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②] 산업단지, 지역의 무늬
[커버스토리②] 산업단지, 지역의 무늬
  • 정다솜·박완순·백승윤·강한님 기자
  • 승인 2022.10.19 00:00
  • 수정 2022.10.19 00:2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산업단지를 돌아보다
저마다의 모습으로 남은 구미·광주·여수·서울 산단

산업단지 리포트

산업단지가 만들어진 지 어언 60년. 대한민국의 산업을 이끌어온 산업단지는 어쩐지 힘겨워 보인다. 수명을 다해가는 산업과 중소기업 경영난, 질 나쁜 일자리, 환경오염, 산업재해 등 오랜 시간 동안 방치된 ‘낡은 것’들이 산업단지 곳곳에 먼지처럼 방치되어있다. 한국의 성장, 지역 경제 활성화, 일자리 창출 등에 한몫해온 산업단지는 어떤 모습일까. 전국 7개 지역을 중심으로 산업단지의 현재를 들여다봤다.

커버스토리② 산업단지에 가다

구미산업단지 내 사업장의 모습 ⓒ참여와혁신 강한님 기자 hnkang@laborplus.co.kr

‘그 시절’과는 달라진
구미국가산업단지

“제대하고 난 다음에 지인이 ‘구미 개안타’ 해서 일하러 왔는데 공단이 그렇게 클 줄은 몰랐죠. 여기, 구미 2공단이 옛날엔 시내였어요. 포장마차 이런 게 요 주위에 바글바글했습니다. 구미역까지도 안 갔습니다. 진짜 대단했죠, 우리 젊었을 때는. 제가 2030 때는 대단했어요. 미팅도 여서 하고 다 했습니다.”

반짝이던 공장의 불빛, 공장을 드나들던 물류차들, 일을 마치고 거리에서 소주를 마시며 회포를 푸는 사람들. 구미에서 만난 사람들은 ‘그 시절’을 또렷이 회상했다. 가게에 자리가 없어 포장마차가 줄을 지어 노동자들을 기다리던 시절이었다.

구미는 토박이보다 외지인이 더 많은 도시였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고향인 구미에 국가산업단지를 만든다는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구미로 몰려왔기 때문이다. 1973년 12월 섬유단지와 전자단지로 시작한 1단지에 이어 83년 컴퓨터·반도체를 주력으로 하는 2단지가 세워졌다. 삼성과 LG, KEC, 코오롱, 제일합섬 등 내로라하는 회사들은 구미산단에 공장을 지었다. 포항, 김천, 의성, 안동, 예천, 상주 등 주변 지역 노동자들도 그 유명세를 듣고 구미로 터전을 옮겼다.

노동자들이 정착해 50여 년이 훌쩍 흐른 지금 구미의 풍경은 반전됐다. 5단지가 공사에 착공한 상태지만 1·2·3·4단지의 공터, 간간히 붙어있는 기업 입주 축하 플랜카드는 구미산단이 그 시절의 활기를 잃었음을 보여줬다. “구미가 대기업을 수도권으로 보내서 그렇다”는 사람도, “노동조건이 열악해 사람들이 공장에서 일하고 싶지 않아 한다”는 사람도 있었다. 중론은 구미산단이 예전과는 확실히 달라졌다는 거였다. 이제 대기업들은 구미를 매력적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누군가는 “지금이 구미의 IMF”라 말하기도 했다.

구미산단과 관련된 계획은 표심과도 직결된다. 정치인들은 대기업과 외투기업을 더 유치하고, KTX 구미역을 만들고, K-반도체 벨트를 구미로 끌어들이겠다는 공약을 내놓았다. 대기업을 제대로 유치하지 못했던 정당은 다음 선거에서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없다.

