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포자기 심정”이라는 산업단지 노동자
“자포자기 심정”이라는 산업단지 노동자
  • 백승윤 기자
  • 승인 2023.08.31 14:35
  • 수정 2023.09.06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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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단지 노동권 위해 지역 당사자 간 협력체 필요
“산업단지, 지역 공동체의 지속과 발전 목표 분명히 해야”
민주노총, 30일 ‘산업단지 노동자 실태조사 토론회’ 개최

스마트, 첨단, 그린. 산업단지에 앞에 붙는 수식어는 산업단지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실태를 반영하지 못한다. 개발과 성장, 효율에 맞춰 산업단지를 개발하는 60여 년간 산업단지 노동자들은 사실상 방치돼 왔다. 민주노총이 진행한 실태조사는 법마저 외면한 산업단지 노동자들의 현실을 여지없이 보여준다.

전국 16개 지역 산업단지 내 노동조합 미가입 노동자 2,697명을 대상으로 한 달여간(3월 20일~4월 28일) 진행한 노동조건 실태조사를 결과를 민주노총은 지난 8월 31일 국회 도서관에서 열린 ‘산업단지 노동권 실태와 법제도 개선과제 토론회’에서 공개했다. 최정우 민주노총 미조직전략조직국장의 조사 결과 발표 이후 정부와 국회, 지역, 심지어 노동조합마저 이들에 대한 관심이 부족했다는 쓴소리가 나왔다.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게 거의 없다”고 서다윗 금속노조 서울지부 남부지역지회 지회장은 말했다.

8월 31일 서울 영등포구 국회 도서관에서 열린 ‘산업단지 노동권 실태와 법제도 개선과제 토론회’ ⓒ 참여와혁신 백승윤 기자 sybaik@laborplus.co.kr

‘공짜노동’에 4대보험 미가입···
5인미만·여성·비정규직은 더 열악

실태조사에선 근로기준법 등 노동법을 온전히 적용받지 못하는 5인 미만 근무 사업장 노동자의 열악함이 여실히 드러났다. 노동 조건·환경은 여성·비정규직 등 노동 취약계층일수록 낮은 수준을 보였다.

노동자의 33.1%는 임금체불을 경험했다고 답했다. 조기출근 등 ‘공짜노동’을 경험한 산업단지 노동자는 31.3%로 나타났다. 2023년 민주노총이 전체 노동자를 대상으로 진행한 실태조사 평균 26.8%보다 높은 수치다. 장시간노동자·초단시간노동자의 비중이 높았는데, 주52시간 이상 일하는 노동자 비율이 42.3%로 가장 많았고, 주 15시간 미만 일하는 노동자가 35.1%로 뒤를 이었다. 10명 중 2명은 출퇴근 기록 없이 근무했다. 그중 절반 이상(51%)이 5인 미만 사업장 소속 노동자다. 포괄임금제가 공짜노동의 수단으로 악용될 소지가 다분해 보인다는 지적이 나온다.

산업단지 노동자의 4.9%는 공휴일에도 쉬지 못했다. 공휴일에 일하는 노동자 비율은 비정규직(14.1%)이 정규직(2%)보다 7배 많았다. 공휴일에 유급휴일을 적용받는 노동자는 70%로 나타났다. 10명 중 1명은 연차를 자유롭게 사용하지 못했고 미사용 수당도 못 받았는데, 5인 미만 사업장 노동자는 5명에 1명꼴이었다. 연차 사용 제약은 비정규직(20.4%)이 정규직(6.9%)보다 많이 겪었다.

노동자의 31.8%는 휴게시설이 없는 사업장에서 일하고 있다. 사업체 규모별로는 5인 미만(43.8%), 5인~19인(39.7%), 20인~29인(35.1%), 30인~99인(32.2%)의 순으로 해당 응답률이 높았다. 휴게시설 설치 의무 대상인 20인 이상 사업장임에도 불구하고, 20~99인 이상 사업장 중 약 30%가 휴게실을 갖추고 있지 못했다.

4대보험의 경우 건강보험 가입 비율은 92.3%로, 5인 미만 사업장 노동자의 가입률은 87.7%에 불과했다. 산재보험 가입 비율은 84%, 국민연금 가입 비율은 90.5%, 고용보험 가입 비율은 90.9%로 나타났다. 모두 여성·비정규직일수록 가입 비율이 낮았다. 비정규직의 가입률은 정규직 대비 무려 30%p 안팎의 차이를 보였다. 건강보험(70.3%)을 제외한 사회보험 가입률은 60%대에 그쳤다. 5인 미만 사업장 노동자도 유사한 수치를 보였다.

5대 법정의무교육 실시에 대해선 개인정보보호교육(37.7%), 퇴직연금교육(21.1%), 직장내 장애인인식개선교육(29.4%) 모두 절반에 훨씬 못 미쳤다. 산업안전보건교육과 직장내 성희롱예방교육은 각각 64.4%와 55.9%로 나타났다.

