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연합 기고] 뜨거운 열기와 조명이 꺼진 뒤, 어떤 공간을 꿈꾸는가
[녹색연합 기고] 뜨거운 열기와 조명이 꺼진 뒤, 어떤 공간을 꿈꾸는가
  • 참여와혁신
  • 승인 2022.12.15 14:46
  • 수정 2022.12.15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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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윤소영 녹색연합 협동사무처장 mint@greenkorea.org

[산업 유산과 지역 활성화②] 독일 루르 공업지대의 산업 유산 도시재생 사례

지난달에 이어 독일 노르트라인 베스트팔렌(Nordrhein-Westfalen)주의 루르(Ruhr) 공업지대의 핵심지였던 뒤스부르크(Duisburg)와 에센(Essen) 두 도시의 산업 유산 재생 사례를 소개한다. 글쓴이는 ‘로컬비’와 함께 유럽 연수를 다녀왔다. 한 시대를 이끈 유럽 산업시설이 그 쓰임을 다한 이후 지역 재생에 어떻게 새롭게 기여하고 있는지 문화와 환경의 관점으로 기록하고자 했다. ‘로컬비’는 ‘아산 프론티어 리더십 아카데미’에서 구성된 프로젝트팀이다

2006년 백두대간 조사를 위해 찾은 첫 현장은 강원도 정선 고한과 태백이었다. 함백산 기슭의 폐탄광 마을은 흡사 화려한 조명이 꺼진 무대 같았다. 전국 석탄 생산량의 3분의 1을 담당하던 함백산 폐탄광. 한창때는 지나가는 개도 만 원짜리 지폐를 물고 다녔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던 곳이다. 영화로운 시절은 탄광이 하나둘 문을 닫으며 과거가 되었다. 남은 것은 졸졸이 붙은 옛 건물과 그 옆을 흐르는 붉게 오염된 개천뿐이었다. 폐광 지역을 지원하는 특별법으로 내국인 카지노가 들어서고, 스키장이 개장했다. 스러졌던 마을이 들썩였다. 대규모 개발이 지역을 다시 살릴 것이라는 허황된 꿈은 확대·재생산되었다.

독일 루르(Ruhr) 공업지대 재생지역 방문을 계획할 때 문득 떠오른 장면이다. 루르 공업지대가 도시 재생의 모델을 일궈낸 비법이 무엇인지, 우리나라 정선과 태백의 개발 사례와 무엇이 다른지 살펴보고 싶었다.

에센 촐페라인,
서사로 채워진 옛 탄광

첫 번째 방문지는 에센(Essen)시의 촐페라인(Zollverein)이다. 이곳은 산업혁명 시기부터 1986년 문을 닫을 때까지 5,000여 명의 광부가 상시 일하던 유럽 최대 탄광이었다. 100헥타르의 넓은 부지에 석탄 광산과 철강용 코크스 공장을 갖춘 옛 산업단지 주차장에 들어서자마자 붉은 벽돌의 각진 건축미가 시선을 압도했다. 수직갱 타워의 붉은 철 구조물은 홈페이지의 소개 글처럼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탄광’이라 부를 만했다.

독일 노르트라인 베스트팔렌 루르 공업지대의 핵심지 중 하나였던 에센 시(市)에 위치한 촐페라인 타워 ⓒ 녹색연합

촐페라인 폐광 이후 마지막 갱도였던 12번째 수직갱(Shaft ⅩⅡ)이 있던 곳은 산업 번성의 역사를 기록한 박물관이 되었다. 보일러실이 있던 곳에선 세계적인 디자인 공모전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Red-Dot Design Award)’ 수상작을 전시했다. 디자인 학교도 만들어졌다. 역사의 복원을 넘어 미래 방향을 제안하고 있음을 공간의 구성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공연, 전시 같은 문화 예술 이벤트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공간 전체가 시민들의 일상적인 문화·휴식 공간으로 활용된다는 점이었다. 널찍한 야외 공간마다 아이들이 뛰어노는 소리로 가득한 탓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의 엄숙한 분위기나 폐광 지역의 쓸쓸함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여름에는 수영장으로, 겨울에는 아이스링크로 변모하는 공간도 있었다. 석탄을 나르던 레일은 산책 길이 되었다.

