차 개정판. 조영래 변호사가 지은이로 표시돼 있다.

권미경 전태일재단 사무국장도 선배의 추천으로 전태일평전을 접했다. 한 선배에게 박노해 시인의 ≪노동의 새벽≫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이야기를 하니 “노동현실을 알려면 ≪노동의 새벽≫이 아니라 전태일평전을 읽어야 한다”는 대답이 돌아왔던 것이다. 하지만 박미경 사무국장은 당시 전태일이 안타깝기는 하지만 다소 답답했었다고 토로했다.

“그때가 1980년대여서 그런지 전태일이 답답한 거예요. 노동부 찾아가고, 서울시청 찾아가고, 근로감독관 찾아가는 모습이 답답해서 미치겠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때는 곧 혁명되는 분위기였잖아요? 혁명이 어떻게 되는 건지는 모르겠는데 선배들이 그렇다고 하니 그런가보다 이렇게 생각을 해서 그런지 전태일이 너무 답답하게 느껴졌어요. 혼자서 막 ‘왜 거기 가?!’, ‘미치겠다’ 이러면서 처음 읽었던 기억이 나요. 그때는 저도 어렸으니까 시대의 맥락 속에서 책을 읽지 못했죠. 그 뒤에 시간이 지나서 보니 어리석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내가 어리석었나 아니면 시대가 나를 눈멀게 했을까. 이런 생각도 들기도 하고요.”

1987년 6월 항쟁 이후 세상을 송두리째 바꿀 수 있을 것 같았던 열기가 차츰 식기 시작하면서 전태일평전은 보이지 않는 위기를 맞았다. 위기의 이유는 전태일이 읽는 이의 삶과 유리된 존재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구교현 라이더유니온 기획실장은 1990년대 후반 대학 선배의 권유로 전태일평전을 접했다.

“사실 크게 느낌이 잘 안 왔어요. 노동자나 뭐 분신, 투쟁에 대해서 잘 몰랐었죠. 역사책 보듯이 그런 일이 있었던가보다 이렇게 생각했어요. 이후에 노동 현장에도 가보고 집회도 해보고, 이러면서 다시 전태일평전을 읽었을 때 처음에 가졌던 문제의식이 발전했죠.”

ⓒ 참여와혁신 손광모 기자 gmson@laborplus.co.kr

전태일의 삶과 생각이 훌륭하긴 하지만 더 이상 ‘내 삶’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 존재, 역사책에 나올 법한 인물로 여겨지게 된 것이다. 권태훈 홍보위원은 이를 ‘박제화’라고 표현했다.

“이게 뭐라고 그럴까. 적당한 표현은 아니지만 신격화라고 해야 하나요? 전태일의 뜻이 대단하고 위대하기는 하지만 당장 지금, 오늘을 살아가는 내 삶에는 친근감이 없어져 가는 거죠. 그런 존재를 박제화됐다고 말할 수도 있을 텐데요. 이소선 어머니도 생전에 자꾸만 아들이 그런 식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에 대해서 일정정도 고민을 가지고 있으셨겠죠. 전태일재단도 그런 고민을 가지고 있죠.”

“전태일이 왜 이렇게 자꾸 예뻐져?”

구교현 기획실장은 최근 청소년 노동인권 교육 활동을 하면서 “학생들이 전태일을 거의 모른다. 한두 명 정도만 어디서 들어본 적이 있는 정도”라고 지적했다. 구교현 기획실장은 전태일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위해서는 시대에 맞게 전태일이 설명될 필요성이 있다고 말했다.

“학생들이 전태일은 몰라도 혜화역 시위 등 최근 사건은 많이 알고 있더라고요. 그런 모습을 보면서 전태일 정신이 이 시대의 사건과 접목시켜서 설명해야 좀 더 생동감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었어요. 딱 ‘노동자’, ‘열악한 노동환경’, ‘1970년대 상황’ 등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그때는 그랬지’ 정도이지 않을까요? 그런데 전태일의 저항정신은 사라진 게 아니에요. 이 시대에 다르게 표현되고 있어요. 노동자. 여성, 장애인, 소수자 운동 등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는 거죠.”

전태일 50주기를 맞아 실시한 전태일평전 4차 개정사업은 바로 이러한 고민이 반영된 결과다. “청소년과 청년들이 전태일평전을 더 많이 읽었으면 하는 바람”이 개정사업의 핵심이었다. 이제는 시대상이 달라져 이해하기 어려워진 부분에 각주를 달았다. 또한 판형과 표지 디자인에도 변화를 줬다. 최근 출판시장 트렌드에 부합하도록 아기자기한 면을 살리면서도 전태일이 가지고 있는 소박한 이미지를 살렸다.

전태일평전 4차 개정판 표지. 오필민 디자이너가 디자인을 맡았다. 이수호 전태일재단 이사장은 3개의 표지 시안 중에 해당안을 고르면서 “푸른 전태일은 아직도 시대의 격자에 갖혀 있는데 그가 기대고 있는 나무는 불꽃으로 타오르고 있군요”라는 코멘트를 남겼다. ⓒ 참여와혁신 손광모 기자 gmson@laborplus.co.kr

4차 개정 사업의 실무를 맡은 박미경 사무국장은 지금 세대에게도 전태일평전이 여전히 울림을 줄 수 있다고 말했다. 다만 그 의미가 옛날 ‘투사’ 전태일만은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어떤 분이 그런 질문을 하더라고요. ‘왜 이렇게 전태일이 자꾸 예뻐져?’라고요. 이 질문이 좋은 의미이기도 하고, 한번 생각해볼 여지도 있다고 봐요. 사실 아직도 싸워야 할 일은 많잖아요? 싸워야 하기는 하는데, 옛날 사람들은 전태일평전을 읽고 정말 난리치면서 싸웠잖아요? 그런데 지금은 전태일평전 하나 읽고 싸우자는 이야기는 안 하잖아요? 평전을 통해서 눈에 보이는 세계만이 아니라 다른 세계가 있다는 걸 알고, 자신의 삶이나 사회에 대해서 좀 더 생각하자는 거죠.”

