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결자들] 한국 민주주의도 장애인을 생각하지 않았다
[연결자들] 한국 민주주의도 장애인을 생각하지 않았다
  • 손광모 기자
  • 승인 2021.07.21 00:00
  • 수정 2021.07.23 10:5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보이지 않는 장애인을 드러내다
[인터뷰] 김필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기획실장

‘연결자들’을 찾아서

우리 사회 곳곳에 숨어있는 연결자들을 찾았습니다. 총 22명을 만나 15개 인터뷰를 전합니다. 인터뷰는 우리 사회에서 빼놓고 말할 수 없는 △건강─연결의 마음 △교육─연결의 과정 △정치─연결의 확장 △환경─연결의 뿌리 △경제─연결의 포용 다섯 개 파트로 나눠서 진행했습니다. 다섯 개 파트에 노동을 굳이 넣지 않은 이유는 우리가 만난 연결자들 모두가 각자의 영역에서 누구보다 즐겁고 행복하게 일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노동이 ‘연결의 수단’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는 순간이었습니다.

하나의 키워드로 꽉꽉 채운 인터뷰집을 만든 건 창간 이후 처음 있는 일입니다. 첫 시도가 더 의미 있는 다음 시도로 이어질 수 있도록 아낌없는 격려와 피드백을 부탁드립니다. 독자와의 연결을 기다리며, <참여와혁신>도 연결자로서 언제나 함께하겠습니다.(<참여와혁신> 창간 17주년 기념호)

인터뷰_김필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기획실장

코로나19 시대, 사회적 거리두기는 안전을 위한 조치였다. 그러나 이미 사회의 가장자리에 서 있는 사람에게 거리 둘 공간은 없었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이하 전장연)는 코로나19 사태에 ‘비대면투쟁팀’을 꾸렸다가 얼마 후 회의 한 번에 해산을 결정했다. 김필순 전장연 기획실장은 “장애인의 삶은 늘 단절되고 거리두기 돼 있다. 여기서 더 거리두기에는 너무 위험했다”고 설명했다.

전장연은 지난 20년 동안 장애와 사회 사이의 거리를 좁혀왔다. 이러한 활동을 전장연은 ‘투쟁’이라 부른다. 전장연의 투쟁은 정치적이다. 사회 속 여러 이해당사자들이 조율한다는 의미의 정치가 아니다. 보이지 않는 이들이 목소리는 내는 것을 넘어, 몫 없는 이들이 자신의 몫을 요구하는 정치를 말한다. 사회 속 이해당사자의 한 명으로 장애인을 등장시킨다는 의미다. 당연히 이 과정은 숱한 불화를 일으킬 수밖에 없다. 쇠사슬과 사다리로 버스와 지하철을 세우는 이동권 투쟁에 대한 사회적 시선은 예나 지금이나 따갑다.

다만 달라진 점이 있다면 6월 항쟁을 기념해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한 단체에게 시상하는 6월 민주상 대상을 올해 전장연이 수상했다는 것이다. 마흔의 나이로 ‘장판’(장애인운동판)에 들어온 김필순 기획실장에게 장애와 사회를 연결하는 투쟁에 관해 물었다.
* 인터뷰는 6월 22일 서울 종로구 전장연 사무실에서 진행했다. 인터뷰이의 요청으로 사진 촬영은 진행하지 않았다.

사진 =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제공

‘나’와 장애의 연결

“장애인은 일상에서 만날 수 없는 사람이에요. 장애인은 벼르고 별러서 혹은 불편해져야 만날 수 있는 존재예요. 아직도 장애인은 그런 존재죠. 불편해야만 드러나요.”

장애와 사회를 연결하려면, 우선 ‘나’와 장애가 연결돼야 한다. 하지만 장애와의 연결은 쉽지 않다. 학교에서, 일터에서, 일상에서 장애인을 만나기 어렵기 때문이다. 비장애인인 김필순도 우연히 장애와 연결됐다. 교육학을 전공했던 그는 중·고등학교로 교생실습 가기가 너무 싫었다. 미적대는 도중에 ‘특수학교 실습’을 갈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무작정 나섰다. 특수교육 수업을 들은 것도 아니었지만, 어쩌다 한 달을 특수학교에서 보내게 됐다. 장애와 첫 만남은 그에게 어떤 기억이었을까.

