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①-2] 한국 산업단지 58년, 무엇을 남겼나 〈下〉
[커버스토리①-2] 한국 산업단지 58년, 무엇을 남겼나 〈下〉
  • 백승윤 기자
  • 승인 2022.10.19 00:00
  • 수정 2022.10.19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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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업단지’에서 ‘산업단지’로··· 노후화에 직면한 산업단지
50년 시도한 지역균형개발은 아직도 최대 난제

산업단지 리포트

산업단지가 만들어진 지 어언 60년. 대한민국의 산업을 이끌어온 산업단지는 어쩐지 힘겨워 보인다. 수명을 다해가는 산업과 중소기업 경영난, 질 나쁜 일자리, 환경오염, 산업재해 등 오랜 시간 동안 방치된 ‘낡은 것’들이 산업단지 곳곳에 먼지처럼 방치되어있다. 한국의 성장, 지역 경제 활성화, 일자리 창출 등에 한몫해온 산업단지는 어떤 모습일까. 전국 7개 지역을 중심으로 산업단지의 현재를 들여다봤다.

커버스토리① 한국 산업단지의 역사

1989년 11월 대불산업기지 건설 기공식 ⓒ e영상역사관

국토 균형개발과 공업의 분산
공단에서 촉발한 ‘노동자 인간선언’

1980년대엔 중화학공업의 경쟁력이 진일보했다. 대기업을 중심으로 기술집약적 제조업으로의 사업전환이 이뤄졌다. 자동차와 조선업은 집중적인 투자로 크게 성장했다. 전자공업의 경우 가전제품을 중심으로 생산기술을 성장시켰다. 삼성은 현재 우리나라의 주요 산업인 반도체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중화학공업의 성장 이면에는 ‘불균형 개발’이란 난제가 있었다.

거점개발의 60·70년대를 지나온 정책의 방향은 ‘분산’으로 요약된다. 그간 성장·효율성에 초점을 맞춘 대규모 공업입지 정책이 수도권과 동남권 등에 공업과 인구를 밀집하는 결과를 초래한 탓이다. 1977년 제4차 경제·사회개발 5개년 계획과 더불어 신군부 세력이 집권한 이후 발표된 제5차 경제·사회개발 5개년 계획 모두에 지역균형개발에 관한 내용이 담겼다. 1983년 12월 농어촌소득원개발촉진법 제정 이후 전국에 설립된 농공단지도 균형개발의 일환이었다.

1976년 박정희 전 대통령은 ‘수도권 내 100만 평 규모의 공업단지를 갖춘 신공업도시를 건설하라’고 지시했다. 서울의 인구와 공업을 분산하기 위해서였다. 그 결과 경기도 안산에 반월공단과 시화공단이 만들어졌고, 인천에 남동공단이 들어섰다. 두 산단으로 서울에 산재한 중소업체들이 이전하며 반월·시화공단과 남동공단은 중소기업 집적단지가 된다. 중소 영세기업이 급증하며 생산·고용 규모의 저하가 점차 심해지는 문제가 발생했다.

그간 개발이 미미했던 서남부 지역도 균형발전 대상으로 주목받았다. 1984년 전라남도와 목포상공회의소 등은 농업용으로 조성된 대불간척지를 공업단지로 지정해달라고 전두환 정권에 건의했다. 호남의 표심을 얻고자 ‘서해안 종합개발’을 대통령 선거 공약으로 내건 노태우 씨는 당선 직후 대불간척지를 산업기지개발구역으로 지정한다.

그러나 1995년 1단계 완공을 마친 대불산단의 분양률은 매우 저조했다. 1997년 1월 기준 분양률은 23%에 그쳤다. 정치적인 이유로 농지조성용 간척지를 공업용 단지로 급히 변경한 탓에 산업 기반시설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2단계 준공 시기인 1997년 말 IMF 외환위기까지 발생하며 쌍용차, 만도기계 등 상당수 대기업이 입주를 포기했다.

