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①-1] 한국 산업단지 58년, 무엇을 남겼나 〈上〉
[커버스토리①-1] 한국 산업단지 58년, 무엇을 남겼나 〈上〉
  • 백승윤 기자
  • 승인 2022.10.19 00:00
  • 수정 2022.10.19 08:5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값싼 노동력에서 시작된 한국 산업의 성장
수출 중심 중화학공업 육성 정책의 명과 암

산업단지 리포트

산업단지가 만들어진 지 어언 60년. 대한민국의 산업을 이끌어온 산업단지는 어쩐지 힘겨워 보인다. 수명을 다해가는 산업과 중소기업 경영난, 질 나쁜 일자리, 환경오염, 산업재해 등 오랜 시간 동안 방치된 ‘낡은 것’들이 산업단지 곳곳에 먼지처럼 방치되어있다. 한국의 성장, 지역 경제 활성화, 일자리 창출 등에 한몫해온 산업단지는 어떤 모습일까. 전국 7개 지역을 중심으로 산업단지의 현재를 들여다봤다.

커버스토리 한국 산업단지의 역사

산업단지는 대한민국 경제 성장과 궤를 같이한다. 우리나라 산업의 명과 암이 산업단지에 압축되어있다. 경제를 부흥시킨 동력도, 문제점을 발생시킨 원인도 산업단지의 탄생과 흥망 속에 녹아있다.

1973년 구로공단 악기공장의 여성 노동자들 ⓒ e영상역사관

수출산업공단, 어린 여공의 탄생

일제 침략과 남북전쟁으로 한국은 경제 파탄을 겪었다. 국가 운영의 100%를 대외원조에 의지했고 국민은 빈곤에 시달렸다. 난국을 탈피하기 위한 정부 정책은 1962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발표와 함께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자립경제 달성을 위한 기반 구축’을 목표로 경공업 육성과 그를 통한 수출 증대를 꾀했다. 애초 계획은 중화학공업을 통한 경제 부흥이었으나 열악한 국가 재정 및 인프라, 기술력의 한계로 경공업을 육성하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1960년대 정부의 주요 경제 육성 전략은 ‘경공업단지’ 조성·운영이었다. 정부는 먼저 국토건설종합계획법(1963년)으로 그간 개별 기업에 의해 결정되던 공업 입지를 국가가 주도해 선정·조성할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 이어 ‘공업단지’라는 용어를 최초로 사용한 ‘수출산업공업단지개발 조성법’을 1964년 제정한다. 이는 재일교포 사업가들의 요청에서 비롯했는데, 한국으로의 진출을 뒷받침해 줄 창구(관리공단)와 보세가공(保稅加工)*이 가능한 공단 조성을 원했기 때문이다. 재일교포 기업 유치를 통해 우수한 제조 기술과 수출입로 등을 갖추려한 정부는 이를 받아들였다.
* 관세의 부과를 미룬 상태에서 수입 원료를 가공하는 일

한국 최초의 공단 조성 지대는 지금의 구로동 일대로 선정됐다. 이보다 앞서 1962년 울산공업센터 개발에 착공했지만, 공장지대이지 공단은 아니다*. 당시 구로는 공단이 들어서기 좋은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공장 설립에 적합한 토질과 지형, 원자재 운송에 유리한 교통, 공업용 용수 공급의 편리한 안양천·도림천 등이 그 예다. 더구나 서울 중심부와 가까워 노동력 확보도 수월했다. 1967년 마침내 ‘구로공단(수출산업공업단지)’이 준공됐고 입주 업체들은 섬유·봉제·가발·소형전자기기 등 경공업 제품 생산을 도맡는다. 구로공단은 1971년 수출 1억 달러를 돌파하는 등 한국 수출산업의 전진기지로 자리 잡는다.
* 초기 정유·제철·비료 공장 주축이던 울산공업센터는 이후 조선·자동차 공장 등이 차례로 들어섰고, 1991년 ‘산업입지 및 개발에 관한 법률’ 시행 이후 국내 최대 중화학산업단지인 울산미포국가산업단지로 지정된다.

