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③] 바뀌는 산업 지형에 산단은 속수무책
[커버스토리③] 바뀌는 산업 지형에 산단은 속수무책
  • 강한님 기자
  • 승인 2022.10.19 00:00
  • 수정 2022.10.19 00: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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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소중립·디지털전환, 위기 오겠지만 “탈출구 안 보여”
수도권과 지방뿐인 한국···대기업 빠져나가면 산업단지는 방향 잃어

산업단지 리포트

산업단지가 만들어진 지 어언 60년. 대한민국의 산업을 이끌어온 산업단지는 어쩐지 힘겨워 보인다. 수명을 다해가는 산업과 중소기업 경영난, 질 나쁜 일자리, 환경오염, 산업재해 등 오랜 시간 동안 방치된 ‘낡은 것’들이 산업단지 곳곳에 먼지처럼 방치되어있다. 한국의 성장, 지역 경제 활성화, 일자리 창출 등에 한몫해온 산업단지는 어떤 모습일까. 전국 7개 지역을 중심으로 산업단지의 현재를 들여다봤다.

커버스토리③ 산단 미래 먹거리는 대기업에서만?

“요즘 5G시대고, 4차 산업혁명이라고 이야기를 막 해요. 현장 대표님들은 시큰둥해요. 나하고 관계없는데? 물건 하나 팔아서 직원들 월급 주기 바빠요. 그 고민하는데 자꾸 4차 산업혁명 말하니까 피부에 와 닿지 않는 거예요. 10명짜리, 50명짜리 기업은 당장 먹고 살기도 힘든데 기술 개발을 언제 해요.”

구미 국가산업단지에서 기업을 운영하는 한 사용자의 토로다. 산업이 변한다고 한다. 제조업도 디지털을 기반으로 스마트해져야 하고, 탄소를 많이 배출하면 세금을 더 내야 하는 시대가 왔다고 한다. 제조업이 집약된 산업단지가 당면한 현안이기도 하다.

그러나 다음 달 직원 월급 줄 돈을 벌기도 바쁜 작은 기업들이 이를 고민할 여력은 없다. 당장 한 달 버티는 게 급하다. 이런 상황에서 대기업이 수도권이나 해외로 떠나면 산업단지에는 작은 기업들만 남게 된다. 대기업이 있는 산업단지와 없는 산업단지의 격차는 커지고, 각 지자체들은 ‘미래 신성장 산업’을 모색해줄 대기업 유치에 골몰한다.

구미국가산업단지에 위치한 한 섬유 사업장 ⓒ 참여와혁신 강한님 기자 hnkang@laborplus.co.kr

산단이 미래 먹거리를
찾게 된 외부 요인들

① 경쟁력을 잃게 된 산업들
산업은 계속 변해왔고, 산업단지도 발을 맞춰왔다. 구미는 전자 중심의 국가산업단지로 잘 알려져 있지만 90년대에는 전자와 화학섬유 산업이 양분화돼 있었다. 도레이로 바뀐 제일합섬과 동국합섬, 금강합섬, 한국합섬, 효성 등 큰 섬유회사 8개가 모두 구미에서 생산을 했다. 지금은 없어졌거나 다른 것을 생산하는 회사들이 여럿이다. 주로 섬유 비중은 줄이고, TV·휴대전화 안에 들어가는 필름이나 플라스틱 물병을 만들 때 쓰는 칩을 만든다.

섬유회사들이 ‘주종목’을 축소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해외 시장에 경쟁력이 밀렸기 때문이다. 중국이 섬유 대량생산에 나서면서 한국의 섬유산업은 쇠퇴했다. 사업을 전환시키던지, 접어야 하는 상황에 몰린 것이다. 채용도 드물게 이뤄지고 있다. 모명종 티케이케미칼(과거 동국합섬)노동조합 위원장은 “중국에서 대량으로 해버리니까 우리 같은 섬유 업종들이 많이 힘들고, 신입사원은 사실 없다”고 말했다.

전통 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은 다가올 고용위기에 근심이다. 잔업과 특근은 눈에 띄게 줄어들고, 그에 따라 임금도 줄었다. 우영욱 엘지화학엘지에너지솔루션 청주지회 지회장은 “원래 디스플레이 시장은 LCD가 컸고, 한국이 독점하고 있었다. 그런데 중국 등 다른 나라에서 LCD 기술을 따라잡았다. 단가도 그쪽이 더 싸니까 사실상 국내에서는 디스플레이 관련 사업이 더 이상 클 수가 없는 환경”이라며 “청주 공장을 기준으로 봤을 때 공장에서 40% 정도는 디스플레이와 관련돼 있는데, 조합원 기준으로 사양 산업에 있는 분들은 5분의 1에서 2정도”라고 설명했다.

