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부끄럼을 아는 정치인을 기다리며
[기고] 부끄럼을 아는 정치인을 기다리며
  • 참여와혁신
  • 승인 2022.08.03 12:50
  • 수정 2022.08.03 1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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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황기돈 나은내일연구원 원장
황기돈 나은내일연구원 원장
황기돈 나은내일연구원 원장

바닷가로 휴가 여행은커녕 가까운 계곡으로 외출조차 엄두를 못 낼 무더위다. 딸과 함께 장을 보고 옆지기가 정성껏 끓여 낸 해산물 잔뜩 들어간 보양탕 한 그릇에 멍 때리기가 올여름 휴가의 주된 메뉴다. 그런데 멍 때림이 익숙지 않아서인지 지루해지는 건 오래 걸리지 않는다. 머릿속을 맴돌던 오만 가지 생각 중에서 두 단어에 문득 꽂힌다. ‘부끄러움’과 ‘혁신’. 후자는 다음 글의 주제로 삼기로 하고, 오늘은 부끄러움에 집중한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군상의 작태가 과거 오랫동안 넘쳐났고 앞으로도 오랫동안 그럴 것으로 보여서다. 

부끄러움은 내면적 도덕으로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조건이다. 맹자는 의롭지 못함을 부끄럽게 여기는 마음(수오지심·羞惡之心)을 타인의 불행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측은지심·惻隱之心), 타인에게 양보하는 마음(사양지심·辭讓之心), 옳고 그름을 판별하는 마음(시비지심·是非之心)과 함께 사단(四端)이라 부른다. 사단은 모든 사람이 다 가지고 있는 선천적인 도덕적 능력으로서 인간의 착한 본성(덕, 德)의 발로다. 맹자의 성선설(性善說)은 논외로 하더라도, 사단이 시사하는 바는 분명하다. 부끄러움은 인간을 스스로 반성하며 성찰을 통해 지금보다 나아질 수 있는 존재로 만드는 힘, 즉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내면적인 힘이다. 

부끄러움은 동시에 사회적 덕목이자 정치인에게 요구되는 강령이다. 포숙과 함께 ‘관포지교’의 한 당사자인 관중은 저서 관자(管子)의 목민편(牧民篇)에서 나라의 기강을 세우는 네 가지 벼리, 즉 사유(四維)를 제시한다. 예(禮), 의(義), 염(廉), 치(恥) 중에서 하나가 없으면 나라가 기울고, 둘이 없으면 위태롭게 되며, 셋이 없으면 근간이 뒤집어지고(전복·顚覆), 넷 모두 없으면 망해 다시 일으킬 수 없다(멸절·滅絶)라고 경고한다. 한 나라의 흥망성쇠를 결정하는 사유는 나라의 모든 구성원과 공직자, 특히 정치인에게 더욱 엄격하게 적용해야 할 덕목이다. 그 누구보다 그들의 영향력이 크기 때문이다.

맹자의 사단과 관중의 사유를 관통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떳떳하지 못해 느끼는 부끄러움(수羞, 치恥 혹은 羞恥)이다.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이 인간다운 인간이고, 부끄러움을 아는 자가 다스리는 나라가 강한 나라다. 이것이 다산 정약용이 한 상소문에서 “네 가지 중에서 더욱 중요한 것은 부끄러워함이다”라고 지적한 이유고, 오늘의 주제가 부끄러움인 이유다. 

한국은 오랫동안 예의와 염치라는 가치를 내재화한 ‘동방예의지국’으로 칭송돼 왔으나, 실제에서는 예의와 염치없는 사람들이 나라를 다스렸다. 일제 부역자가 나라를 다스렸던 시절은 논외로 하더라도, 수십 년 전 정치군인이었던 어떤 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권력과 돈을 탐하다가 그중 일부 행위가 불법으로 처벌받게 되자 “왜 나만 가지고 그래”라며 세상을 원망하기도 했다. 그저 자기만 ‘운이 나빴다’라는 불만을 드러낸 것이지만, 필자에게 이 말은 그와 같은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러했다’는 사실을 토설한 것으로 읽혔다. 

그들의 죄상은 증언, 역사연구와 재판을 통해 밝혀졌다. 권력 탈취를 위해 사람의 목숨을 앗는 것은 인간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와 의리, 즉 인간에 대한 예의(禮義)가 아니다. 권력을 남용해 축적한 부는 청렴과 결백, 검소함과 곧고 바름의 뜻으로 쓰이는 염(廉)과는 정반대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마지막 숨이 넘어갈 때까지도 잘못된 언행에 대한 부끄럼(恥)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릇된 것을 좇은 걸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무리에게서 진심어린 반성이나 사과를 기대하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였다. 부끄러움을 속으로만 삼키는 국민과 달리 부끄럼을 모르는 군상이 권력을 휘두르는 시대를 뭐라 규정해야 할까? 야만!

정치는 군사정권의 야만의 덫을 벗어나 민주화를 이뤘지만, 또 다른 부류의 부끄럼 모르는 정치인들이 정치권력에 스며들고 있다. 불법 행위를 저질렀거나 그럴 혐의가 있는 정치인은 이를 부끄러워하며 반성, 성찰하고 법적 처벌을 받거나 국민에게 사죄하며 상응하는 정치적 책임을 져야 한다. 주권자 국민에 대한 대리인의 예의다. 그런데 작금에는 부끄럼보다 ‘공소시효’나 ‘피의자 방어권’ 뒤에 숨거나, 보다 적극적으로 법의 허점을 파고들어 법망을 빠져나가는 법기술자로서의 능력을 오히려 자랑스러워하는 정치인이 늘어난다. 

부끄러움이 지극히 당연한 상황에서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비정상적인 생리 반응과 가치 체계로 무장한 이들을 표현하는 말이 후안무치(厚顔無恥)다. ‘낯이 두껍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이나 그와 유사한 언행을 보이는 무리가 한 나라를 다스리거나 그 일원이라면, 그 나라를 과연 공정하게 법이 다스리는 나라라고 부를 수 있을까? 국가운영의 대원칙으로 천명된 ‘법치’와 정치 현실의 괴리에 대해 국민은 후안무치한 자들을 대신해서 부끄러워하기만 할까? 

정치인에게 예의염치(禮義廉恥)라는 네 가지 덕목을 모두 바라지는 않는다.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와 행해야 할 바른 의리나 지향하는 가치가 서로 다를 수 있어서다. 가치와 사회의 다양성을 존중한다손 치더라도 부끄러움을 국정운영의 핵심 축으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까지 접을 순 없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은 내 편이더라도 과감히 솎아내고, 부끄럼을 아는 인재는 적진에서라도 두루 찾아내야 한다. 자신의 치부조차 과감히 드러낼 수 있는 진정 용감한 사람만이 진심으로 겸손(謙遜)한 태도로 국민의 뜻을 받들 인재일 터다. 

‘겸손하게 국민의 뜻을 받들겠습니다.’ 제20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백서의 모토다. ‘남을 존중하고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태도’로 ‘함께 잘사는 국민의 나라’를 만들라는 국민의 뜻을 받들겠다는 약속인 셈이다. 부끄럼을 아는 사람만 등용해 이 약속만은 제발 잘 지켜줬으면 좋겠다. 그래야만 나라가 망해서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없을 지경에 몰리지는 않을 것이다. 개혁이나 혁신, 즉 기운 것을 바로 잡고, 위태로운 것을 안정시키며, 뒤집어진 것을 일으켜 세워 바로 잡는 것은 그 다음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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