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민주적 국가’를 다시 생각한다
[기고] ‘민주적 국가’를 다시 생각한다
  • 참여와혁신
  • 승인 2023.06.13 16:36
  • 수정 2023.06.13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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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황기돈 나은내일연구원 원장
황기돈 나은내일연구원 원장

자본주의 역사에서 다양한 형태의 국가가 생성, 소멸, 존재해 오고 있다. 권위주의적, 파시즘적 국가, 협조적, 복지국가적 국가 외에 오늘날의 대한민국처럼 민주적 국가도 대표적 국가 형태에 속한다. 한 국가가 민주적 형태를 띠는 것은 국가의 본래적 성격 때문이 아니다. 그 이유는, 자신의 존립 정당성을 끊임없이 찾아야 하는 국가의 자기모순성의 결과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국가의 생성 기반은 노동과 자본 사이의 균열과 이로 인한 사회경제적 불안정과 불평등, 정치적 부자유의 존재다. 사회의 통합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할 수단으로 의도적으로 구성된 국가는 이 문제를 완전히 제거하지는 못한다. 사회의 균열이 해소되면 국가 스스로의 존재 이유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국가의 자기모순이다.

국가의 자기모순으로 인해 국가는 사회의 균열을 지양하지 못하고 이를 유지한 상태에서 자유, 평등, 연대 등 민주주의의 주요 구성요소를 다양한 형태로 조합해 계급적 균열을 규제 및 관리한다. 이때 국가의 기능성은 사회경제적 불안정과 불평등 등을 정치적 공동체성, 자유, 평등 등으로 충분히 보상받았다고 국민이 느낄만한 근거를 만들 수 있는지에 달렸다. 사회 균열에 대한 충분한 보상의 결과인 대중적 충성 확보 방안에 대한 필자의 이론적 논의(1996)와 2023년 한국의 현실을 대비해 본다.

첫째, 정치적 공동체성은 개인이나 집단이 한 공동체에 속해 스스로가 공동체의 일원이라고 느낄 때 만들어진다. 그러려면 소속감은 물론 그 안에서 자신과 가족, 그리고 그들이 속한 집단이 일하며 일정한 수준 이상으로 먹고살 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확신이 필수 요소다. “영도력의 비결? 글쎄… 머를 마이 멕에이지, 머.” 영화 <웰컴 투 동막골>의 명대사 중 하나로서, 마을 주민의 절대적 존경을 받는 지도력의 비결을 묻는 방문객의 질문에 대한 마을 지도자의 무덤덤해 보이는 답변이다. 답변의 실제적 의미는 심오하다. ‘경제적인 것이 정치의식을 지배한다’라는 유물론적 정치경제학 핵심명제의 드라마적 표현이다. 결국, 어떤 정치적 민주주의도 경제와 시민의 경제적 생활을 어느 정도 확실한 수준에 올려놓지 못하면 위험해진다.

한국 경제의 외형은 세계 10위권으로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그런데 2023년은 경기의 급하락과 노동시장의 이중구조와 고용 불안전성의 지속, 자산의 불평등 등 구조적 문제는 아직 해결의 단초를 찾지 못하고 있다. 아니, 그보다는 해결의 방법은 알지만, 단지 이를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더 타당해 보인다. 그 이유는 바로 국가 스스로의 본질적인 존재 이유를 해소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국가의 정치적 통합이나 배제의 기준은 명료하다. 자본증식에 기여라는 국가의 기능에 충성을 보이는지 여부다. 가치증식 과정을 경제적 효율성 원칙에 따라 수행하거나 그럴 준비가 된 집단이나 이익단체는 국가 경영에 민주적 참여, 그리고 성과의 배분이 허용된다. 이 기준은 개인은 물론 집단이나 이익단체에도 적용된다.

2023년 한국에서는 경영계가 국가의 민주적 경영의 유일한 동반자인 것처럼 보인다. 원활한 가치증식을 위해 대규모 감세, 각종 촉진 및 지원책이 제공되고 있다. 반면에, 노동계는 정치적 공동체에서 배제되고 있다. 정부와 각종 정책과 관련해 갈등 관계를 유지하고 사회적 대화에선 자발적으로 배제됐던 민주노총은 별론으로 하자. 오랫동안 경영계, 정부와 함께 사회적 대화를 통해 민주적 국가의 외형을 갖추어 온 한국노총도 예외가 아니다. 게다가 노사관계의 자율적 해결 원칙보다 경찰력 동원 등 공권력 행사를 포함한 법치 원칙도 노사관계 양 당사자 중에서 주로 양대 노총 중심의 노동계를 겨눈 것으로 보인다.

둘째, 국민주권 원리와 권력분점 원리는 법의 형태로 제도화된 독점적 공권력이 민주적으로 기능하기 위한 법률적 토대다. 반면에 앞선 경제적 안정과 정치적 통합은 민주적 국가의 정치적 정당성 확보의 물질적 기반이다.

국민주권의 원리는 헌법 제1조에 명기돼 있다. ①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②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이 원리는 법체계의 구성을 국민의 고유한 이해관계에 따른 ‘자율적 입법’이라는 외형을 갖추게 하고, 이는 다시 해당 법체계의 정당성을 보장한다.

입법과정에서 국민주권 원리의 실현은 한국이 1987년 이후 형식적, 정치적 민주화를 이루어 냈다는 평가의 핵심 근거다. 그리고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은 헌법의 국민주권 원리를 현실에구현한 정치적 사건이다.

법 집행과정에서 권력분점 원리는 독점적 폭력인 공권력(행정권) 행사를 국민 스스로나 그 대표가 통제할 수 있다고 느끼게 한다. 이를 기반으로 국민은 자신의 삶이나 자유 등 기본권이 법질서로부터 모두가 평등하게 보호받을 뿐 아니라 그 속에서 만개할 수 있다고 믿는다.

한국 국민의 법치주의에 대한 불신이 심각한 수준이다. 한국법제연구원의 ‘2021 국민 법의식 조사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국민의 60.7%는 “법은 힘 있는 사람의 편”이라고 응답했다, 그리고 ‘법이 공정하게 집행된다’라는 응답은 53.8%에 불과하고, 법치주의가 구현되지 않는 이유로는 ‘사회지도층의 법 준수 미흡(32.8%), ‘부적절한 법집행(27.9%)’, ‘권위주의(20.6%)’, ‘국민 법의식 부족(18.4%)’ 등의 순이었다. 2023년을 기준으로 하는 조사보고서에선 이러한 불신이 해소 혹은 심화할지 궁금하다. 노사관계까지 법치의 대상으로 삼는 정부의 집권 시기라서 대폭 개선될 것으로 기대한다면 무리인가?

민주적 국가의 기능성을 보장하는 대중적 충성의 이론과 실제를 따져본 결과, 경제도, 경제·사회적 불안정 및 불평등도 아직 개선의 여지가 크고, 노동계는 정치적 공동체에서 철저히 배제되고 있으며, 국민의 법 행사에 대한 불신도 심각한 수준이다. 대중적 충성이 높지 않을 가능성이 커 국가의 민주적 기능을 강화할 필요성이 있다. 국가 경영에서 민주주의 구현은 단순한 정치적 구호가 아니라 가치증식의 핵심 기제다. 민주주의 포기가 원활한 가치증식을 어렵게 할 수 있다. 게도 구럭도 다 잃을 수 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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