“실습에서 만났던 담당 선생님이 학생을 대하는 모습이 기억에 남아요. 그들이 불쌍해서 아니면 그들이 특별하다는 시선으로 접근하지 않았거든요. 장애의 모습에 따라 교육의 방식은 달랐지만 특별하거나 다르지 않다는 것을 한 달 동안 배운 것 같아요.”

실습을 마친 이후 김필순은 특수교육 쪽으로 진로를 잡으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졸업 후 민간 교육 영역에서 일하게 되면서 장애와 연결은 희미해져 갔다. 8~9년 전부터 장애인자립센터에서 일하기도 했지만, ‘장애와 연결’됐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그가 장애와 다시 연결된 건 전장연과 만남 이후였다.

2001년 서울역에서 장애인 추락사고가 빈번하게 발생하는 지하철역 휠체어 리프트를 테이프로 칭칭 감았다. 박경석 전국장애인야학협의회 이사장이 휠체어 리프트를 붙잡고 발언하고 있다. 사진 최병선,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제공

한국에서 장애인 자립생활 운동의 방향은 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와 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총연합회로 나뉘지만 연합투쟁을 할 때가 있다. 당시 연합회 쪽에 일하던 김필순은 연합투쟁에서 전장연을 만났다. “저쪽(협의회)이 너무 좋았다. 자꾸만 저쪽에 눈이 가고 줄도 저쪽으로 섰다”고 그는 회상했다. 가장 흥미로운 건 한 명의 사람이었다.

“제일 놀랐던 건 박경석 선생님(당시 전장연 상임공동대표, 현 전국장애인야학협의회 이사장)이었죠. 발달장애인 중에는 서 있기 어려운 분들이 많아요. 그래서 깔판이 아주 중요한 투쟁 물품이에요. 광화문 해치마당에서 추모제를 준비하는데, 박경석 선생님이 휠체어를 타신 상태로 허리를 수그리고 깔판을 까는 거예요. 아마도 깔판 위치가 선생님 마음에 안 들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저는 대표자들이 현장에서 직접 일하는 모습을 여태껏 본 적이 없었어요. 깔판을 까는 대표자를 보면서 저쪽이 어떤 조직일까 궁금했죠.”

이후 김필순은 전장연 구성 단체 중 하나인 노들장애인야학에서 자원활동을 하다가 활동가로 살아보기로 마음먹었다. 학생운동을 한 적도 없었고, 마흔이라는 나이가 부담이기도 했다. 운동판에 있는 언니 부부의 반대도 있었다. 하지만 일을 하면서 ‘진짜 하고 싶은 일을 찾았다는 느낌’을 강하게 느꼈다. 잊고 지내던 첫 번째 연결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노들에 와서 활동을 시작한 다음에 우연히 실습했던 특수학교 주변을 지나간 적이 있었어요. 그때 그 순간이 기억났죠. ‘나 이게 되게 하고 싶었던 건데!’ 다들 졸업반의 혼돈이 있잖아요? 진로도 못 정하고요. 당시에 이걸 꼭 하고 싶어 했던 마음이 딱 연결되더라고요. 정말 10년을 돌아서 하고 싶은 걸 다시 만나서 저도 깜짝 놀랐어요.”

노동과 연결
“이것도 노동이다”

김필순이 장애인운동을 시작하면서 처음 맡은 일은 중증장애인을 집회에 참석하게 하고, 더 나아가 발언까지 할 수 있도록 활동지원하는 일이었다. 시설에서 오랫동안 생활한 중증장애인에게는 ‘시간’과 ‘약속’이라는 개념이 희미하다. 시설 장애인에게 약속은 점심시간과 취침시간뿐이다. 그마저 자신이 정한 게 아니라 시설의 규칙이었다.