②디지털 전환과 탄소 중립
요즘 광주의 고민거리는 전기차다. 광주는 자동차 산업과 가전이 산업단지를 이끌어왔다. 노동자들은 내연기관차에서 전기차로 전환되면 일자리와 고용에 어떤 영향이 있을지 불안하다. 자동차에 음성인식 시스템이 도입되면 차체 안 버튼을 만들어왔던 회사도 바뀌어야 한다. 자동차 시트를 생산하는 회사는 전기차의 경량화된 시트에 맞춰 인원을 줄여야 한다.

거기에 공장은 자동화돼서 사람이 덜 필요하게 될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신정훈 한국알프스노동조합 위원장은 “우리는 자동차 버튼을 생산하는데, 그게 다 없어지는 시대가 온다고 하니 위기감이 있다. 지금도 경쟁업체가 많아서 살아남기 힘든데 그 다음 먹거리가 무엇이 있겠냐”며 “제조업 노동자들은 내일 출근했는데 회사 문이 안 닫혔기만 바랄 뿐”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산업전환을 우려하는 목소리는 “메아리”에 그치는 수준이라고 손정순 시화노동정책연구소 연구위원은 말했다. 손정순 연구위원은 “이미 전기차는 대표적으로 눈앞에 와 있는 현실이다. RE100이나 탄소국경세 이야기 나오는 것을 보면 탈탄소와 관련한 산업 구조적 압력이 개인적으로는 굉장히 커지고 있다고 본다. 그것을 느끼고 있는 건 원청레벨이지, 2,3,4차 벤더 내려가면 전혀 관심이 없다”며 “RE100을 사용자 혼자 하는 것도 아니고 틀림없이 고용문제가 제기될 수밖에 없다. 탄소국경세가 철강, 전자 업체들에 부과되기 시작하면 고용문제로 직결될 것”이라고 했다.

시화반월공단은 대부분 하청업체로 구성돼 있다. 대기업은 산업전환에 구체적인 방법을 내놓기 위해 인력과 예산을 들일 수 있지만, 작은 업체들은 그렇지 못하는 경우가 대다수다. 손정순 연구위원은 탈탄소를 목표하는 산업정책이 본격화됐을 때 대응이 가능한 업체들은 반월시화공단에 20~30%에 불과할 것이라 내다보고 있다.

경쟁력 강화·산업전환 대응
해결책으로 꼽히는 대기업 유치

산업단지가 있는 지역들은 새로운 먹거리를 찾는 중이다. 전통적인 대량생산 중심의 제조업만으로는 부족하니, ‘미래 신성장’ 분야와 연계된 산업을 추가 발굴해야 한다는 의견들이 지역에선 줄을 잇는다. 광주는 자동차와 AI, 구미는 반도체, 청주는 반도체와 이차전지, ICT 접목 스마트 사업 등 산업단지를 살릴 여러 방안을 구상 중이다. 제조업에서 관광서비스나 물류·유통 산업 등으로 집중도를 분산하려는 움직임도 있다.

“경쟁력이라고 한다면 내가 봤을 때 대기업이 들어오는 게 아닐까.” (문길주 전남노동권익센터 센터장)
“대기업이라도 다시 구미로 올 수 있게끔 하는 게 1차적이라고 봐요.” (전상구 한국노총 구미지부 의장)

계획 실현에 도움이 될 대기업 유치는 지역의 주요 관심사다. 큰 공장의 산업단지 입주는 뉴스거리가 된다. 부가가치가 높은 다음 ‘주종목’이 필요하지만, 작은 기업들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의견들이 있다. 그런데 대기업은 지역으로 잘 내려오지 않는다는 게 참여와혁신이 취재한 산단 구성원들의 생각이다.

산업단지에 하청업체들이 모여 있으면 어떤 부품을 생산하는지가 부가가치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광주의 자동차 하청업체들은 소위 말하는 엔진 등 ‘핵심 부품’을 생산하지 못하고 있다. 경쟁력이 약해진 작은 기업이 새로운 시도를 할 기반은 잘 조성되지 않는다. 조성준 광주시 투자산단과 산단관리팀 팀장은 “핵심 기술은 R&D를 통해서 고도화되고 축적된다”면서도, “연구 활동을 해야 하는데 R&D 관련한 기업들은 금강 이남으로 안 내려온다”고 말했다.

“다 경기도권에 있지, 대전 밑으로는 안 내려온다는 겁니다. 실제 통계를 봐도 R&D 연구소는 다 금강 이북에 있어요. 경기 남부권, 많이 내려와야 충북까지 내려와요. 그러면 광주는 뭐냐, 안 되는 거예요. 연구 개발 부지를 분양을 해도 분양이 안 됩니다. 연구소가 오면 신기술을 시연해야 하니까 당연히 중소기업들이 따라붙는데, R&D 기업들이 안 오기 때문에 이쪽 호남권이 굉장히 어려움이 많아요.”

구미는 일부 대기업이 수도권과 해외로 올라가버린 상태다. 삼성전자가 베트남에 휴대폰 공장을 설립하고, LG전자는 파주에 공장을 새로 지었다. 기업이 안 오니 사람들은 산단이 성장을 멈췄다고 생각한다. 대기업 유치에 대한 갈망이 클 수밖에 없다. 전통 산업이 어려움을 겪었듯, 지금의 흐름을 대비하지 못하는 업체들도 위기를 맞을 가능성이 크다. 기업도 노동자도 생존이 걸려있지만 당장 뾰족한 수는 없다.

