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와 시민단체]③ 오래된, 그러나 고여 있지 않은 움직임
[참여와 시민단체]③ 오래된, 그러나 고여 있지 않은 움직임
  • 백승윤 기자
  • 승인 2022.06.06 00:13
  • 수정 2022.06.09 1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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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의 독립성 지키며 한 발 진전하는 사회운동 고민할 때”
[인터뷰]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 민선, 가원

참여와 시민단체

<참여와혁신>이 매달 시민단체를 소개합니다. 노동을 주로 다루던 <참여와혁신>인데 ‘장르’가 달라진 게 아니냐고요? ‘참여’는 일터 내 민주주의뿐 아니라 일터 밖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데도 중요한 요소입니다. 참여민주주의학교 시민단체들을 만나며 여러 형태의 참여 경험을 <참여와혁신> 독자와 나누려 합니다.

참여와 시민단체③ 인권운동사랑방

(왼쪽부터)인권운동사랑방 사무실 앞에 선 활동가 가원과 민선 ⓒ 참여와혁신 김민호 기자 mhkim@laborplus.co.kr
(왼쪽부터)인권운동사랑방 사무실 앞에 선 활동가 가원과 민선 ⓒ 참여와혁신 김민호 기자 mhkim@laborplus.co.kr

올봄 국회 앞에서 차별금지법 제정 단식투쟁에 함께 한 인권운동사랑방이 내년이면 출범 30주기를 맞이한다. 한국의 인권운동은 인권운동사랑방 출범 전, 후로 나뉘기도 한다. 과거 한국 인권운동의 중심은 변호사나 성직자였다. 피해자를 법적으로 조력하거나, 신앙으로 아픔을 치유하는 식이었다. 1993년, 기존의 인권운동 방식에 한계를 느낀 활동가들이 인권운동사랑방을 만들었다. 인권의 대중화·전문화·국제화를 목표로 한 활동가 단체의 출범이었다.

인권운동사랑방은 대중이 인권 문제를 일상과 연결해서 생각할 수 있도록 인권영화제를 개최했고, 인권운동의 전문성을 높이기 위해서 국제인권협약 등의 국제 문서를 번역·배포하고 교육했다. 세계인권대회에 참가하고, 국제적인 인권 행동에 결합해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2006년 2월 28일 3,000 제호를 끝으로 폐간한 <인권하루소식>은 인권운동사랑방의 백미로 꼽힌다. ‘한국의 인권 팩스신문’이라고 불리는 <인권하루소식>은 매일 아침 우리나라의 인권 실태를 알리며 인권의 대중화를 이끌었다. <인권하루소식>은 2006년 주간인터넷매체 <인권오름>으로 전환되었고, 인터넷을 중심으로 전문매체들이 많아지며 2016년 발간이 종료됐다.

인권운동사랑방의 활동은 시대적 흐름과 함께 변화·확대되어왔다. 출범 초기에는 국가보안법, 감옥 인권, 시설 장애인 등 자유권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1997년 IMF 외환위기로 전 국민의 삶이 피폐해지자 한국 사회에 사회권을 알리는 운동을 전개했다. 반차별로 활동 영역을 넓힌 건 한국에서 차별금지법 제정 추진을 요구하는 움직임이 일어난 2007년부터다. 차별 당사자나 소수자단체를 넘어서 모든 인권운동 단위가 반차별 운동에 나서야한다는 인식에서다.

출범 20주년을 앞둔 2013년에 인권운동사랑방은 변곡점을 맞이한다. ‘조직화’를 주요 과제로 삼고, “대중의 힘을 변혁적으로 조직하는 새로운 인권운동”이라는 전략을 세워서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안산·시흥 지역 반월·시화공단 노동자 권리찾기모임 '월담' 참여도 그렇게 이루어졌다. 15년 차 활동가이자 월담 활동을 담당하는 민선은 이렇게 회상했다.

“당시 사랑방에는 인권운동이 마치 허공의 얘기처럼 인식되어선 안 된다는 걱정이 있었다. 사람의 삶과 물질적 조건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공감이 있었고, 그때 공단에 주목했다. 반월·시화공단에 여러 차례 노동조합 조직화 시도가 있었지만 잘 안됐다고 들었다. 주로 영세사업장이 밀집한 하청 구조 속에서 노동조합 활동을 꿈조차 꾸기 어려운 공단 노동자들이 어떻게 하면 모일 수 있을까 고민하며 월담 활동을 시작했다. 지금은 중간 점검이랄까, 지난 10년간 월담이 어떤 성과를 남겼는지, 부족한 점은 무엇인지 살피고 있다.”