산업 발전 시기의 석탄광산은 도시와 나라 전체를 움직이는 동력이었을 것이다. 철도와 도로는 대부분 광부와 석탄의 수송을 위해서만 쓰였다. 이웃한 네덜란드·이탈리아·폴란드 등에서 수많은 광부가 들어와 일하며 지역의 경제를 움직였다. 1960년대 우리나라의 파독광부들이 외화벌이를 했던 곳 중의 하나도 바로 이 탄광이다. 촐페라인 박물관에선 우리나라 탄광 노동자들의 역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왼쪽 가슴팍에 번호가 새겨진 탄가루투성이 작업복은 어느 가장의 고되지만 지켜야 할 삶으로 다가왔다. 파독광부 기록의 증거를 마주한 이후 어느 공간의 유산으로서 가치는 기능뿐만 아니라 서사가 채워져야 함을 깨달았다.

뒤스부르크 랜드스케이프,
개개인을 위한 자연 친화 놀이공원

에센이 석탄으로 번성한 도시였다면 이웃한 뒤스부르크(Duisburg)는 철강의 도시였다. 랜드스케이프공원(landschaftspark)은 독일 최대의 철강기업 티센(Thyssen)의 제철소가 자리했던 곳이다. 제철소는 철강 산업의 쇠퇴와 공장의 이전으로 결국 1985년 문을 닫았고, 녹슨 철 구조물을 그대로 존치한 채 자연 친화적 놀이공원으로 탈바꿈해 현재까지 운영되고 있다.

우리를 안내한 가이드에 따르면, 루르 공업지대의 다른 도시처럼 뒤스부르크는 제철 외에 다른 산업 기반이 없는 곳이었다. 180헥타르의 넓은 부지의 폐 제철소가 시민을 위한 공간으로 탈바꿈하게 된 것은 그 무렵 정부에서 실행하던 ‘엠셔 파크 프로젝트(Emscher Park Project)’ 때문이었다. 쓸모를 다한 산업시설을 활용해 지역의 활성화 구조를 바꾸자는 취지로 진행된 프로젝트에는 중요한 몇 가지 원칙이 있었다. 첫째 오염 정화와 함께 환경을 복원하고, 둘째 시설을 최대한 재활용해 산업 유산의 가치를 보존하도록 했으며, 마지막으로 문화예술을 결합한 시민의 공간으로 만들어야 했다. 이 이야기를 듣고 나니 생태 트레킹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야생동식물 생태 조사 보고서를 기념품 숍에서 판매하던 촐페라인의 독특한 상품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랜드스케이프 공원이 다른 도시공원과 다른 점은 다이빙·클라이밍·하이킹·자전거 등 레저 스포츠를 즐기기 위한 공간으로 계획된 점이다. 오래된 가스 저장고는 지역 다이빙 클럽과 연계해 실내 스쿠버다이빙 센터가 되었다. 코크스와 철광석을 보관하던 벙커는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는 클라이밍 가든(CLIMBING GARDEN)으로 바뀌었다. 공원의 랜드마크인 용광로 위 전망대도 예사롭지 않았다. 바닥이 그대로 내려다 보이는 탓에 후들거리는 다리를 달래며 올라야 했다. 미끄럼틀은 모험심이 없으면 탈 수 없을 정도였다. 일 년 내내 24시간 무료 개방하고, 반려동물 동반이 가능했다. QR코드로 넓은 공원의 다양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시설 관리는 시에서 맡았다. 취향에 따라 다양하게 즐길 수 있는 시설을 직접 체험해 보니, ‘가족공원이 아닌 개인공원으로 만들었다’는 설계자의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었다. 

루르 공업지역은 그 어느 곳보다 단일 산업 의존도가 큰 곳이었다. 산업 구조가 무너졌을 때 지역경제와 사회의 충격은 클 수밖에 없다. 목표 없는 공간 리모델링 수준으로 지역재생을 도모할 수 없던 이유다. 두 사례는 산업 유산의 재생 목적이 대체 산업 발굴이 아니라 문화재생이었다는 점에서 특별했다. 공간 내 기존 시설을 최대한 활용하되, 어떻게 이용자들이 찾을 문화공간으로 조성할 것인가를 최우선에 두었다. 관광은 부가 효과였다.

우리의 폐광지역으로 돌아가 보자. ‘폐광지역 개발지원에 관한 특별법’은 두 번의 개정을 거쳐 적용기간이 연장되었고, 지난 25년간 3조 원이 넘는 국고를 지원했다. 기존의 폐광지역은 여전히 활성화해야 하고, 새로운 폐광지역도 늘어날 예정이다. 우리의 경제발전을 이끌었던 산업 유산의 앞으로의 방향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 참고
촐페라인 홈페이지 www.zollverein.de
랜드스케이프 공원 홈페이지 www.landschaftspark.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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