떠난 삼성과 LG만 잡으면 구미는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구미산단을 살릴 ‘키’는 대기업뿐일까. 회의감을 드러내는 사람들도 있었다. 대기업은 구미의 이런 사정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구미는 그간 더 큰 기업을 희망하며 그들을 지원했고, 어떤 기업들은 노동자와 하청업체들에게 점점 열악한 조건을 제시했다. 정규직은 적게 뽑고, 계약도 월 단위로 쪼갰다. 구미공단에서 일하는 비정규직의 수는 제대로 파악되고 있지 않다. 그렇게 구미의 노동조건은 대기업을 시작으로 하향평준화 됐다. 이 현실을 바꿔보고자 노동조합을 만드는 것도 쉽지 않았다. 기업 하나하나가 중요한 상황에서 노동조합의 존재는 눈엣가시처럼 여겨졌다.

그 시절 구미에 자리를 잡은 사람들은 각자가 생각하는 정답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지금 일하는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이라도 지키려는 정규직, 대기업에 맞서 해고라는 긴 터널에 들어간 비정규직, 대기업에서의 노하우를 안고 회사를 차렸지만 유지가 힘든 사용자, 산단을 지원하는 일에 하루를 쏟는 공무원의 이야기를 들었다.

오래된 일터, 지역과 오래 숨 쉰 곳

하남일반산업단지와 첨단과학산업단지(국가산업단지)는 광주광역시 산업단지 10곳 중 고용 규모와 생산 규모 등을 두고 1위와 2위를 다툰다. 경제 규모로 광주의 산단을 대표하는 만큼 두 곳을 찾아가면 광주 산단의 대표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남산단은 조립금속과 플라스틱 사출 성형 등이 주력 업종이다. 첨단산단은 광통신, 전기·전자 등이 주력 업종이다.

두 곳은 생각보다 삭막하지 않았다. 고개를 돌리면 조금은 멀지만 아파트가 보였고, 상점이 들어선 건물도 보였다. (물론 산단 안쪽에 자리한 곳에서는 보이지 않을 것이다.) 첨단산단의 경우 근처에 학교도 있고 박물관도 있어 삭막함이 훨씬 덜했다. 두 곳을 찾았던 날의 맑은 날씨와 낮이라는 시간적 조건 때문일 수도 있지만, 오히려 산업단지에 대한 오래된 선입견을 품고 있었던 것 아닌가 생각하게 할 정도였다.

다른 길로 잠깐 새서 이야기하자면 두 산단이 주거지와 가깝게 위치한 이유는 다르다. 첨단산단은 부지 계획 단계에서부터 주거지를 샌드위치 형태로 감싸도록 했다. 첨단산단에는 공해 유발 물질 발생 기업의 입주를 제한했기 때문이다.

하남산단은 도시의 팽창과 연관이 있다. 현재 기아 광주 공장 주변에 조성됐던 공장들이 도시가 개발되면서 기아 광주 공장만 남겨둔 채 나머지가 도시 외곽이었던 하남 일대로 옮겨온 것이다. 주거지의 깨끗하고 안락한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하남산단이 자리를 잡으면서도 도시는 계속 몸집을 불렸다. 외곽까지 주거지가 형성되다 보니 어느새 하남산단은 다시 아파트와 가까워졌다.

다시 두 산단의 풍경 이야기로 돌아가면 인도(人道)를 말할 수밖에 없다. 두 곳 모두 인도 관리가 부족한 듯했다. 보도블록 사이사이를 뚫고 나온 잡초들이 꽤나 많이 보였고, 울퉁불퉁하게 올라온 보도블록으로 인도가 평탄하지 않은 곳도 있었다. 하남산단 인도의 경우는 생각보다 좁았다. 게다가 은행나무 열매가 우수수 떨어져 있어 땅을 보고 주의 깊게 걷든지 차도 끝으로 걷든지 해야 했다. 하남산단은 주차난이 심각해 보였다. 도로 상행선과 하행선의 갓길에 주차를 빽빽하게 해뒀다.

하남산단에 갔을 땐 운 좋게도 공장 안을 들어갈 수 있었다. 꽤 규모가 큰 공장이었는데, 노동자들이 휴식 시간에 쉴 곳은 작업장 밖 복도에 높인 긴 의자뿐이었다. 그곳에 모인 노동자들은 종이컵을 하나씩 들고 앉거나 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작은 공장의 경우 이만한 쉴 공간조차 없다는 게 취재원들의 설명이었다.