민선 활동가 ⓒ 참여와혁신 김민호 기자 mhkim@laborplus.co.kr
민선 활동가 ⓒ 참여와혁신 김민호 기자 mhkim@laborplus.co.kr

‘운동을 조직하는 운동’ 사랑방,
차별금지법 제정 단식에 뛰어들다

‘대중의 힘을 변혁적으로 조직하는 운동’이라는 기치 아래, 인권운동사랑방은 ‘운동을 조직하는 운동’이란 바람을 안고 있다. 월담이 그러했듯, 경계에 갇히지 않고 다양한 의제를 넘나드는 사회운동을 만들어 보이겠다는 의미다. 민선은 “일례로 페미니즘은 여성운동만이 아니라 사회운동 전체의 주요 의제여야 한다”며 “사랑방은 운동의 확장을 고민하며 활동하고 있다”고 말했다.

“독자적인 활동과 연대 활동을 구분하려 하지 않는다. 오롯이 우리 단체만의 행동으로 결과를 내는 게 아니라 ‘차별금지법제정연대(차제연)’, ‘기후정의동맹’ 안에서 인권운동사랑방의 역할을 고민한다. 연대체에 단순 참가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인권운동사랑방의 주요 화두로 삼는다.”

민선이 밝힌 대로, 인권운동사랑방은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한 활동에 적극 나섰다. 소속 활동가인 미류는 이종걸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 활동가와 함께 4월 11일부터 국회 앞 단식투쟁을 벌였다. 21대 국회에서 차별금지법·평등법 발의가 잇따랐고 작년 10만 국민동의청원도 성사됐다. 하지만 국회는 임기만료일인 2024년 5월 29일까지 심사기한을 연장했다. 국회 후반기 법제사법위원회 구성이 바뀌면 차별금지법 제정 추진 동력이 떨어질 것으로 전망되었기에, 사활을 걸었다. 그러나 국회는 5월 25일 여당이 빠진 반쪽짜리 공청회를 개최하는 데 그쳤다. 결국 단식투쟁은 46일째인 5월 26일 중단됐다. 건강이 악화한 상태에서 법이 제정될 때까지 고강도 단식을 이어가는 건 어렵다는 판단에서다.
 

국회 앞에서 단식 농성 중인 미류 차별금지법제정연대 책임집행위원 © 참여와혁신 김민호 기자 mhkim@laborplus.co.kr<br><br>
4월 25일 국회 앞에서 단식투쟁 중인 미류 활동가 © 참여와혁신 김민호 기자 mhkim@laborplus.co.kr<br><br>

2007년부터 발의와 폐기를 반복한 차별금지법은 지난 15년간 제정되지 않았다. 동성애를 용납하지 않으려는 일부 계신교의 반대가 주요 이유로 부각됐지만, 재계의 반대도 거셌다. 민선은 “입맛대로 사람을 뽑고 함부로 부리며 자르는 것을 기업의 자유라고 말하며 차별금지법을 반대한 주요 주체에 재계가 있는데, 그 부분은 잘 안 드러났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번 단식투쟁은 무엇보다 국회의 의지와 사회적 힘의 필요성을 확인할 기회였다고 인권운동사랑방은 강조했다. 활동가 가원은 “차별금지법 제정 찬성 여론이 70%를 넘는다. ‘사회적 합의’를 운운할 시점은 지났고, 국회로 공이 넘어간 상황이었다. 차제연에서 성명으로 밝혔듯 그야말로 ‘정치의 실패’다”라고 지적했다.

“일상 속 차별은 공기처럼 너무 당연해서 ‘내가 감수하고 말면 될 문제’로 여겨진다. 내 삶에 큰 타격을 미치는 억울하고 부당한 일인데도, ‘사회가 원래 그렇다’며 단념하고 산다. 그런데 차별금지법이 제정되면 다를 것이다. 법에는 차별이 사회적으로 부당한 일이라는 공감대가 담겨있다. 내 잘못이 아니라는 확신으로 부당함에 맞서 싸워보겠다는 의지를 갖게 한다. 일상적 변화를 만들 차별금지법 제정은 그래서 우리 모두에게 너무나 중요한데, 국회는 정말 의지가 없는 것 같다.”

민선은 “더불어민주당 또한 애초에 법을 제정할 의지가 없는 권력집단이란 걸 확인한 투쟁이었다”며 “물론 국회를 통해서 제정될 수밖에 없으니 입법 투쟁을 벌였지만, 국회의 의지만을 기대해서는 어렵단 걸 여실히 느꼈다”고 말했다.