대불산단은 2000년대 중반부터 당초 계획한 기계·제강·화학·섬유가 아닌 조선 전문단지로 발전한다. 당시는 조섭업 호황기로 기존 조선 산단은 입지 포화상태였다. 현대미포조선, 현대삼호중공업 등이 대불산단에 신규 공장을 지어 가동하자 조선 관련 업체들이 모여들었다. 하지만 조선소 하청업체 위주로 구성된 대불산단은 이내 낮은 생산성과 약한 고용 창출 효과를 보였다.

1980년대 초부터 사회운동은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1983년 12월 전두환 정권이 단행한 '학원자율화조치'로 구속자 석방, 제적생 복교, 학원 상주 경찰 철수, 해직교수 복직 등이 이뤄졌다.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이 활발해졌다. 이른바 '학출'로 불리는 대학 출신 활동가들이 수도권 공단 지역에서 노동운동을 벌였다.

이 시기 대표적인 노동운동은 1985년 발생한 ‘대우자동차 임금인상 파업’과 ‘구로동맹파업’이다.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의 임금인상 파업은 대기업에 맞서 요구를 쟁취한 투쟁으로, 당시 노동운동에 파장을 일으켰다. 대한민국 최초의 동조 파업인 구로동맹파업은 대우어패럴 노동조합 간부 구속에 항의하는 인근 사업장 10개 노동조합이 결합한 투쟁이었다. 구로공단 내 경공업, 중소기업 여성 노동자가 이끌었다.

노동자들의 조악한 노동 조건·환경은 1987년 노동자대투쟁으로 크게 개선됐다. ‘노동자의 인간선언’으로 불리는 사상 최대 규모의 집단적 저항운동은 7월 울산 현대엔진노동조합 결성을 시작으로 남동권 공단을 거쳐 전국에서 발생했다. 노동자대투쟁 이후 노동운동의 중심은 경공업 여성 노동자에서 중화학공업 대기업 남성 노동자로 이동했다.

‘공업단지’를 ‘산업단지’로

1990년대 시장 개방이 본격화하며 고부가가치 산업 개발이 시급한 과제로 떠올랐다. 한국은 기술경쟁의 심화와 후발 신흥공업국의 추격 등에 직면한다. 여기에 노동집약적 산업은 쇠퇴하고 지식기반경제가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자리하며 IT 등 신산업 육성이 필요했다.

정부는 시장경제를 정책 기조로 삼고, 규제 완화와 행정 절차 간소화를 추진한다. 정책 기조에 따라 ‘기업활동 규제완화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제정하고, 산단 관련 개별법은 흡수·통폐합됐다. 특히 ‘산업입지 및 개발에 관한 법률(산지법)’은 공업단지라는 용어를 ‘산업단지’라는 용어로 대체했다. 공업단지라는 개념이 제조업 위주여서 새롭게 등장하는 산업을 제대로 포괄하기 어렵다는 이유였다. 한국산업단지공단을 설립해 바꾼 개념에 맞춰 제조업을 넘어 서비스·문화 산업 등 다양한 분야를 고려하게끔 했다. 아울러 산단에 생산뿐 아니라 연구·물류·복지 등 다양한 자원과 기능을 둘 수 있도록 했다.

지식기반경제 육성을 위한 첨단과학산업단지 조성도 추진됐다. 광주를 비롯한 지방 대도시(강릉·대구·대전·부산·전주·청주·춘천 등)가 첨단과학산단 조성지로 뽑혔는데, 기업의 입지 수요보다는 지역 배분을 중심에 뒀다. 당시 유일하게 국가산단으로 지정된 광주첨단산단은 생산, 연구개발(R&D), 주거, 교육시설 등이 집적된 산학연복합단지로 계획됐다.

첨단산단뿐 아니라 산업구조의 다각화에 맞춘 다양한 유형의 산단이 등장했다. 벤처단지, 출판단지(파주), 과학연구단지 등이다. 지금의 구로 서울디지털단지 등에서 볼 수 있는 아파트형공장의 개발도 본격화했다.