그럼에도 작업장 창문 안쪽에서 자기 작업에 열중하고 있는 노동자들이 있었고, 산단 내 작은 공장에서는 선반 가공 음이 들렸다. 그리고 공장으로 들락날락 화물차들이 짐을 옮겼다. 그렇게 산단은 몇십 년간 노동자들이 일하는 공간이었고, 무언가를 만들었고, 지역 경제를 굴렸고, 일하는 사람들의 호주머니를 채워준 곳인 듯했다.
 

여수산업단지 출퇴근길. 광주 산단과 마찬가지로 인도에 수많은 은행 열매가 떨어져 있다. ⓒ 참여와혁신 백승윤 기자 sybaik@laborplus.co.kr
여수산업단지 출퇴근길. 광주 산단과 마찬가지로 인도에 수많은 은행 열매가 떨어져 있다. ⓒ 참여와혁신 백승윤 기자 sybaik@laborplus.co.kr

종달새가 떠난 마을

여수혁신지원센터를 출발지로 여수산단로를 따라 발을 옮겼다. 일방통행로처럼 좁은 인도가 중간에 끊겼다. 산업단지를 돌아보려고 나선 길이었는데 돌아서긴 아쉬웠다. 달리는 자동차를 옆에 두고 걷다 보니 버스정류장이 나왔다.

“어디로 가세요?” 친근하게 말을 건네 온 그는 20년 넘게 산업단지에서 미화노동자였다. 평소보다 조금 일찍 일을 마치고 동료의 차를 빌려 타 버스정류장까지 왔노라고 했다. 멀리 공장에선 불꽃이 피어올랐다. “밤에 보면 멋있어요. 구경하고 가세요.” 조금만 더 가면 여수산단의 전경을 볼 수 있다는 말에 다시 길을 나섰다.

낮은 언덕 위에서 하나 둘씩 사람들이 내려왔다. 롯데케미칼 공장에서 퇴근하는 노동자들이었다. 오후 5시께 공장 출입문으로 사람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공장 앞 4차선 도로에 차와 사람이 뒤엉켰다. 인도도 차도도 좁았다. 공장 노동자들의 출퇴근은 만만치 않아 보였다.

산단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보니 어느새 어둑해졌다. 잠들지 않는다던 여수산단의 야경은 볼만했지만, 퀴퀴한 냄새가 코를 스쳤다. “냄새가 나긴 나지. 지금은 시설을 갖춰서 많이 좋아진 거야.” 산업단지를 빠져나오며 잡아탄 택시의 기사가 말해줬다. “옛날엔 공장 근처 마을이 있었는데 전부 이전시켰다”고. 1997년부터 정부는 안전사고로 불안해하는 산단 인근 주민의 요구를 받아들여 이주대책을 추진했다.

“내가 중학교 1학년 때 첫 삽을 떴어. 박정희가 내려왔거든. 기공식 할 때 가봤지. 덕양역이라고 해서 내렸는데 경찰들이 총 들고 그냥 줄을 죽 서가지고 난리더라고. 그때는 맨땅이었는데 호남정유가 처음 들어왔어. 그다음에 남해화학 비료공장, 그다음에 럭키공장. 오로지 바다에서 고기만 잡아먹다가... 저게 들어오고 경제가 활성화됐다고 봐야 하나.”

그 말대로 조용한 시골이었던 여수 지역은 산업단지가 조성되며 도시화했다. 공단의 노동자를 위한 사택이 여기저기 지어졌고, 농토를 밀어낸 자리에 철길과 도로가 들어섰다. “완전히 촌이고 산자락이던” 마을은 시가지로 변했다. 시간이 흘러 세계 최대 규모의 석유화학단지로 성장한 여수산업단지는 현재 여수 지역 내 총생산액의 80% 이상을 차지한다. 지역 경제를 활성화시켰지만, 가동 이래로 끊임없는 사고와 환경오염을 일으킨 여수산단은 여수 시민들에게 동전의 양면과 같다.

