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 ‘내 일’에 살다] ⑤ 전태일 곁에 묻은 자식들
[전태일, ‘내 일’에 살다] ⑤ 전태일 곁에 묻은 자식들
  • 백승윤 기자
  • 승인 2020.10.27 09:41
  • 수정 2020.11.09 03: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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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에 자식 묻은 부모
"혼이라도 여럿 있는데 두면 마음 덜 아파"

[전태일, ‘내 일’에 살다]는 <참여와혁신>이 전태일 50주기를 맞아 준비한 기획입니다. 슬로건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나의 일'에 전태일이 살아있다는 뜻이며, 현재의 또 다른 전태일들이 만들어 갈 ‘내일’을 상상해보자는 것입니다. 50년 전 전태일이 한국사회에 던진 불꽃은 오늘날 다양한 모습으로 번졌습니다. 전태일이 뿌린 불꽃을 다시 모았습니다. 매주 총 10회의 연재기사를 통해 오늘날의 전태일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마석 모란공원에 있는 전태일 묘 ⓒ 참여와혁신 백승윤 기자  sybaik@laborplus.co.kr
마석 모란공원에 있는 전태일 묘. 사설 공동묘지인 모란공원은 1966년 조성됐다. ⓒ 참여와혁신 백승윤 기자 sybaik@laborplus.co.kr

"왜 이런 허허벌판에 세울까, 서울과 더 가까운 묘지가 있는데." 친구 전태일을 안장하던 날을 떠올리며 최종인 씨가 한 말이다. 

1970년 11월 18일. 이소선 어머니는 아들 전태일을 경기도 남양주시 모란공원에 묻었다. 사망한지 6일 만이었다. 묘역 주변은 민둥산에 가까웠다. 지금은 수도권 광역전철 개통으로 한결 나아졌지만, 당시 모란공원은 거리로나 심리적으로나 서울에서 멀고 외진 곳이었다. 최종인 씨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증언했다.

"노조결성 등 8개 요구조건에 대한 이행 약속을 받고 빨리 장례를 치르기로 이소선 어머니가 노동청과 합의했어요. 학생장이니 뭐니 얘기가 나오자 정부 기관에서 개입했어요. 묘역을 그쪽에서 잡은 거로 알아요. 어머니는 당시 묘소를 가볼 경황이 없었죠."

전태일 묘역이 서울과 멀리 떨어진 황막했던 곳에 자리한 건 보안 당국이 몰아갔기 때문이란 게 중론이다.

전태일 장례식에서 아들의 영정을 껴안고 있는 이소선 어머니 ⓒ 전태일재단
전태일 장례식에서 아들의 영정을 껴안고 있는 이소선 어머니. ⓒ 전태일재단

변두리로 향한 유족들, 초록이 된 민둥산

흙과 바위로 덮였던 모란공원은 점차 초록을 띠기 시작했다. 전태일 묘역 주변으로 점점 민주화 인사 묘역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부담을 느낀 전두환 정권은 모란공원에 민주화 인사 묘역이 모이는 걸 막고자 했다. 1986년 3월 분신한 박영진 열사 유해가 익히 알려진 사례다. 노동계가 40일간 투쟁한 끝에 안장됐고, 모란공원은 '민족‧민주열사묘역'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현재 170여 기에 이르는 묘역 중 대부분은 장례위원회가 권유하고 유가족이 받아들이면서 만들어졌다. 자식을 먼저 보내기 전까지는 대부분의 부모가 모란공원의 존재나 상징성을 알지 못했다.

장남수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회장도 마찬가지였다. 1995년 12월, 학내민주화운동을 하던 아들 장현구 열사가 사망하고 꾸려진 장례위원회에게 "모란공원으로 보내야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장례위원회와 얘기하면서 모란공원에 민주화 운동하던 분들이 모여 있다고 해서 승낙했어요. 전태일이 있다는 건 알았지만 다른 분들이 계신 건 모르고 있었으니까. 처음엔 빨리 장례 치러서 털어버리고 싶은 마음뿐이었지, 뭐 있어요. 장가도 안 간 학생의 묘역이 끝까지 있을 수도 없는 거고. 하고 나선 좋다고 생각했어요. 별도로 혼자 두면 벌써 사람들에게 잊혀졌을 테니까."

장남수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회장이 아들 장현구 열사 이야기를 하고 있다. ⓒ 참여와혁신 백승윤 기자 sybaik@laborplus.co.kr
장남수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회장이 아들 장현구 열사 이야기를 하고 있다. ⓒ 참여와혁신 백승윤 기자 sybaik@laborplus.co.kr

수도권에서 활동하던 민주화 인사라고 모두 모란공원에 묻힌 건 아니다. 권위주의 정권의 탄압을 걱정해서 장례위원회의 권유를 받아들이지 않는 부모도 있었다. 특히 친족 중에 공무원이 있을 경우 가족장을 하고 조용히 넘어갔다. 장현구 회장은 "공무원인 가족이 '죽은 네 자식 때문에 피해를 볼 수는 없다'고 하는 바람에 싫어도 가족장을 치른 부모도 있다"고 했다. 화장이나 가족장을 치른 고인 중, 훗날 선후배나 동료가 유골 없는 묘를 모란공원에 만들어 초혼장(招魂葬)을 지낸 경우도 있었다.