구로공단의 비약적 성장은 ‘값싼 노동력’에 기반을 뒀다. 의류·신발·합판 등을 생산하는 노동자들은 저임금·장시간노동을 감수해야 했다. 이 노동집약적 산업의 중심에는 어린 직공들이 있었다. 이른바 ‘공돌이’와 ‘공순이’다. 산업이 번창할수록 공단에는 더 많은 노동자가 필요했다. 일거리를 찾아 도시로 상경한 10대 청소년, 특히 여성들이 공단으로 대거 몰렸다. 어린 여공들은 노동 착취와 사회적 멸시 등 반인권적 환경에서 업무를 이어갔다. 12시간 넘는 장시간노동. 퇴근할 때면 절도 방지 명목으로 관리자에게 매일 몸수색을 당했다. 한 공장에서 오래 일해 경력이 쌓이면 다시 견습공으로 채용돼 낮은 임금을 받기도 했다. 숙련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문화였다.

‘노동력 70%, 기계 30%'이란 구로공단 어느 사업장의 당시 표어가 상징하듯 한국 산업의 기틀은 노동력, 그것도 저렴한 노동력에서 비롯했다.

고도성장 견인한 중화학공업단지
대기업 특혜와 산업의 이중구조화

1970년대에 들어서며 산업 육성 정책의 무게는 경공업에서 중화학공업으로 이동했다. 정부는 이미 1960년대 후반부터 중화학공업에 재정·금융상의 지원 정책을 펼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 기계공업진흥법·조선공업진흥법(1967년), 전자공업진흥법(1969년), 석유화학공업육성법·철강공업육성법(1970년), 비철금속제철공업사업법(1971년) 등이다.

중화학공업육성 정책은 1973년 본격적으로 수립됐다. 국무총리 산하 기관인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는 철강·조선·비철금속·기계·전자·화학공업을 6대 전략산업으로 지정하고 육성 계획을 발표했다. 같은 해 12월 대규모의 중화학공업단지 개발을 신속하게 추진하기 위한 산업기지개발촉진법을 제정하고, 중화학공업 육성에 필요한 막대한 자금을 모으기 위해 국민투자기금법을 도입한다. 이 법에 따라 국민투자채권 등을 재원으로 1974~1979년간 1조 5,652억 원을 조성하고, 전체 대출자금 1조 4,385억 원 가운데 61%를 중화학공업에 지원했다.

남동임해지역을 중심으로 6대 전략산업별 공단이 들어선다. 비교적 적은 자본으로 최대의 효과를 올릴 수 있는 거점개발 방식이었다. 포항(철강)*, 창원(기계), 온산(비철금속), 거제(조선), 여수(석유화학) 등 원자재 수입과 완성품의 수출이 쉬운 해안 지역을 따라 띠 모양으로 중화학공업 단지가 형성됐다. 6대 전략산업 중 전자 공단만 내륙인 구미로 들어섰는데, 당시 위정자·기업인 등이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고향에 공단을 유치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선 결과라는 게 중론이다.
* 포항공업기지 등으로 불리던 포항의 공업 지역은 울산·미포국가산업단지와 마찬가지로 1991년 산입법 시행 이후 포항국가산업단지로 불린다.

특히 1973년 포항종합제철소 1기 준공 이래로 ‘산업의 쌀’로 불리는 철강업은 한국 경제발전의 밑거름 역할을 한다. 포항제철 건설에는 1965년 6월 한일협정에 따라 국내로 유입된 대일청구권 자금이 사용됐는데, 이는 지금까지도 풀리지 않는 한-일 과거사 문제의 한 축으로 남아있다.

1970년대 육성된 중화학공업은 고도성장을 견인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국민총생산에서 중화학공업의 비중은 1971년 21.5%에서 1976년 35%로 증가했다. 1976~1978년 연간 경제성장률은 10%를 넘겼다. 1977년엔 수출액 100억 달러를 달성했는데, 이는 기존 목표치를 4년가량 앞당긴 수치다. 기계를 제외한 모든 중화학공업이 수출에서 목표를 초과 달성한 결과였다. 수출에서 중화학공업 제품이 차지하는 비중은 1970년 12.8%에서 1980년 41.5%로 급증했다.