당시 구로공단은 노동집약적 산업 쇠퇴로 침체기를 맞았다. 1995년 고용은 4만 2,000명으로 70년대 대비 절반 넘게 줄었다. 1988년 40억 달러를 넘겼던 구로공단의 수출 규모는 1999년 15억 달러로 급감했다. 1980년대부터 이어진 수출 난항, 기술개발 부진, 물류비용 증가 등으로 구로공단 입주 업체들은 막대한 손실을 보았다. 조성된 지 30년이 경과한 산단의 시설 노후화 문제도 제기됐다. 정부는 구로공단 활성화를 위한 ‘첨단화 계획’을 추진했다. 산단 입주 업종을 IT 등 고부가가치 업종으로 재편하고 제조업 공장이 나간 자리에 아파트형공장을 들였다.

한편 한국 사회를 강타한 1997년 IMF 외환위기의 충격은 산단에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1998년 전국 산단 가동률은 약 76%에 그쳤다. 중소기업 밀집 지역은 더욱 심각했다. 당시 시화산단의 가동률은 60%대에 불과했는데, 이 같은 중소기업의 어려움은 노동자에게 이어졌다. 어음을 결제 받지 못한 하청기업은 줄도산했고, 노동자들은 거리로 나앉았다.

산업단지 58년이 남긴 과제

1990년대부터 성장해온 IT 등의 신산업이 중화학공업과 함께 2000년대부터 주력산업으로 떠올랐다. 기술개발, 연구 투자 등이 중요해지면서 R&D·서비스·정주여건 등 다양한 기능을 포괄하는 복합단지(클러스터)가 확대했다. 지역별로 소규모 첨단산단을 만들 수 있도록 ‘도시첨단산업단지’ 제도도 만들어졌다. 이러한 정책·사업이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기존에 해왔던 것을 이어가거나 개편한 제도들이다. 1980년대부터 시도된 지역균형발전도 여전히 주요 방침으로 남아있다.

2000년대 후반부터 정책의 초점은 기존 산단의 경쟁력을 강화하는 것에 맞춰졌다. 신규 산단 개발보단 이미 만들어진 산단을 개선하는 방침이다. 그에 따라 60·70년대에 대규모로 조성되었던 노후 산단을 개선하기 위한 지원책이 나왔다. 정부는 2009년부터 노후 산단을 재생하는 사업을 꾸준히 추진했다. 구조고도화, 혁신산업단지, 스마트그린 등 다양한 사업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공급자가 아닌 수요자를 중심에 둔 산단 지원 정책도 마련됐다. 지역 노사정이 발굴한 사업에 대해 맞춤형 재정 지원을 하는 식이다. 2019년부터 시행된 산업단지대개조 사업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러나 긴 시간 수많은 정책에도 산단을 둘러싼 많은 과제들이 여전히 남아있다. 지역균형발전은 수차례 정책을 펼치며 50년 가까이 시도했지만 아직도 대한민국의 최대 난제다. 사업 시행 이후 1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산단 노후화와 환경오염 등은 끊임없이 거론된다. 노동자들은 매년 산단에서 사고를 당한다. 산업단지 지원 정책이 수요자의 요구를 반영하지 못한다는 주장이 현장에서 여전히 나온다. 그 밖에 원-하청 불공정 거래, 열악한 노동조건 등은 지난 60년간 꾸준히 제기된 문제다. 과제를 해결하지 못한 산단은 점차 발길이 끊기고 있는 실정이다.

※ 참고 자료

- 국가기록원, 기록으로 만나는 대한민국
- 국가인권위원회, 웹진 《인권》 2018년 8월호
- 국사편찬위원회, 1970년대 중화학공업 정책, 대한민국 경제의 중추를 형성하다
- 박봉규, 《다시, 산업단지에서 희망을 찾다》, 박영사, 2010년
- 유영휘, 〈한국의 공업단지〉, 국토개발원, 1998년
- 이원보, 《한국노동운동사 100년의 기록》, 2005년
- 한국민족대백과, 중화학공업
- 한국산업단지공단, 〈산업단지 50년의 성과와 발전과제〉, 201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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