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⑦] 산업단지의 ‘지속가능성’을 위해서
[커버스토리⑦] 산업단지의 ‘지속가능성’을 위해서
  • 정다솜 기자
  • 승인 2022.10.21 00:00
  • 수정 2022.10.21 00:0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아직 산업단지가 필요한 노사정···대화 통한 ‘비전 수립’부터 해야

산업단지 리포트

산업단지가 만들어진 지 어언 60년. 대한민국의 산업을 이끌어온 산업단지는 어쩐지 힘겨워 보인다. 수명을 다해가는 산업과 중소기업 경영난, 질 나쁜 일자리, 환경오염, 산업재해 등 오랜 시간 동안 방치된 ‘낡은 것’들이 산업단지 곳곳에 먼지처럼 방치되어있다. 한국의 성장, 지역 경제 활성화, 일자리 창출 등에 한몫해온 산업단지는 어떤 모습일까. 전국 7개 지역을 중심으로 산업단지의 현재를 들여다봤다.

커버스토리⑦ 산업단지의 내일

1960년대 정부는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시행했다. 수출 제일주의는 국가주도 산업화의 핵심 목표로 부상했고, 그 중심엔 산업단지가 있었다. 정부의 경제 개발 의지, 기업인들의 도전정신, 노동자들의 땀이 집적한 산업단지는 주어진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그런데 나이 든 산업단지는 이제 지역에서 고민거리가 됐다. 중소사업장이 대부분인 산업단지에선 탄소중립·디지털 전환으로 바뀌는 산업 지형에 아직 어리둥절하다. 노후화로 인한 노동안전 문제도 심각하다. 장시간·저임금 노동에 청년들은 어두컴컴한 산단으로의 발길을 끊고 있고, ‘돈이 있는데 안 주겠느냐’는 기업들은 인력난을 호소한다.

여전히 잘나가는 산업단지도 있지만 대부분은 클러스터(cluster) 생애주기에 따라 ‘발생-성장’의 단계를 거쳐 ‘유지’ 혹은 ‘쇠퇴’의 길을 걷고 있는 실정이다. 남은 길은 두 가지다. 쇠퇴의 길을 받아들이거나, 새로운 발생 단계로 전환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어떤 길이든 참여와혁신이 만난 노사정은 이해당사자들의 목소리를 반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했다.

ⓒ 클립아트코리아
ⓒ 클립아트코리아

산업단지가 필요한 이유

노동자들에게 산업단지가 필요한 가장 큰 이유는 일자리다. 서다윗 금속노조 서울지부 남부지역지회 지회장은 “산단이 노동자에게도 당연히 필요하다. 업체가 많이 모여 있으니,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쉽게 구할 수 있다”고 말했다. 차헌호 금속노조 아사히글라스비정규직지회 지회장은 “내 고향이 경북 상주다. 구미 산단까지 차로 한 시간 거리인데 일자리를 찾아 돈 벌러 여기까지 왔다”고 이야기했다. 김성훈 금속노조 KEC지회 사무장도 “젊을 때 구미 산단에 와서 20년 이상 흘렀다. 지금은 공장도, 사람도 많이 빠져나갔지만 처음 왔을 땐 일자리가 넘쳐났다”고 했다.

산업단지에 갖춰진 인프라, 집적 효과, 세제 감면 등 다양한 혜택은 기업에 매력적이다. 구미의 사용자단체 관계자는 “사업을 위해 필요한 인프라가 산단에 있으니까 기업이 모여드는 것”이라며 “뭐가 필요하면 근처 업체에 의뢰해서 금방 만들 수도 있다. 어디 혼자서 사업했다면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이종덕 청주산업단지관리공단 관리부 부장은 “산단의 가장 큰 장점은 인허가가 쉽다는 점과 기반시설이 완비되어 있다는 점”이라며 “저렴한 산업용 전력과 공업용수가 제공되고 부동산 취득에 대한 세금도 감면해 주고 있으며 입주업체에 대한 각종 정부 지원 사업에 대한 우선권이 주어지는 경우도 있다”고 설명했다.