한석호 기획위원은 10여 년 전부터 ‘강철투사’가 아닌 “정 많고, 세상에 대한 애정도 많은 20대 꿈 많은 청년” 전태일의 모습이 더 많이 생각난다고 말했다. 권태훈 홍보위원도 “짝사랑의 감정에 잠 못 자는 전태일이 요새는 더 친근하게 느껴져서 좋다”고 말했다. 이들에게 전태일은 더 이상 투사나 열사가 아니라 단지 ‘한 명의 사람’이었다.

이 시대의 전태일

1980~90년대 선배를 통해 전태일평전을 접했던 대학생들은 최근 그들의 아들 딸 때문에 다시 전태일평전을 펼치고 있다. 현정희 의료연대본부 본부장은 “우리 애가 고등학교 갈 때 소개서에 전태일평전 이야기를 썼다. 그래서 떨어질 줄 알았는데 다행히 붙었다”며 최근 전태일평전을 다시 보게 된 일을 설명했다. 임상혁 녹색병원 병원장도 “아들이 중학생인데 선생님이 전교조 소속이다. 읽고 독후감을 써오라는 숙제를 내서 최근에 보게 됐다”고 말했다.

소위 ‘운동권 세대’가 아닌 ‘요즘 세대’가 접하는 전태일은 최근에 한석호 기획위원이나 권태훈 홍보실장이 느끼는 ‘전태일’에 가깝다. 4차 개정판의 추천사를 쓴 20대 후반의 김동희 미술작가는 고등학교 때 우연히 전태일평전을 접했다. 김동희 미술작가에게 전태일은 ‘용기’였다.

“전태일이 자기가 이루고자 하는 목표들이 있었잖아요? 노동권을 보장받기 위해서 노력을 하는데 사실은 그 모든 행동들이 성공으로 이어지지 않고 번번이 실패로 이어져요. 그런데도 포기하지 않고 다시 도전하는 용기가 저는 대단하다고 느꼈어요. 사실 요즘에는 자신이 노력한 것을 숨기거나 시험공부를 해도 안 한척 하고 그런 모습이 있잖아요? 사람들이 점점 개인주의적이고 이기적으로 흘러가고, 나도 그런 모습을 가지고 있는데 전태일은 나누려고 하는 모습에서 충격을 받았죠.”

ⓒ 참여와혁신 손광모 기자 gmson@laborplus.co.kr

스물일곱 살의 이채은 청년유니온 위원장은 중학교 때 쯤 전태일평전을 접했다. 노동문제에 관심이 없었던 당시 이채은 위원장에게 전태일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들을 이익을 챙기는 모습. 희생하는 모습”이 각별하게 다가왔다. 청년유니온에서 활동한 후에는 ‘연대’라는 가치가 도드러졌다.

“저희가 지금 패션어시 사업을 하고 있거든요. 당시 여공들과 지금 패션어시의 노동환경이 비슷해요. 전태일 열사가 몸을 불사르면서까지 이루고자 했던 뜻이 잘 지켜지지 않는 것 같아서 조금 속상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했어요. 사실 누군가에게는 근로기준법이 다 지켜지고 있다고 생각되는 사회잖아요? 그런데 그렇지 않고 우리가 모르는 노동이 있을 거라고 생각이 들었요. 제가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등불이 되고 싶다’는 말을 좋아하거든요? 딱 전태일 열사가 그렇게 사신 것 같더라고요.”

사랑과 연대의 전태일

전태일은 시대에 따라 다르게 표현되고 있다. 1980년대 ‘강철투사 전태일’은 이제 말할 수 없는 고민을 품은 청소년이 됐다. 또한, 실패해도 다시 도전하는 용기 있는 청년이 됐으며, 짝사랑에 애 닳는 풋풋한 청년이 되기도 했다. 물론, 본래 전태일이 모두 가지고 있었던 모습이었을 것이다.

아무리 시대가 변해도 항상 그대로 변치 않는 전태일도 물론 존재한다. 한석호 기획위원은 “친우여, 나를 아는 모든 나여, 나를 모르는 모든 나여”라는 구절을 말하며 전태일 사상의 정수를 사랑과 연대라고 말했다.

“제가 좋아하는 건 그거에요. ‘친우여, 나를 아는 모든 나여. 나를 모르는 모든 나여’라는 구절 있잖아요? 그 당시에 ‘대학생인 나도 하늘이 두 쪽 나도 못 쓸텐데. 어떻게 썼을까’라고 생각하면서 열등감이 들기도 했어요. 이후에 세상 살면서 ‘나를 모르는 모든 나’라는 표현에 전태일의 모든 게 담겨있구나 생각이 들었어요. 나 자신이나 내 옆에 있는 내 동료들의 처지. 그건 ‘나를 아는 모든 나’에요. 그를 위해 싸우는 거는 곧 자기 일 때문에 싸우는 거죠. 그런데 나를 모르는 저들이 바로 나다. 나를 모르는 그들조차도 나라는 거죠. 전태일은 그들을 위해서 돌아가잖아요? 실천하고 집회하다가 분신하고 자기 몸을 던지고요. ‘나를 모르는 모든 나’ 이 지점이 바로 전태일 사상의 정수라고 생각을 해요. 바로 사랑과 연대의 정신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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