그러나 중화학공업에 치중한 투자 정책은 여러 부작용을 낳았다. 농촌 경제가 피폐해지고 이농 인구가 늘어나는 악순환에 농촌사회는 점차 무너졌다. 균형발전이 사회적 과제로 대두됐다. 시장수요를 고려하지 않은 과잉·중복투자로 수출시장을 제대로 확보하지 못한 측면도 있었다. 공업단지에는 ‘공해단지’라는 말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석유화학공단을 중심으로 한 안전사고도 끊이지 않았다.

수출주도의 중화학공업 육성 정책의 과실은 대기업에 쏠렸다. 정부의 금융특혜 등으로 대기업은 독과점적 지위를 누리며 몸집을 불렸다. 1978년 10대 재벌의 계열사 수는 럭키금성(현 LG) 47개, 대우 41개, 삼성 38개, 현대 33개, 쌍용 20개, 선경(현 SK) 27개, 국제상사 24개, 금호 19개, 삼화 30개, 한일합섬 8개로 총 318개에 달한다. 모회사가 자회사에 출자하고 자회사는 그 돈을 다시 다른 계열사에 출자하는 순환출자 구조가 형성됐다. 한 계열사가 부실해지면 다른 계열사까지 부실해지는 구조였다. 이는 IMF 외환위기 당시 대우그룹 등 재벌이 무너진 주요 원인 중 하나다.

소재·부품의 경우 국내 중소기업 육성보다 외국에 의존했다. 국내에 수직적 분업체계가 성립되지 못하고, 산업의 이중구조가 고착됐다. 정부는 ▲대-중소기업 간 상호보완적 산업생태 형성 ▲중소기업 발전 등을 명목으로 한 중화학공업의 전문화·계열화 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실행의지는 미약했다. 중소기업의 경쟁력을 강화할 기회를 놓친 건 지금도 뼈아픈 대목이다.

무엇보다 3차례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여전히 값싼 노동력에 바탕을 두었다. 1970~1980년 산업 전체 노동자의 실질임금 인상률은 8.4%인 반면, 노동생산성은 1970년대 10년을 통틀어도 연평균 10.1%씩 상승하며 실질임금 상승률을 웃돌았다. 당시 국세청에 따르면, 1978년 3월 기준 전체 노동자의 88.6%가 월 10만 원 미만의 임금을 받았다. 이는 같은 해 사회보장심의위원회가 발표한 최저생계비인 16만 8,240원에 훨씬 못 미친다.

임금이 생계비의 절반 수준인 탓에 노동자들은 연장근로와 휴일근로와 잔업, 철야근무를 거부하지 못했다. 생산직의 월평균 노동시간은 1975년 217시간에서 1980년 223시간으로 증가했다. 산업재해자 수는 1970년 3만 7,752명에서 1979년 13만 307명으로 3배 이상 늘었다. 공단 건설 중 사망하는 노동자도 부지기수였다. 직업병 환자 수도 급증해 1970년 780명이 1978년에는 4,603명에 달했다. 노동자들은 직업병 환자로 판명받아도 대부분 치료받지 못했다. 직장을 잃거나 병을 숨기고 전직했다.

열악한 노동환경에 노동자들은 결집했다. 1970년 47만 명에 불과했던 노동조합 조합원 수는 1979년 109만 명에 달했다. 노동조합 조직률은 16.8%였다. 중화학공업 육성으로 늘어난 대공장은 노동조합 조직화에 적합한 환경이기도 했다. ‘민주노조 운동’을 필두로 한 노동운동이 전개됐다. 군사정권은 폭력 조치 등으로 노동조합을 무력화했다. 민주노조 운동에 한 획을 그은 원풍모방노동조합도 정부 탄압에 1982년 와해됐다.

※ 참고 자료

- 국가기록원, 기록으로 만나는 대한민국
- 국가인권위원회, 웹진 《인권》 2018년 8월호
- 국사편찬위원회, 1970년대 중화학공업 정책, 대한민국 경제의 중추를 형성하다
- 박봉규, 《다시, 산업단지에서 희망을 찾다》, 박영사, 2010년
- 유영휘, 〈한국의 공업단지〉, 국토개발원, 1998년
- 이원보, 《한국노동운동사 100년의 기록》, 2005년
- 한국민족대백과, 중화학공업
- 한국산업단지공단, 〈산업단지 50년의 성과와 발전과제〉, 2014년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