“결국은 사회적인 힘이다. 차별은 부당하다는 감각과 그 분노를 연결하는 활동으로 국회가 더 이상 차별금지법을 제정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드는 게 앞으로의 과제 같다. 차제연에서 차별금지법의 필요성을 많이 알리기는 했지만, 앞으로의 투쟁에서 더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기후정의동맹’의 출범,
“기후위기와 착취의 원인 같아”

기후위기는 인권운동사랑방이 차별과 더불어 최근 가장 주목하는 이슈다. 인권운동사랑방은 4월 28일 출범한 ‘체제전환을 위한 기후정의동맹’ 결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활동가 가원과 정록이 연대체에서 활동 중이다.

기후정의동맹은 다양한 분야의 사회운동이 결합한 연대체로, 자본주의 성장체제에 맞선 공동투쟁을 위해 조직화를 이어가고 있다. 언뜻 연관성을 찾기 어려운 인권운동과 기후위기 대응 활동에 대해서 가원은 “기후위기와 착취는 결국 같은 체제에서 비롯했기 때문에, 인권을 비롯한 사회운동의 과제와 기후위기는 동떨어진 문제가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기후정의동맹은 자본의 이윤을 위해서 생명과 자원을 착취하는 지금의 성장체제를 기후위기와 차별의 근본 원인으로 지적한다. 기후위기와 불평등을 해결할 유일한 길은 무한한 생산과 소비를 반복하는 체제를 바꾸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가원은 “생산에 대한 권리와 통제, 자본주의가 강요하는 속도와 성장의 문제를 바꿔내지 않고서는 노동자, 장애인, 여성, 성소수자 등 차별에 맞서는 주체들의 삶은 계속 위기로 내몰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해고위기에 놓인 석탄발전소 노동자, 민간자본의 재생에너지 난개발을 반대하는 지역주민, 극심한 악조건 속에서 농사를 짓는 농민과 지금의 기후위기는 연결돼있다는 얘기다. 가원은 “앞으로 더 폭넓게 운동 단체들을 조직할 계획”이라며, “각각의 운동세력이 자신의 관점에서 ‘기후정의’를 규정하고 실현해나가는 운동을 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가원 활동가 ⓒ 참여와혁신 김민호 기자 mhkim@laborplus.co.kr
가원 활동가 ⓒ 참여와혁신 김민호 기자 mhkim@laborplus.co.kr

“운동의 독립성 지키며
한 발 진전하는 사회운동 고민해야”

인터뷰에서 민선은 “인권운동사랑방을 시민단체라 규정하는 게 낯설다”고 말했다. 정책 생산과 의미 있는 제도적 진전이 시민단체 활동으로부터 있었지만, 시민단체가 제도권 정치로 진입하는 경로가 되어온 것에 강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

“인권운동사랑방은 출범 초기부터 ‘운동의 독립성’을 추구했다. 독자적 전망을 구축하며 대안을 만들기 위해 다양한 사회운동 단체들이 분투하고 있고, 그 중 하나로 인권운동사랑방이 있다고 본다.”

특히 민선은 이명박·박근혜 정부 이후 문재인 정부 5년을 지내면서 인권운동사랑방을 포함한 단체들이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문재인 정부 5년간 행보, 특히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죽음 이후 시민사회에서 보였던 태도에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 이번 대선을 앞두고도 마찬가지다. 더 이상 정권 교체와 정권 재창출, 민주와 반민주, 보수와 진보라는 구도 안에 운동이 갇혀서는 안 된다. 반성과 성찰이 필요하다. 현상 유지가 아닌 변혁, 즉 ‘다른 세상을 바라는 사회운동은 어때야 하는가’라는 질문과 고민을 해야 할 때다.”

다른 활동가·사회운동 단체들도 인권운동사랑방과 같은 문제의식을 함께 나누어가기 위해 고민하고 있다. ‘다른 세계로 길을 내는 활동가 모임’이 그 예다. 이들은 20대 대선을 앞두고 낸 공동성명에서 “같은 현실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다른 미래를 만들어가자”고 밝혔다. 민선은 “사회운동 단체, 활동가들은 현안에 대응하기도 바쁘지만, 한 발짝 진전하는 사회운동을 위해 함께 변화를 고민하고 준비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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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와혁신은 5월호에 소개한 ‘한국여성단체연합’에 5월 31일 후원금 32만 원을 전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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