“중증장애인들은 약속해본 적이 없어요. 시설이 정한 시간대에 살아요. ‘우리 오전 11시에 만나요’ 하면 ‘네!’ 대답은 해요. 그런데 11시에 나타나지 않아요. 약속 시간에 맞춰서 나올 준비를 해본 적이 없는 거예요. 약속 시간이 11시면 1시까지 천천히 와요. 그렇게 1년을 보냈더니 11시 언저리에 약속 시간을 지킬 수 있게 됐어요. 또 1년을 연습하다 보니 나오지 말라는 투쟁도 나가서 그 자리에 앉아 있더라고요. 이 과정이 저는 정말 경이롭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활동지원을 맡은 지 3년째에 접어드니 일종의 체계가 잡혔다. 이듬해 전장연은 이를 토대로 ‘권리중심 공공일자리’(이하 공공일자리)를 요구했다. 전장연의 요구를 받아들여 서울시는 2020년 ‘서울시 권리중심 중증장애인 맞춤형 공공일자리’를 만들었다.

공공일자리는 중증장애인이 집회에 참석하는 활동이나 장애인 인식개선 교육, 문화예술 활동 등을 ‘노동’으로 보고 이에 대한 보수를 지급한다는 게 핵심이다. 공공일자리에서 중증장애인들은 주20시간이나 주14시간을 일하여 한 달에 89만 원, 48만 원가량을 받는다. 비장애인의 시각에서 ‘이게 무슨 노동이냐’라고 물을만하다. 김필순은 “이것도 노동이다”라고 망설이지 않고 답했다.

전장연의 2021년 ‘대면’ 투쟁 1 2021년 5월 18일 전남도청 앞에서 전장연이 장애인 이동권 보장, 저상버스 도입, 지역사회 통합 등을 외치고 있다. ⓒ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저희는 이것도 노동이라고 이야기해요. 지난 30~40년간 직업재활이라는 영역에서 장애인의 노동을 비장애인의 영역에 맞춰 넣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했지만, 정작 일터에 장애인이 없어요. 장애인운동 안에서도 중증장애인의 노동은 특히 만들기 어려워요. 그렇다면 아예 노동의 개념을 바꿔서 장애인이 할 수 있는 일을 노동이라고 말하면 되지 않느냐는 게 권리중심 공공일자리의 핵심이에요. 비장애인의 영역에서 노동생산능력이 떨어지니 최저임금조차 안 받아도 되는 존재라고 취급받기보다 중증장애인의 이것을 노동이라고 인정하면 되는 거죠.”

그럼에도 의문은 남는다. 과연 중증장애인의 ‘이것’도 노동인가? 노동 뒤에 왠지 모르게 자연스레 따라붙는 ‘생산성’이라는 말은 공공일자리가 ‘도대체 무엇을 생산하느냐’고 묻는다. 통합교육과 지역사회 통합을 말하면서 일자리의 영역에서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분리한다는 비판도 있었다.

“지인이 다니는 직장에서 고용 의무를 지키기 위해서 정신장애인을 고용했어요. 그런데 이분이 사실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몸이 안 좋으니까 출근해서 누워 있다가 퇴근하고요. 처음에는 직장 동료들이 왜 월급 주냐는 반응이었어요. 그런데 장애인과 같이 한 공간에서 지내면서 직장 내 장애인 인식이 바뀌었어요. 물론 기존의 시각에서 이분의 역할은 아주 미미하겠지만, 직장 분위기와 문화가 바뀌는 건 돈으로 가늠할 수 없어요. 권리를 생산하는 노동으로 볼 수 있어요.”

생활과 연결
서로 기대어 사는 연립의 삶

비장애인이 만든 생산성과 효율성이라는 잣대를 대고 중증장애인이 뭘 할 수 있는지 묻는다면, ‘노력하겠다’ 혹은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대답밖에 나올 수 없다. 김필순은 “지역사회에서 중증장애를 가진 몸으로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세상에 없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이 가치 있지 않으면 무엇이 가치 있는 일이겠느냐”고 반문한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장애인들이 사회와 격리된 시설에 숨겨져 있다. 2019년 기준 3만여 명의 중증장애인이 전국 1,557개 시설에 남아 있다.

탈시설의 과정은 지난하다. 경기도 김포시에 소재한 장애인시설 향유의집은 2007년 극심한 인권 침해 사실이 드러났다. 그러나 향유의집이 폐쇄된 건 14년이 지난 2021년 4월 30일이었다. 김필순은 “이사회에서 폐쇄 결의하는 데 10년, 시설에서 일하는 노동자와 고용 승계를 조율하는 데 나머지를 썼다”고 말했다.