"혼이라도 여럿 있는데 놔야 마음 덜 아파"

70년대에서 90년대에 들어선 묘역 대부분이 장례위원회 주도로 만들어졌지만, 유족이 적극 나서서 모란공원에 안장하기도 한다. 김윤기 열사가 대표적이다.

김윤기 열사는 1988년 덕진양행 입사 후 노조를 결성해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이듬해 사측과 교섭이 결렬되자 4월 3일 세상을 떠났다. 장례위원회가 모란공원에 묘역을 만들려고 했지만, 당시 자리가 없어서 파주 기독교공원묘지로 갔다. "묘지에 8시가 넘은 늦저녁에 도착한 탓에 안장을 채 마무리 짓지도 못하고 덮어만 놓고 왔다"고 어머니인 정정원 여사는 회상했다.

"묫자리가 이렇다저렇다 할 정신은 없었고, 죽은 거에 대한 안타까움만 있었지. 박정희가 아들, 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고 했잖아. 근데 우리는 셋을 낳았어. 첫째 윤기는 병원도 한 번 안 갈 만큼 건강하게 컸어. 자식 죽은 부모들은 똑같겠지만, 병원도 안 간 새끼를 어느 날 하루아침에 갖다 묻으려니 참 기가 막힐 노릇인 거야. 집이 다닥다닥 붙은 서울 거리를 지날 때도 그냥 주저앉아 소리 내서 울고 그랬어."

정정원 여사가 아들 김윤기 열사 이야기를 하고 있다. ⓒ 참여와혁신 백승윤 기자 sybaik@laborplus.co.kr
정정원 여사가 아들 김윤기 열사 이야기를 하고 있다. ⓒ 참여와혁신 백승윤 기자 sybaik@laborplus.co.kr

당시 기독교공원묘지에는 김윤기 열사를 비롯해 4명의 민주화 열사가 묻혀있었다. 광주 망월동묘역, 모란공원 등으로 하나둘 묘역을 옮겼다. 정정원 여사는 아들 혼자만 남게 되자 서러운 마음이 들었다고 했다.

"다 떠나가 버리고 우리 윤기 하나만 남을 때는 얼마나 속상하던지. 어미 마음에 죽은 뼈다귀라도 혼자 두는 건 진짜 속상하더라고. 그래서 모란공원에 땅을 사놓고 옮겼지. 돈은 들어갔어도 후회는 안 해. 내가 잘 먹고 잘 살자고 거기 외롭게 놔두는 것보다 낫잖아. 주말에 보면 도시락 싸들고 4~5명씩 순례 오는 사람들이 많아. 그럼 눈도장이라도 찍잖아. 여기 누가 있다는 게 머릿속에 심어지잖아. 그래서 옮긴 거야. 여러 사람에게 알리게. 잘했다, 잘했구나 싶어. 옮기지 않고 거기 있으면 누가 거길 찾아가겠어. 1년에 한 번 추모제 때나 가겠지."

모란공원에는 충남 태안화력발전소에서 하청업체 노동자로 일하다 숨진 고 김용균 노동자도 2019년 2월에 묻혔다. 정정원 여사는 작년 이소선 어머니 추모제에서 김미숙 김용균재단 이사장을 만났다. 

"'어머니 몇 년이나 되셨어요, 어떻게 지내셨어요'하고 묻길래 '하루하루 울며불며 쫓아다니다 보니 30년이 됐다'고 말해줬어."

마석 모란공원에 있는 고 김용균 노동자의 묘 ⓒ 참여와혁신 백승윤 기자 sybaik@laborplus.co.kr
마석 모란공원에 있는 고 김용균 노동자의 묘. ⓒ 참여와혁신 백승윤 기자 sybaik@laborplus.co.kr

김용균 노동자 어머니인 김미숙 이사장은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투쟁을 하기 위해서 경북 구미에서 서울로 이사했다. 서울에서 오갈 수 있는 거리에 자식을 두고 싶었다. 시민대책위에서 묘지를 몇 군데 알려줬다. 전태일과 이소선 어머니 계신다는 말을 듣고서 아들의 묘역을 모란공원으로 정했다. 김미숙 이사장도 정정원 여사와 비슷한 생각이다.

"아이 혼자 잘 알지도 못하는데 묻어두고 찾아갈 사람도 없으면 부모는 되게 속상하죠. 모란공원이 생각보다 멀어서 '집에서 더 가까운데 찾아볼걸'하는 후회도 들지만, 전태일이나 다른 열사들 보려고 모란에 간 사람들이 용균이에게 한 번씩 들르는 것 같아요. '용균이가 여기에 잘 있다'며 단체 채팅방에 올려주시는 걸 제가 보고 있어요. 안 그래도 일정 때문에 자주 못가서 미안한 마음이 있는데, 그런 점에서 참 위안이 되죠."

50년 전 민둥산이었던 모란공원은 "나만 힘든 게 아니라 다룬 분들도 힘들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한다"는 장남수 회장의 말 처럼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에겐 "위로가 되고 치유가 되는" 공간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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