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와 시민단체]⑤ 속도가 달라도 괜찮아
[참여와 시민단체]⑤ 속도가 달라도 괜찮아
  • 박완순 기자
  • 승인 2022.08.16 09:10
  • 수정 2022.08.16 09:1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느린학습자의 존재를 알리고 함께 살아갈 방안을 모색한다
[인터뷰] 느린학습자시민회 강근정 사무국장, 홍세영 이사

참여와 시민단체

<참여와혁신>이 매달 시민단체를 소개합니다. 노동을 주로 다루던 <참여와혁신>인데 ‘장르’가 달라진 게 아니냐고요? ‘참여’는 일터 내 민주주의뿐 아니라 일터 밖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데도 중요한 요소입니다. 참여민주주의학교 시민단체들을 만나며 여러 형태의 참여 경험을 <참여와혁신> 독자와 나누려 합니다.

참여와 시민단체⑤ 느린학습자시민회

“상담 전화가 왔어요. ‘저 서른아홉인데 어제 진단받았어요’라고 하는 거죠. 학령기에는 어떻게, 어떻게 부모님의 도움으로 커버가 됐던 거죠. 이제 20살 이후에 군대도 다녀오고 자격증도 따서 일을 하는데, ‘나는 왜 일을 못하지? 다른 사람들과 같이 일하는 게 어렵지?’ 이런 고민을 가지고 직장 생활을 하다가 길게 못 다니고 계속 직장을 바꾸는 거죠. 이런 생활이 반복되다가 우울증이 와서 몇 가지 검사를 받다 보니까 자신이 ‘느린학습자’였던 거죠.”

당사자에게도 생소한 개념인 ‘느린학습자’, 사회적으로 ‘느린학습자’가 알려진 지도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다. 매체를 통해 처음 알려진 것이 2014년이나, 많은 사람이 알고 있지 않다. 전공 교수임에도 몰랐다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느린학습자는 우리 곁에 꽤나 많이 존재하고 있다. 현재 한국 전체 인구의 13.59%가 느린학습자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한 학급당 3명의 아이들이 느린학습자인 걸로 보고 있다. 있지만 알려지지 않은 채 우리와 함께 있었던 것이다.

이들의 존재를 적극적으로 알리고, 이들이 사회 속에서 같은 시민으로 살아갈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하는 곳이 있다. 39살의 느린학습자가 상담 전화를 건 ‘느린학습자시민회’다. 지난달 20일 서울 성북구 느린학습자시민회 배움터 겸 사무실에서 사단법인 느린학습자시민회 강근정 사무국장, 홍세영 이사를 만나 여러 이야기를 나눴다.

느리게 배운다는 이유가
집 문밖을 나서지 못하는 이유여서는 안 된다

이들에게 가장 먼저 들은 이야기는 ‘느린학습자는 누구인가’였다. 느린학습자임을 판단하는 데는 지능 지수가 활용된다. 지능 지수만을 두고 봤을 때, 85 이상부터 평균 범주이고 70 이하는 지적장애로 본다. 그렇다면 ‘71과 84 사이’라는 경계선에 놓인 이들이 존재하는데, 이들이 느린학습자에 해당한다. 지능 지수 71~84를 경계선 지능(borderline intellectual functioning)이라 칭하기도 한다. 다만 느린학습자는 지능 지수로만 판단하지는 않는다. 경계선 지능에 놓인 이들과 비슷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도 포함된다. 느린학습자라는 말은 천천히 배우는 그들의 특성에서 따온 것이다.

느린학습자시민회에 따르면 느린학습자는 대한민국 전체 인구의 13.59%로 추정되며, 전체 인구의 5.1%인 장애 통계(2022년 보건복지부 발표)의 3배에 수치다. 학생인구로 파악했을 때는 80만 명에 이를 것으로 보고 있다. 한 학급당 3명 꼴이다. 20~29세 청년인구 중 90만 명이 느린학습자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느리게 배운다는 이유로 차별과 폭력을 경험하기도 한다. 학생일 때는 같은 반 친구들 혹은 선생님에게, 성인이 돼서는 직장 동료, 상사 혹은 고용주에게, 때로는 자신의 부모님에게서도 말이다.