구미 KEC 반도체 공장. KEC는 상대적으로 넓은 부지를 가졌지만 공장을 더 세우지 않고 비워뒀다. 구조고도화 사업을 통해 해당 부지에 백화점·호텔·오피스텔 등을 지어 상업시설로 만들겠다는 게 KEC의 계획이었지만, 노조의 반발에 부딪힌 상태다. ⓒ 참여와혁신 강한님 기자 hnkang@laborplus.co.kr

대기업 있으면 살아남는 구조,
문제는 없나?

앞서 보았듯 산업은 변하고, 대기업이 떠난 산업단지는 변화에 대응하기 힘들다. 부가가치가 높지 않은 부품을 생산하는 하청업체가 많은 산업단지도 그렇다. 산업단지가 대기업과 하청업체 중심으로 구성된다는 점을 상기해보면, 대기업 유무에 경쟁력은 좌지우지될 수 있다.

‘대기업과 하청업체 중심으로 구성된다’는 전제에 문제는 없을까? 오지 않는 대기업에 ‘특혜’를 주며 희망을 거는 게 맞는지 의문을 품는 사람들도 있다. 애초에 대기업 중심의 산업단지가, 그런 산업단지를 만드는 정책이 무언가 이상하다는 의견이다.

차헌호 아사히글라스비정규직지회 지회장은 “구미는 지자체장의 가장 중요한 의제가 ‘산단에 얼마나 큰 기업을 유치했느냐’가 돼 버렸다. 기업을 유치하기 위해 최고의 조건을 주고 그 혜택은 작은 기업들에게 돌아가지 않는다. 장기적인 비전에 대한 고민 없이 기업 유치를 정치적으로 효과를 낼 거리로 생각하는 것이라 본다”며 “산단에 기업을 유치 했을 때 실질적으로 경제 발전과 고용 창출 등 노동자와 주민의 삶에 어떤 효과가 발생했는지 평가해봐야 한다. 아사히글라스의 경우 50년 동안 12만 평의 땅을 무료로 줬고, 그랬으면 양질의 일자리를 만들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았다”고 말했다.

공장을 새로 세운다고만 하면 지자체들은 기꺼이 각종 혜택을 준다. 대기업은 지역을 골라서 가면 된다. 이 지원을 기업들이 악용한다는 지적도 있었다. 김성훈 KEC지회 사무장은 “전국 산단이 노후화되고, 새로운 산업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있는데 먹거리들이 잘 안 나오니까 이상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우리는 반도체 사업을 하고 있고, 확장을 해야 하는데 회사가 구조고도화 사업을 통해 백화점과 호텔을 짓는다고 한다”며 “산업단지는 과거 누군가의 땅을 희생시켜 만든 공적인 곳인데, 기업은 이를 이용해 땅값을 올려 시세 차익을 얻는 용도로 쓰려 한다”고 비판했다.

“도시나 공단이 노후화되는 원인을 추적해보면 하나는 시대적인 변화가 있을 수 있죠. 부산엔 신발이랑 가발 공장이 부산의 핵심 기업이었는데, 경쟁력이 없어 사라잖아요. 또 하나는 모든 게 수도권에 집중돼 있잖아요. 인프라나 인원, 전부 다요. 여태 정부 정책은 대기업 중심이었는데, 큰 기업들이 자꾸 위로 올라가니까 망하고 있는 거예요. 그게 산단과 지자체의 문제인가요?”

구미산단에 입주한 경영자들은 지역의 산업단지가 노후화되는 이유를 크게 두 가지로 보고 있었다. 산업단지에 입주한 산업의 경쟁력 자체가 약화되는 상황과 수도권·대기업 중심의 정부 정책이다. 물론 ‘강한 중소기업’이 산업단지에 있다면 좋을 것이나, 그런 중소기업 자체를 한국 사회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한국 사회에서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격차는 오랜 세월 좁혀지지 못하고 벌어졌다. 개별 지자체들이 산업단지에 대기업 유치를 원하는 이유도 이미 이 생태계가 한국 사회에서 고착됐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중소기업의 경쟁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말은 쭉 있었다. 지역 내 제조업 R&D 역량 강화, 대·중소기업 상생을 위한 공정거래 방안 등 정책과 제언들도 있었지만 그간은 체감할 변화가 없었다고 구성원들은 말했다.

수도권·대기업 중심의 정부 정책은 대·중소기업 간 양극화를 심화시켰고, 이는 산업단지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강한 중소기업으로 산업단지에서 성장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래서 산업전환을 맞은 오늘, 산업단지의 중소기업과 노동자들이 마주할 어려움은 예견된 일이다. 지금의 산업단지는 ‘대기업이 기업하기 좋은’ 곳이 됐고, 대기업에 속해 있지 않은 산업단지 구성원들의 걱정이 깊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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