지자체 입장에선 든든한 지역경제 발전의 토대다. 이유환 충북연구원 성장동력연구부 연구위원은 “지난해 4분기 기준 충북 산단은 총 130개로 전국 대비 10.3% 비율을 차지한다. 생산액은 약 69조 4,000억 원이고 수출액은 314억 2,000억 달러”라며 “산단 가동 성과가 우수하며 지역 경제와 산업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고 했다. 석재균 충청북도청 투자유치과 주무관은 “도내 산단의 제조업 비중을 보면 충북 전체 제조업 대비 업체수의 65%, 생산액의 59%, 고용의 54%를 차지해 산단이 지역 제조업의 중추 역할을 담당한다”며 “또 산단은 계획 입지를 유도해 개별공장 등의 난개발을 억제하고, 기업에는 안정적인 생산 활동을 지원하며 지역의 일자리 창출, 주변 지역 경제활성화 등 지역 경제에 긍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산업단지 내일 위해선
현장 목소리부터 들어야

산단은 노사정 모두에게 필요하긴 하지만, 앞선 커버스토리 기사에서 지적했듯 그 지속가능성엔 물음표가 붙는다. 이는 기존 중앙정부의 하향식 정책, 입주기업 중심의 지원으로는 충분히 물음표를 지우기 어려운 상황이란 뜻이기도 하다. 따라서 산단의 내일을 위해선 현장에서 튕겨 나오는, 이전 방식과는 다른 방향을 모색해야 한다.

산단의 하향식, 기업 중심 정책에 관해 경기도의 연구용역을 받아 〈경기도 산업단지 300인 이하 사업장 노동실태조사 보고서〉(2020)를 작성한 시화노동정책연구소는 “산업단지 지원 정책은 단지를 조성하고 기업을 유치하기 위한 기업 지원 정책이 중심”이라며 “지역 입장에서는 일자리 만들기 차원에서도 기업을 유치하는 것은 중요한 사업이다. 하지만 일자리의 양과 함께 질을 고려하지 않으면 기업이 원하는 노동력을 공급받는 데도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손정순 시화노동정책연구소 연구위원은 “산단의 원형이 소비에트 시기 사민정부 치하에서 급속한 산업화를 위해 만든 클러스터”라며 “그 원형이 이어지면서 우리나라도 60~70년대 압축적인 산업화 성장이 이뤄진 것이다. 이 측면에서 중앙정부 주도의 개발 성장 관점이 산단 정책에도 그대로 녹아 있고 아직도 그 경향이 유지되고 있다”고 말했다.

노동자들도 노동이 배제된 산단 정책을 지적했다. 우영욱 화섬식품노조 LG화학·LG에너지솔루션 청주지회 지회장은 “(산단 정책 관련한 소통을) 기업은 하는 것 같은데, 노동조합과는 사실상 채널이 없다”며 “특히 지자체는 그냥 만나기도 힘들다”고 이야기했다. 모명종 섬유유통노련 티케이케미칼노조 위원장은 “산업단지공단은 경영자 측이랑만 너무 가깝다. 노동조합과도 소통을 하려고 해야 한다”며 “노동조합 위원장들은 우리 조합원들의 목소리를 전할 수 있다면 발 벗고 나서서 대화할 것”이라고 했다. 이재영 금속노조 부평공단지회 지회장은 “부평공단에서 구조고도화 사업, 스마트그린사업 등을 하고 있는데 정부가 실사를 제대로 하고 진행하는 건지 모르겠다”며 “산단을 바꾼다고 아파트형공장 1층에 옷 가게를 만들어놓으면 누가 가겠나? 그런 곳은 아무도 이용 안 한다. 차라리 공동 휴게실이나 크게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기업도 비슷한 입장이었다. 구미의 사용자단체 관계자는 “기업은 사업계획을 수립할 때 꼭 방향과 속도를 고려한다. 정부의 산단 정책은 방향부터 잘못됐다. 공급자 중심, 지자체와 정부 중심”이라며 “위에선 요즘 5G시대, 4차 산업혁명 등을 막 이야기하지만 현장 기업 대표들은 시큰둥하다. 노동자 10명, 50평짜리 기업은 당장 먹고살기도 바쁜데 기술개발을 언제 하나? 기술개발하려고 박사급 한 명 채용하면 1년 연봉이 1억 원이 넘는다. 산단 정책은 수요자 중심, 현장 맞춤형 지원 정책으로 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손정순 연구위원은 “한 3년 전 시화공단 구조고도화 사업 관련해서 시흥시와 한국산업단지공단 서부지역본부가 공청회를 열었다”며 “그 자리에 참석한 사용자들이 이구동성으로 한 말이 ‘이런 이야기 처음 듣는다’였다. 계획은 이미 완성돼서 공청회를 하는 자리에서 사용자들도 사업 내용이 처음인 거다. 산단 정책이 내리꽂는 방식으로 진행된다는 전형적인 사례”라고 말했다.