홍세영 이사는 “학교에서 배우는 속도가 느리다 보니 멍하니 있을 때도 있고, 친구 사이 관계 맺기 기술이 서툴러서 친구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기도 한다”며 “어떤 선생님들은 반 평균을 깎는다고 하고, 느린학습자인 걸 밝히면 (개념을) 잘 모른 채 특수학급으로 가면 되겠다고 하는 경우도 있다”고 이야기했다. 또한 “직장에서는 맡은 일을 수행하는 데 오래 걸리거나, 간신히 맡은 일을 해도 그 이상 해내지 못하고 있다는 눈치를 받기도 한다”며 은근한 차별이 발생하기도 한다고 전했다.

학부모들은 자신의 아이가 느린학습자인 줄 모르고 학업 성취를 위해 공부를 자정 넘어서까지 시키기도 한다. 느린학습자인 걸 아는 경우 치료를 이유로 과외와 학원을 몇 개씩 다니는 것처럼 아이에게 좋다는 치료는 다 받게 한다. 실제로는 아이의 기능이나 학습 수준을 올리지 못하는데도 말이다. 주객이 전도된 셈이다. 그러다보면 ‘투자한 만큼 왜 성과가 나오지 않지?’라는 부모의 생각, 여러 치료실을 돌면서 지쳐 가는 아이의 마음이 더해져 느린학습자에게 상처가 되기도 한다는 게 홍세영 이사의 설명이다.

또 다른 문제도 있다. 강근정 사무국장은 “부모와 아이가 갈등이 있든, 아이가 학교에서 폭력이 발생했든 학교라고 하는 사회와 연결된 통로가 있었는데. 20살 성인이 되면서 모든 게 사라진다”며 “이 친구들이 학교를 졸업하고 나면 집 문밖으로 나갈 이유가 사라지고 자연스럽게 히키코모리가 되기도 한다”고 이야기했다. 이런 것을 심화시키는 데는 지원체계가 딱히 없는 현실이 한몫한다. 그래서 느린학습자가 사회 속에 안정적으로 자리 잡을 때까지는 장애인처럼 지원받을 수 있는 제도가 필요하다는 게 느린학습자시민회의 생각이다.

자조모임으로 시작해
평등·자립·연대를 지향하는 시민단체로

이러한 고민들이 학부모들을 중심으로 산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그러면서 부모들의 놀이체육을 함께 하는 등의 자조모임을 시작으로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2017년 서울시 동북권 NPO 지원센터의 공익활동 지원을 통해 느린학습자 지원 워킹그룹을 만들고 사회적 고민으로 확장시켰다. 거기에 느린학습자의 삶에 고민을 함께 나누고자 했던 시민활동가, 사회복지사, 연구자, 대안학교 선생님들이 모여 느린학습자시민회를 만들었고 2021년 4월 24일 창립총회를 열고 활동을 알렸다.

느린학습자시민회 2차 총회 ⓒ 느린학습자시민회

이러한 마음들이 모여 만든 느린학습자시민회가 지향하는 바는 느린학습자시민회를 소개하는 소책자에서 나와 있었다. ‘느림이 개인의 특성으로 사회에서 인정받고, 느린학습자의 생애주기별 어려움을 같이 고민하고, 근원적 불평등을 제거해 사각지대 해소와 느린학습자가 다양성으로 존중받을 수 있는 사회통합에 기여해 느린학습자 당사자가 자신의 권리와 삶을 온전히 누리길 염원한다.’

느린학습자시민회가 추구하는 가치는 평등·자립·연대 3가지다. 느린학습자로 겪는 모든 사회적 차별을 없애고, 느린학습자의 개별성과 특수성이 존중되는 평등사회를 실현하는 의미를 활동에 담고자 한다. 자립은 느린학습자가 가족이나 타인에게만 기대 살지 않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과 연결돼 있다. 연대의 가치를 추구하는 것은 평등과 자립을 위해서 사회적 약자를 포함한 모든 이들과 함께 살 수 있는 고민의 기본이다.