강기영 민주노총 부산본부 조직국장은 “부산 지역 산업단지에 30인 미만 작은 사업장들이 많다 보니 노동법상 제외되는 법 조항들이 존재하며 지켜져야 할 법 기준마저도 지켜지지 않는 사업장들이 많다”며 “주변의 사업장 또한 지금 일하고 있는 사업장과 비슷하기에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일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강기영 조직국장 분석에 따르면, 부산 산업단지 내 30인 미만 사업장은 77%를 웃돈다.

강기영 조직국장은 “노동자들은 열악한 노동환경 속에 익숙해져 있어서 스스로 위험작업을 하고 있다는 인식 정도가 낮다”며 “산업안전보건법 등에서 위험성이 있는 작업 형태임에도 불구하고 관행적으로 해오던 업무이므로 위험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토로했다. 안전교육이 형식적으로 진행되는 것 또한 문제로 꼬집었다.

노동자·사업주 한계에 몰린 산업단지
“머리 맞대고 대안 모색 못 할 것도 없다”

산업단지, 특히 작은 사업장이 밀집한 곳은 사업장 안팎으로 노동자 의견을 수렴할 체계가 부실하다. 민주노총 실태조사를 보면 사업장에는 노동자의 참여를 보장하는 기구도 제대로 마련돼 있지 않았다. 노사협의회가 있다는 응답은 17.6%에 불과했고 ‘없다’는 53.7%, ‘모른다’는 24.1%였다. 노사협의회 설치가 법적 의무인 30인 이상 사업장으로 좁혀도 30.7%의 노동자만 ‘있다’고 답했다.

근로자대표가 있다고 응답한 노동자는 22%에 그쳤다. 근로자대표 선출 방식에 대해 ‘모름(37.7%)’이나 ‘해당 없음(44.1%)’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그밖에 직접 선거(8.8%), 간접 선거(2.4%), 회사 지명 후 선거(1.8), 회사 지명(5.2%) 등이다. “근로자대표의 존재와 활동이 현장 노동자와 무관하게 전개되고 있음을 시사한다”며 최정우 국장은 “노조할 권리 확대를 전제로, 노사협의회와 근로자대표제의 실질적 개선이 모색돼야 할 것”이라고 진단했다.

지역 차원의 노사정 협력을 강화해야 만성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주장도 나왔다. 열악한 중소규모 사업장이 밀집한 산업단지의 특성상, 노사의 힘만으론 노동조건과 근무환경을 상향 평준화하기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서다윗 지회장은 “기업들의 열악한 재정상황으로 63% 노동자들이 중위소득 이하며, 85%의 노동자들이 연 5,000만 원의 수입도 못 가져가는 만성적 저임금 실태를 낳고 있다”고 했다.

서다윗 지회장은 서울디지털산업단지 대다수 사업장의 노동자 수를 20~30명 미만으로 추정하며 “법적으로 이들 노동자의 이해를 대변할 수 있는 최소한의 제도인 노사협의회조차 보장되지 않는 조건에서 많은 노동자들이 일하고 있다는 점을 추론할 수 있다”고 했다.

이어 “노동조합, 정부·지자체, 사용자단체(특히 대기업)가 함께 실질적이고 실현가능한 일부터 만들어 가 봐야 한다”며 “이러한 틀을 제도적으로 정착시키고 지속적으로 활동이 이뤄져야 한다”고 밝혔다. 서다윗 지회장에 따르면, 2022년과 2023년 실태조사를 비교한 결과 ‘휴게시설이 없다’고 답한 노동자 비율은 52%에서 35.7%로 감소했다. 지난해 서울디지털산업단지에 공동휴게실을 마련하기 위한 지역 노동조합과 고용노동부지청, 지역상공회 등의 공동노력이 휴게시설 문제를 일정 부분 해소했다는 게 그의 분석이다. 서다윗 지회장은 “법과 제도가 정비되기 전이라도, 산업단지의 주요 행위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대안을 모색 못 할 것도 없다”고 덧붙였다.

경기도 시흥시 반월공단 내 자동차 부품사에서 일하는 두 노동자가 점심식사를 마친 뒤 일터로 돌아가고 있다. ⓒ 참여와혁신 백승윤 기자 sybaik@laborplus.co.kr
경기도 시흥시 반월공단 내 자동차 부품사에서 일하는 두 노동자가 점심식사를 마친 뒤 일터로 돌아가고 있다. ⓒ 참여와혁신 백승윤 기자 sybaik@laborplus.co.kr

최정우 국장은 “산업단지에 일하는 노동자는 240만 명에 달한다고 하지만, 일하는 노동자를 위한 노동정책과 복지정책은 부재하다. 실태조사 결과를 보더라도 고충이나 의견을 전달할 통로조차 없다”며 “산업단지 노동자가 참여하는 산업단지 정책 반영 체계가 필요하다”고 했다. 해결 방안으로는 ▲산업단지 운영위원회에 산업단지 내 노동조합 등 노동자 대표 참여 ▲산업단지 특성에 맞는 노사정 협의기구 설치 등을 제시했다.