“경제적으로는 엄청나지. 일자리도 생겼고. 근데 공해가 있잖아. 그리고 바다가 많이 오염됐어요. 아무리 잘한다 해도 화학공단이거든.” 여수에서 만난 시민들의 대답은 대체로 그와 다르지 않았다. “좀 나 같은 사람은 아쉽지. 시방은 자연미가 없어. 도시화가 되니까. 옛날에 여기 하늘 높이 종달새가 지지배배 했는데 종달새가 없어져 버렸어. 종달새를 많이 보고 살았는데.”

구로공단과 G밸리
공순이와 IT노동자

출근길 지하철 2호선 구로디지털단지역, 7호선 가산디지털단지역에선 시루떡이 된 노동자들이 쏟아져 나온다. 역에서 내려 밖으로 나와 녹지 없는 거리를 걷다 보면 고개를 들어야 크기를 가늠할 수 있는 높은 아파트형 공장이 줄지어 있다. 구로, 금천, 가산의 이니셜 G에서 따온 G밸리, 서울디지털산업단지다. 1960년대 먼지 가득한 섬유공장으로, 1980년대 납땜 냄새가 폴폴 나는 전자공장으로 청춘들은 일자리를 찾아 구로공단에 모여들었다. 구로공단은 수출로 잘나갔지만, 그 뒤엔 노동자들의 절망스러운 노동환경이 있었다. 2022년, 이젠 디지털노동자가 된 청춘들의 애환 섞인 삶은 이전과 얼마나 달라졌을까?

1960년대 서울 중심지에서 남서쪽으로 떨어진 구로동에 최초의 한국수출산업단지공단이 생겼다. 구로동엔 국유지가 많고 국도와 철도를 통한 교통이 편리했다. 또 안양천이 있어 공장 가동에 필수인 수자원도 풍부했다. 무엇보다 우리나라가 가진 최고의 자원이었던 풍부한 노동력은 1970년대까지 가발, 섬유, 봉제, 완구 등 경공업을 중심으로 구로공단을 빠르게 성장시켰다.

1970년대 후반 2차 오일쇼크와 경제 위기에 수출 중심 구로공단은 주춤했지만, 1980년대 중반 저달러·저유가·저금리 3저 호황 이후 노동집약형 전기·전자업종을 중심으로 성장세를 이어갔다. 당시는 우리나라 경제 전체가 크게 성장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반면 노동자의 손으로 성장한 구로공단엔 좀처럼 생활이 나아지지 않는 노동자들의 절망이 쌓여갔다. 고용노동부 통계에 따르면 1984년 전체 노동자 평균 임금은 29만 6,907원이었다. 그런데 같은 시기 구로공단 봉제의류, 제조업 여성 노동자들은 10만 원 미만 저임금을 받았다. 퇴근 뒤엔 ‘벌집’, ‘닭장’ 등으로 불리던 구로공단 인근 불법개조 주택방에서 칼잠을 자야 했다. 1985 한국전쟁 이후 최초의 동맹파업, ‘구로동맹파업’에 공순이라 불린 여공들이 파업 대오에 앞장섰던 이유다.

노동집약적 제조업의 한계는 점점 구로공단을 압박했다. 1990년대 구로공단은 하락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구로공단을 살리기 위해 정부는 1990년대 중반부터 산업구조 고도화를 논의했다. 이후 공단은 IT, 서비스 등 비제조 부문에 개방됐으며 첨단화와 다양화가 이뤄졌다. 2000년에는 공단 정식 명칭을 서울디지털산단으로 바꿨다. 첨단산업 혁신 클러스터 지밸리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지밸리 시대 디지털 노동자들은 아파트형 공장 1층마다 들어선 저가형 커피전문점에서 모닝 커피를 사든다. 여전히 크런치 모드, 포괄임금제 등 노동 이슈에서 벗어나진 못했지만 저마다 프로젝트 결과를 내야 하는 데드라인을 안고 일터로 향한다.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