대화의 시작, 산단의 비전 공유

산단의 전환을 원한다면 노사정은 이제 공동의 비전부터 함께 이야기해야 한다. 차헌호 지회장은 “그간 구미시장들은 지역 경제 발전을 위한 비전보단 대기업 유치 공약만 내세웠다”며 “장기적 관점에서 우리 지역에서 어떤 기반산업을 키울 건지 기업뿐 아니라 주민의 목소리, 특히 노동자의 목소리를 들어서 지역 경제의 비전을 공유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관 금속노련 광주전남지역본부 의장은 “여러 이해관계자가 모여서 이야기해야 핵심 내용만 쏙쏙 빼서 의견을 모을 수 있다”며 “노사민정이 함께 지혜를 모아서 산단 정책의 방향성 등에 대해 논의해야 한다”고 밝혔다.

손정순 연구위원은 “지역 차원에선 전기차 구조 전환 관련해서 지역 자동차 부품업체들을 어떻게 할 건지 이야기가 전혀 없는 상태”라며 “이는 산업단지공단 혼자서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지방정부와 같이 혹은 중앙정부와 보조를 맞춰서 협의 틀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지역 차원 노동정책 강화도 필요

아울러 입주기업 중심의 산단 지원정책에서 벗어나 지역 차원의 노동정책이 강화될 필요가 있다. 시화노동정책연구소는 “일자리 미스매치는 단지 주거, 교통 등 고용 환경 개선을 통해서 해소되기 어렵다. 따라서 고용을 둘러싼 주변 환경을 개선하는 것과 함께 적정임금 보장, 노동법 준수, 산업안전보건 등 노동권 보장이 병행돼야 한다”며 “향후 산업단지 지원 정책은 지금까지 조명되지 않았던 산업단지 노동자들의 노동권 보장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사업시행자인 정부 및 지자체가 근로감독, 입주기업 고용공시, 노동법 위반시 지원 중단 등 노동권 보장을 위한 지원을 강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산단 노동자의 낮은 임금 문제를 풀기 위해 지자체 차원의 공동 복지체제를 구축할 수 있다. 정관 의장은 “하남산단 내에서 복지다운 복지를 하는 사업장은 별로 없다”고 말했다. 문길주 센터장도 “하남산단에서 1차 밴더를 제외한 나머지는 전부 최저임금을 받는다고 보면 된다. 임금이 너무 최저임금 수준이라 노동자들이 20~30년 일해도 연봉이 3,000~3,500만 원이 안 된다”고 전했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시화노동정책연구소는 “제조업 내 중소사업체의 경우 기업의 지급 여력 약화를 배경으로 기업이 자체적으로 노동복지를 제공하기가 어려운 상황”이라며 “현재 임금·비임금성 복지체계를 중소사업체가 독자적으로 구축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중소사업체가 밀집된 산업단지 지역을 중심으로 지자체가 주도적으로 공동 복지체제를 구축해 간접임금을 확대하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제언했다.

또한 중소사업체들의 낮은 지급 여력의 근본적인 배경인 우리나라 산업의 고질적인 원·하청 구조 개선도 중요하지만, 산단 내 한계사업체에 대한 구조조정도 필요하다. 손정순 연구위원은 “반월시화공단에서 예전엔 100인 이상 사업장에서 내부화하던 업무를 밖으로 가지고 나가거나 소사장제로 하는 식으로 소규모 영세사업장, 한계업체가 굉장히 늘어나고 있다”며 “외국인 노동자들의 인건비 따먹기를 통해 버텨나가고 있는 한계업체들은 구조조정 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어 “구조조정을 하는 유력한 방식 중 하나가 공단 차원에서 노사 간 교섭을 통해 최저임금을 끌어올리는 것”이라며 “이런 방식을 통해 자연스럽게 임금을 지불할 수 없는 기업들이 물러나야 한다”고 덧붙였다.

문길주 센터장은 “자주 이런 말을 한다. ‘산단에서 인력이 부족한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시오.’ 원청이 1차, 2차, 3차 밴더의 단가를 후려치는 구조가 바뀌어야 한다. 임금을 많이 주고 기업이 노동권을 보장한다면 청년들이 당연히 취업하러 올 것”이라며 “이 구조는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는다. 진짜 공론화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영현 하남산업단지관리공단 산단관리부장은 취재의 끝에 이렇게 당부했다. “어렵지만 산단에선 변화를 꾀하고 있다. 그래도 희망을 먼저 봐달라.”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