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크런치 모드, 그 잔인함에 대하여
[기고] 크런치 모드, 그 잔인함에 대하여
  • 참여와혁신
  • 승인 2022.05.04 18:36
  • 수정 2022.05.04 1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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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황기돈 나은내일연구원 원장
황기돈 나은내일연구원 원장
황기돈 나은내일연구원 원장

몇 번의 실패 후 겨우 책상 앞에 앉았다. 원고 마감일이라서다. 쿵쾅~쿠~쿵쾅, 책상에 앉자마자 바로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기 시작한다. 가슴을 눌러가며 자판을 두들긴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귓속에선 우~웅 우~웅 소리가 점점 커진다. 며칠 밤을 지새우며 앓았던 편두통이 다시 올까 싶어 겁이 덜컥 난다. 눈도 금방 침침해진다. 집중이 어렵다. 뜨겁고 찐한 커피를 한잔 마시고 싶지만, 헐어버린 입안과 혓바닥이 참을 수 없이 아파 포기한다. 찬물 한잔 마시고 싶다. 컵은 수도꼭지에 대고 머리는 정수기 상단에 기댄다. 흔들리는 몸을 겨우 지탱하지만, 눈은 뜨지 못한다. 체중은 5kg 이상 빠졌다. 

무슨 일이냐고요? 코로나19에 감염된 것도, 다른 중병이 생긴 것도 아닙니다. 그냥 ‘크런치 모드’(Crunch Mode) 후유증입니다. 2022년 3월 1일부터 4월 18일까지 약 50일 동안 크런치 모드로 일하고 10일 정도 쉰 다음, 이 글을 쓰고 있는 4월 29일까지도 멈춤 없이 겪고 있는 증상입니다. 

왜 이런 일을 저질렀냐고요? 출판사에서 윤석열 대통령 임기 시작에 맞추어 책을 발간하자는 제안이 있어서 처음에는 고민했습니다. 천성이 게을러서 감당하기 어렵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문득 윤석열 당선자가 대선 과정에서 정보통신업계 관계자의 말을 전하면서 사회에 던진 화두, 즉 ‘주 120시간 일하고 푹 쉬기’를 실제로 경험해 보면 어떨까 싶은 호기심에 이 어리석은 일을 저질렀습니다. 

현행 근로기준법의 선택적 근로시간제 규정을 참조하며 작업했습니다. 책을 쓰는 일이라 연구개발 업무의 정산기간 3개월을 염두에 두고, 근로일 사이에 11시간 이상의 연속휴식시간을 가져야 하지만, 4주 정도는 1주 120시간, 즉 1일 17시간(= 119시간) 일했습니다. 법 위반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리했습니다. 주 120시간 노동을 경험해야 하니까요.

그런데 채 1주일도 지나지 않아서, 앞서 언급한 각종 증상이 하나둘씩 생겨나고 강도가 점차 세지더군요. 이어지는 3주는 지친 몸을 견딜 수가 없어서 법대로 1일 13시간, 주 90시간만 일했습니다. 하루 평균 4시간을 줄여서 일했지만, 몸은 이미 만신창이가 된 후라서 생산성과 글의 품질은 말 그대로 엉망이 되더군요. 고치고 또 고치기를 수차례 반복할 수밖에요. 이러다 그냥 쓰러질 것 같다는 두려움에 휩싸인 적도 여러 번입니다.

탈고까지 7주 동안 주 평균 106.6시간, 총 746시간 작업했네요. 정규근로시간은 280시간, 초과근로시간은 466시간입니다. 초과근로시간에 대해서는 노사합의에 따라 통상임금의 150% 가산수당을 받거나 혹은 보상휴가가 가능합니다. 정산기간이 3개월이니까 4월 19일부터 5월 말까지 보상휴가를 쓴다면 약 256시간입니다. 나머지 210시간은 가산수당으로 받을 수 있겠지요. 6월 초에는 또 크런치 모드로 일을 시작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현행법에 따르면, 1년에 4번 이런 방식으로 일해야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제 나이와 체력이 표준이 아니라서 일반화는 어렵겠지만, 저는 견뎌 낼 자신이 없습니다.

제 경험을 윤석열 당선자의 대선 공약, 즉 정산기간을 1년(55주)으로 확대해 보면, 대략 이런 계산이 나옵니다. 최대 28주 크런치 모드로 일하고(2,984시간), 초과근로시간(1,864시간)에 대해 27주 보상휴가(1,080시간)와 784시간에 해당하는 통상임금의 150% 가산수당. 혹은 초과근로시간을 ‘근로시간계좌제’에 저축해 두었다가 나중에 장기휴가 혹은 주4일제 근무로 전환도 가능하다는군요.

7주의 후유증이 이 정도인데, 28주를 크런치 모드로 일하고 나면 내가 어떤 상태일까? 짐작이 가지 않아서, 아니 짐작하기 싫어서, 그냥 ‘크런치’의 우리말 뜻을 찾아봤습니다. 네이버 영어사전에 따르면, “으드득[뽀드득 등](단단한 것이 으스러질 때 나는 소리)”입니다. 섬뜩하지만, 지금의 제 몸 상태를 가장 잘 드러내는 단어인 듯합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 4배나 더 연장된다면?

그래서 묻습니다. 왜 몸을 먼저 으스러뜨리고 나서, 원상 복구해야 합니까? 한 번 으스러진 몸이 그리 쉽게 회복되나요? 그러다 몸과 마음에 장애라도 오면? 얼마나 더 많은 사람이 일하다가 과로사, 사고, 질병으로 죽고 다쳐야만, 성찰하고 이윤의 원천을 다른 곳에서 찾을까요? 이제야 겨우 방향이 잡혀가고 있는 세계 최장의 노동시간, 세계 최악의 ‘산재국가’라는 오랜 오명에서 벗어나기가 그리 부담스러운가요? 

게다가 사회가 공정한 전환과 상식을 논하는 중에도 일부는 크런치 모드가 특정 업종의 특성이라며, 그리할 수 있도록 법과 제도를 바꾸어주어야 한다지요. 이런 주장은 제가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대한민국, 즉 ‘세계 10대 경제 강국’, ‘선진국’, ‘경제성장과 민주주의를 동시에 달성한 유일한 나라’와 어울리지 않는, 참 못난 우격다짐입니다. 크런치 모드를 실제로 경험해 본 제 의견입니다. 

이런 문제 제기와 그에 대한 제 나름의 답을 회복력(Resilience), 성찰이라는 개념과 헌법 정신에서 찾아가며 힘겹게 써 내려간 책이 곧 발행될 ‘2022 한국의 노동과 윤석열 정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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