“사회복지사업법 개정을 통해 시설 이사회에 공익이사가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열렸어요. 그러나 그 수가 적고 다른 이사를 포섭하기가 어려워요. 이사회 결의를 받아내는 데 너무나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이사회 결의 이후 시설에 근무하는 노동자, 노동조합의 반대가 있었어요. 고용 승계 문제가 굉장히 어려웠어요. 시설 안에서도 직종이 다양해요. 탈시설할 때 고용 승계를 할 수 있는 직종이 있는 반면 물리치료사, 영양사, 조리사 등 특수고용직은 장애인이 집에 사는 상황에서는 필요가 없어요. 솔직히 지자체에서 고용 승계를 약속하지 않는 이상 대안이 없어요.”

전장연의 2021년 ‘대면’ 투쟁 2 2021년 1월 15일 전장연이 코로나19의 사각지대로 판명된 장애인 시설의 ‘긴급 탈시설’을 요구하고 있다. ⓒ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사람들은 중증장애인의 탈시설을 우려 섞인 시선으로 바라본다. 장애인은 비장애인보다 도움과 지원이 더 많이 필요한 사람이다. 시설에서 지내면 ‘효율적’으로 도움과 지원을 줄 수 있는데 왜 나오려고 하는지, 24시간 도움이 필요한 중증장애인이 시설 밖에서 뭘 할 수 있는지 의문을 제기한다. 이따금 탈시설을 주장하는 전장연을 ‘장애인 인권을 침해하는 위험한 사람들’로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김필순은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이 자립을 못 하는 전제조건이 될 수 없다”고 단언한다. 탈시설, 즉 자립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당연한 권리라는 것이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라고 전제하니까 자립을 선택의 문제로 보는데, 탈시설이나 자립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당연한 권리예요. 도움이 필요하면 도움을 주면 돼요. 노들장애인야학 학생이 쓴 글 중에 이런 구절이 있어요. ‘우리 모두는 도움을 주고, 도움을 받고 사는데, 왜 장애인만 도움을 받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하느냐.’ 좀 더 많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장애인이죠. 도움받기 때문에 자립할 수 없다고 이야기할 수 없어요.”

누구나 돈으로는 갚을 수 없는 빚을 지고 산다. 홀로서기는 어떤 도움도 받지 않는다는 게 아니라 수많은 도움 끝에 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전장연에서는 자립과 함께 서로 기대어 산다는 의미의 ‘연립(聯立)’이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점점 더 낯설어져 가는 말이기도 하다.

“예전에 동네에서 어르신들이 가난해도 같이 살았잖아요? 그때는 도움을 주고받는 관계가 너무 당연했는데, 어느 순간 우리 사회가 도움을 주고받는 것에 인색해진 것 같아요. 스스로 도움 줄 여력도 없고, 또 도움을 받기도 부담스럽고요. 그래서 장애인의 삶이 더욱 불편해 보이는 거 같아요. ‘너는 도움도 많이 필요한데 왜 그렇게 나와서 살려고 그래?’ ‘세금 더 많이 내야 하는 거 아냐?’ 이런 생각을 가지는 거죠.”

세상과 연결
“5% 민주주의”

세상에 전장연의 이름을 널리 알린 건 과격함으로 ‘악명 높은’ 이동권 투쟁 덕택이다. 쇠사슬과 사다리가 등장하는 집회를 하면서 시민들에게 많은 욕을 먹기도 했다. 하지만 전장연의 투쟁이 과격하기만 한 건 아니다.

올해 4월 7일 서울시장 보궐 선거에 맞춰 전장연은 ‘탈시설장애인당’ 투쟁을 진행했다. 선거철 장애인 정책을 알리기 위해 ‘가짜 정당’을 만들어 퍼포먼스를 벌인 것이다. 세간의 관심을 크게 받자 전장연은 선거관리위원회로부터 ‘당’이라는 말은 ‘진짜 정당’에만 붙일 수 있다는 경고장을 받기도 했다. 법 제·개정 투쟁을 많이 해야 하는 전장연의 특성상 직접 후보자를 배출해내지는 않더라도 정치인들을 만나 정책을 제안하는 등의 정치 활동은 반드시 필요하다. 이러한 활동을 무엇보다 “재미있게” 하고 싶다는 게 김필순의 생각이다.