법령이나 국가 차원의 산업단지 개발 과정에서 노동이 배제된 부분도 고민할 지점이다. 강기영 조직국장은 “부산시에서 산업단지 고도화사업이 진행되고 있지만 노동자를 위한 의견수렴 절차 등은 진행되고 있지 않으며, 기업주들의 요구를 바탕으로 산업단지 조성을 진행하는 것이 현실”이라며 “교통, 휴게시설, 작업복 세탁소, 복지관, 문화시설 등은 산업단지 조성 과정에서 노동자들의 의견을 수렴했다면 충분히 세울 수 있었다고 본다”고 지적했다.

유혜연 한국산업단지공단 구조고도화 기획팀장은 “입주기업 경쟁력은 약화하고 근로환경은 안 좋아지는 악순환의 반복인 듯싶다. 산업단지공단은 구조고도화 사업을 추진해 환경, 정주여건 개선을 위한 다양한 사업을 유치해왔다”며 “최근에는 노후 산업단지를 청년이 찾는 산업단지로 전환하려고 노력 중이지만 성과는 아직 미흡하다. 산업단지 인프라 개선을 위한 구조고도화를 확대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어 “산업단지공단은 설립목적 상 기업 성장 위주의 정책을 편다. 인프라뿐 아니라 노동권 강화 필요하다는 의견에 공감하며 개별 노동자 노동권 향상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한편 산업단지 노동자 조직화에는 한계가 있더라도, 노동조합의 역할과 영향을 꾸준히 강화하는 노력을 지속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이희태 금속노조 전략조직국장은 “금속노조는 공단의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에 보다 쉽게 가입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캠페인, 규정 변경 등 다양한 모색을 하고 있다”며 “동시에 노동조합을 하기 어려운 조건의 노동자들에게까지 금속노조 단체협약의 효력을 확장하기 위한 노력, 기업별 노사관계를 넘어 다양한 협의 테이블을 구성하기 위한 시도를 진행 중”이라고 했다.

산업단지 발전 목표,
지역 일자리 안정적 확보 명확해야

박주영 민주노총 법률원 부원장은 산업단지가 지역의 발전과 일자리 확보에 기여할 수 있는 부분에 주목했다. 박주영 부원장은 “산업단지를 통한 산업과 지역 발전 전략에는 지역 내 일자리를 확보하고 고용의 경제적 효과를 통해 지역 공동체의 지속과 발전을 도모하고자 하는 방향성이 분명해야 한다”며 “산업집적법*의 목적에 ‘지역 일자리의 안정적 확보와 이를 위한 산업단지 노동자의 노동조건·노동환경을 보장하는 의미로 ‘지역고용집적’을 명시해야한다”고 했다. * 산업집적활성화 및 공장설립에 관한 법률

이에 황현일 창원대 사회학과 교수는 “정주여건 개선 방향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서 노동권 보장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며 “그런 점에서 산업단지 활성화의 주요 목표로서 ‘지역 일자리 안정적 확보와 이를 위한 산업단지 노동자의 노동조건과 노동환경 보장’이라는 ‘지역고용집적’ 개념은 의미가 있어 보인다”고 평가했다.

한편 박주영 부원장은 산업단지 정책에 노동이 반영되려면 “산업단지 노동자에 관한 사항을 관리기관이 임의로 정하면 실효성을 보장하기 어렵기 때문에, 산업단지 입주기업체와 노동자가 참여해 협의절차를 거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제언했다. 박주영 부원장은 이를 위해 산업집적법에 근거한 ‘산업집적 활성화 기본계획’에 “산업단지 노동자의 노동권 보장 및 처우개선”을 명시하는 게 방법이라고 언급했다. 노사, 산업단지공단으로 구성된 ‘산업단지 3자 협의회’도 대책으로 제시했는데, 산업단지 구조고도화 사업 계획을 승인하기 전에 고용·노동조건 등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사항은 3자 협의회의 논의를 거치는 방식이다.

박주영 부원장은 그러나 “당장 법률 개정으로 직접적인 산업단지 노사 공동 협의기구를 신설하기 어렵다면, 산업단지 내 노사 공동의 이해를 조정하고 산업단지 노사의 참여와 협력을 도모할 수 있도록”해야 한다며 “관리기관의 관리운영업무로서 산업단지 입주기업체와 소속 노동자들의 공동 노사협의회, 공동 산업안전보건위원회를 구성하고 효과적으로 운영할 수 있도록 정책적 방안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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