이러한 가치를 추구하기 위해서 느린학습자시민회 느린학습자의 존재를 알리고 권리를 옹호하는 활동을 해 나가고 있다. 느린학습자에 대한 인식 개선 활동은 물론이고 관련 정책연구와 자립지원 체계를 만들어 가고 있다. 느린학습자시민회 사무실에 있는 배움터처럼 운영 공간을 통해 각 느린학습자에게 맞는 학습이나 신체 활동을 지원하기도 한다. 현재 배움터에서는 7명의 학생들이 그들의 속도에 맞는 배움을 진행 중이다. 또 최근 시작한 느린학습자시민회의 활동은 상담이다. 강근정 사무국장은 최근 서울시에서 느린학습자를 위한 서울시경계선지능인평생교육지원센터가 만들어지면서 느린학습자에 대한 관심이 서서히 커지고 있고 덕분에 상담도 늘었다고 전했다. 부모들의 상담은 물론 당사자의 상담도 많다.

느린학습자시민회,
능동적인 시민을 만들다

무엇보다도 느린학습자시민회는 능동적인 시민을 길러내는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홍세영 이사는 지금 진행 중인 느린학습자 청년 모임을 예로 들었다.

“부모 손에 끌려온 친구들이 50% 정도 됐어요. 처음에 왔을 때는 그냥 가만히 고개 숙이고 하는 말만 듣고 했던 친구들이 있었죠. 한 4회 지났을 때부터였나 본인들이 알아서 나오더라고요. 부모님하고 소통해보면 그 친구들이 힘들었다고 불평을 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게 자신들이 이곳에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니까 불평도 생기는 거죠. 그러더니 청년들이 스스로 일자리를 찾기 위해 스터그룹을 만들기도 하고요. 자신들을 알리기 위해 악플이 달릴 수 있음에도 인터뷰를 계속하는 친구도 있어요.”

느린학습자 당사자뿐 아니라 부모들도 능동적인 시민으로 바뀌기도 했다.

“그 청년들의 부모들이 처음에는 이 친구들을 하루 빨리 사회에 나가게 해결해달라고 요청을 많이 하셨는데, 우리 아이들의 성장을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 부모들 스스로가 고민하기 시작하더라고요. 사회적 제도의 변화에도 눈을 돌리기 시작하셨고요.”

강근정 사무국장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수혜자적인 마인드가 아닌 시민의 한 명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모습들을 볼 때가 있었어요. 느린학습자시민회가 뭘 해달라는 게 아니라, 시민회에 가입도 하고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이야기를 나누는 거죠.”

느린학습자를 위한 공간을 넘어
각자의 삶의 속도를 존중하는 사회로

한동안 삶의 속도에 대한 고민들이 담긴 말들이 사회적으로 많이 만들어졌던 때가 있다. ‘슬로우 라이프’라든지 ‘나는 나만의 속도대로 산다’든지 ‘느리게 살아도 괜찮다’든지. 그럼에도 여전히 빠름이라는 삶의 속도가 미덕이고 최고의 가치인 이유는 각자가 가진 고유한 삶의 속도를 인정하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해서 그럴 수도 있겠다. 강근정 사무국장의 이야기처럼 말이다.

“저는 속도가 되게 빠르기 때문에 미친 듯이 달리고 있단 말이죠. 근데 느린학습자인 제 아이는 엄마 요새 안 행복해 보인다는 거예요. 걔는 내가 보기에 되게 답답한데, 스스로는 자기 속도에 살고 있는 거니까 행복한 거죠. 거꾸로 제가 이해 안 되고 답답해서 힘든 부분도 있지만 아이는 자기 속도대로 성장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제 아이를 통해서 굉장히 많이 배우고 달라졌어요. 그렇지 않았으면 진짜 미친 듯이 앞으로만 내달리는 사람으로 살았을 거예요.”

어쩌면 느린학습자시민회는 느린학습자를 위한 시민단체를 넘어 능력 중심의 너무 빨라 탈이 나는 사회에 변화의 기회를 제공하는 곳일지도 모른다. 인터뷰를 마치고 강근정 사무국장과 홍세영 이사는 “느린학습자시민회의 작은 움직임이 나비효과로 연결돼 한국사회 교육체계의 변화의 첫 걸음이 될 수 있기를 상상해본다”고 이야기했다.

느린학습자시민회와 함께하기 ▶ 후원하기

참여와혁신은 7월호에 소개한 ‘녹색교통운동’에 지난 8월 8일 후원금 30만 원을 전달했습니다.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