“탈시설장애인당뿐만 아니라 예전에 폐지당도 세웠죠. 전장연의 다양한 운동 방식 중에 하나예요. 선거철이 되면 당 이름 걸고 많이 해요. 당 띠 메고 선전전도 하고요. 그런데 선관위의 경고문 받고 우리나라 정치가 얼마나 경직돼 있는지 알겠더라고요. 저희는 늘 하던 거 쭉 했을 뿐이에요. 우리끼리는 정말 재미있게 탈시설장애인당 투쟁을 했어요. 너무 재밌어서 관심을 많이 가져준 거 같아요. 가끔은 거친 몸싸움이나 쇠사슬이나 사다리가 나오기도 하지만 즐겁게 정치에 참여하기 위해 재밌는 퍼포먼스를 준비해요. 다가오는 대선도 더 열심히 준비하고 있어요. 과태료 맞아도 돼요. 돈 많이 모아 놨어요. 하하.”

전장연의 2021년 ‘대면’ 투쟁 3 2021년 3월 세종시에서 열린 420장애인차별철폐공동투쟁단의 집회 ⓒ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전장연이 이번에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한 단체에 시상하는 6월 민주상에 지원하게 된 계기는 “돈이 없어서”였다. 절보다는 잿밥에 더 관심 있는 셈이었다. 하지만 지원서를 도맡아 작성한 김필순은 “정말 돈 없어서 썼는데, 쓰다 보니 받고 싶어졌고, 우리가 받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의 자신감은 전장연의 “단단한 투쟁”에서 나오는 듯했다.

“우리나라 인구의 5%가 장애인이거든요. 전장연의 운동으로 5%의 장애인 민주주의의 영역을 넓혔다고 봐요. 사실 한국 민주주의 안에서도 장애인을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장애인은 보이는 존재인 적이 없었거든요. 스스로 세상을 소란스럽고 불편하게 하면서 이제 겨우 아는 존재가 된 거잖아요? 박경석 선생님도 많이 쓰는 말인데 장애인운동은 0이 아니라 마이너스로 시작했어요. 정말 열심히 20년을 싸워서 이제 겨우 0의 수준에 온 것 같아요. 가진 게 없으니까 새로운 걸 계속 만들 수밖에 없잖아요? 그래서 장애인운동은 끊임없을 것 같아요. 시설도 다 폐쇄돼야 하고요. 한 50년은 끊임없이 할 수 있지 않을까요? 하하.” 

공통질문 "내가 경험한 연결의 순간"
“저는 평범한 비장애인의 삶을 오랫동안 살아왔는데 그걸 벗어나는 일이 별로 없었어요. 아주 평범한 사람이었죠. 별다른 계기가 없었다면 그냥 계속 살았겠죠. 그런데 제가 처음으로 대학교 4학년 때 가출을 했거든요. 제가 네팔을 엄청 가고 싶었는데 집에서 안 보내줄 것 같은 거예요. 그래서 어디 학교에서 간다고 뻥치고 가출했죠. 엄마가 출입국관리사무소에 신고했어요. 하하. 가출하고 단절을 경험했는데, 그 경험 때문에 제가 다른 세상을 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아무도 저한테 그런 삶을 살라고 한 적이 없고 그런 삶을 요구하지도 않았어요. 가출하기로 마음먹고 결정한 거 자체가 앞으로의 연결이었어요.”

여담
전장연이 이동권 투쟁을 할 때면 현장 활동가들은 욕을 무지하게 먹는다고 한다. 투쟁 시작 1시간 정도가 지나면 전장연 사무실 전화에도 불이 난다. 아무리 단련된 활동가라고 해도 ‘나쁜 말’에 적응하기는 쉽지 않은 법. 이번 여름 워크숍에서 전장연은 시민들의 항의에 대처할 수 있는 10개의 대응 언어를 만들기로 했다! 전장연에 괜히 성내고 욕 해봐야 타격은(?) 미미할 것. 그러니 이동권 투쟁을 만나면 ①일단 공감하기 ②어서 다른 교통수단 찾기 ③도저히 모르겠다면 전장연에 전화해 물어보기 ④끊을 때는 ‘힘내세요!’라고 응원하기를 실천해 보는 건 어떨까.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